[반가사유상] 돌에 새겨진 반가사유상

2023-05-23     유동영

‘미륵반가사유상’에는 고요와 평안과 
잔잔한 미소가 스며있으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는 무거운 
고뇌가 감돌고 있을 뿐입니다.  -법정 스님

봉황리 마애미륵보살반가사유상, 용현리 마애미륵보살반가사유상, 
북지리 석조반가사유상, 신선사 마애미륵보살반가사유상, 
송화산 석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 
관음리 석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 7구의 반가사유상을 싣는다. 

애초 국립청주박물관의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은 박물관이 제공하는 자료 사진을 본문에 넣을 예정이었으나, 별도 전시실에 진열된 불비상들을 보면서 계획이 바뀌었다. 이 전시실에 놓인 보물들을 관람객이 보는 시선과 조명으로 촬영을 해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청주박물관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독특한 외형과 구조만으로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전 진열은 박물관이 자랑하는 불비상들도 제대로 빛이 나지 않을 만큼 공간과 유물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었다. 그랬던 곳이 지금은 조명은 밝아졌고 진열장 유리의 투명도는 중앙박물관보다도 나아졌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보고의 땅임을 자랑하듯 빛나는 유물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경주석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석조 불상들은 잘 맞춰진 조명에 미소를 지었다. 

국보인 백률사 부처님도 작은 방을 차지하고 당당하게 위용을 뽐냈다. 박물관 전시 변화에 양질의 빛을 내는 고품질 LED 조명의 역할이 커 보인다. 작은 크기의 LED는 유물의 부분들을 적절하게 비추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 몇 곳을 돌아본 것이긴 하나 참으로 오랜만에 세금 내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촬영에 도움을 주신 중앙, 경주, 경북대 박물관 관계자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특히 갑작스러운 촬영 부탁에도 흔쾌히 도움을 준 국립청주박물관 김연희 학예사 선생님에게 감사를 전한다.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은 김유신 장군 재실의 ‘금산재’에서 발견돼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신라미술관 2층의 쉬어 가는 공간에 약사부처님과 마주보고 있다. 조성 연대는 신라의 여느 반가사유상과 마찬가지로 7세기 초 무렵으로 본다. ‘북지리 반가사유상’에 비해 오른쪽 다리의 경사가 낮고 왼쪽 다리의 옷 흐름이 완만해 유연함과 생동감은 덜하나 상반신이 남아 있어서 더 쉽게 본래의 상을 그려볼 수 있다. 사진은 머리와 손이 없는 상반신을 가리고자 다리 쪽에 부분 조명을 넣었다. 

 

‘북지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처음 본 건 우연이었다. 수 해 전 박물관 뜰에 놓인 승탑을 보기위해 갔다가 박물관 창문 너머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뿜는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먼 거리에서는 창문의 반사 때문에 교실 안의 커다란 물체를 또렷하게 볼 수 없었다.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섰을 때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엇갈렸다. 
4m가 넘었을 반가사유상의 잘록한 허리와 힘 있게 솟은 오른쪽 다리의 경사, 그리고 왼쪽 다리와 좌대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의 표현은 걸림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이 밖에도 경북대학교 박물관 뜰에는 불교와 유교 석조물들이 가득하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에서 남쪽으로 20m 지점에 남한 내 유일한 고구려 양식으로 보는 ‘봉황리 교각리마애불’이 있다. 
반가사유상과 협시 보살의 훼손은 나무를 하러다니던 마을 주민 두 사람이 망치로 부순 것이라 한다. 

꼭 10년 만에 봉황리 마애불상군을 다시 찾았다. 반가사유불상군 뿐만 아니라 남한 내 유일한 고구려 양식의 마애불이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기도 중인 스님을 우연히 만났다. 서울 봉원사에서 소임을 보시는 월타 스님이있다. 스님은 선배 스님인 도림 스님과 함께 벌써 2년 동안 기도 중이고, 평소에는 도림 스님이 사시와 저녁 기도를 하고, 오늘처럼 도림 스님에게 일이 생길 때는 스님이 서울에서 내려와 대체 한다는 것이다. 며칠 뒤 봉황리에서 도림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두 스님이 이곳에서 기도하게 된 배경과 기도하며 받은 영험 등을 이야기했다. 특히 불화를 그리는 스님은 봉황리 마애부처님들의 역사성과 도상의 특징 및 예술성을 힘주어 설명했다.

“마애부처님이 계신 여기 햇골산 3만 평이 월타 스님 신도분 소유였어요. 2021년에 신도님이 저희들이 살 수 있으면 시주를 하겠다고 해서 와보니까 너무 좋아서 법인체를 만들어 등기를 마쳤죠. 그동안 드시지도 못하고 잠들어 계신 부처님이라 우리가 3년은 기도를 해야 부처님께서 눈을 뜨시지 않겠어요. 기도를 하다 보면 우리가 원력을 세우고 있는 교육도량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종단을 떠나 자유롭게 누구나 오가는 그런 곳을 구상 중이에요.”

 

훼손한 머리는 그들이 집에 두었고, 그 뒤 두 사람의 집안은 쫄딱 망했다. 그중 한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단다

“21년 5월에 처음 와서 기도하고 초파일에 등도 달면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당시 마을 주민들이 혹시나 저희들이 기도한다고 보물 부처님들을 훼손할까봐 시청에 신고도 하고 직접 꾸중도 하고 그랬죠. 그러던 분들이 그동안 저희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니까 지금은 신도가 되기도 하고 응원도 해요. 기도하다 지치면 쉬라고 여기 농막도 내주시고 옆의 돈사에서 전기도 빼주시고요. 기도를 하다 보면 부처님의 상호도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바뀌는 걸 느끼죠. 여기 부처님과 보살님 도상은 연구는 문명대 교수님 거 말고는 연구가 없더라고요. 저도 그분 연구에 동의를 해요. 이곳 청주가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뺏고 뺏기는 접전지였잖아요. 저기 산 하나 너머에 중원고구려비가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가 여기를 점령한 뒤 고구려비도 세우고 또 여기 햇골산에 마애부처님을 모신 것 같아요. 바위를 깊이 파낸 양감을 보면 국가 지원 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에요. 그 뒤 신라가 점령해서는 미륵반가사유보살님을 새겼고요. 저 도상에는 ‘미륵상생’과 ‘미륵하생’이 모두 담겨 있어요. 미륵보살님이 도솔천에서 미륵부처님이 되는 게 미륵 상생이고 미륵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미래 세상에 나투시는 게 미륵하생이잖아요. 그래서 보살님에도 큰 반가사유상이 가운데 새겨 있고 우측으로 작은 부처님들이 새겨져 있는 거죠. 문 교수님은 좌측에도 우측과 같은 협시 부처님들이 똑같이 새겨져 있었을 텐데 박락이 된 것 같다고 쓰셨더라고요. 미륵보살님이 때가 되면 금방 나투셔야 하니까 저렇게 반가로 앉아 계시는 거죠. 미륵부처님의 가리포 머지않아 이곳에 법향 가득한 도량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도림 스님

 

‘관음리 석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문경 관음리와 충주 미륵리를 잇는 하늘재 아래의 사과 과수원 옆에 있다. 눈은 작고 손은 두터우며 다리는 뭉툭해서 다리와 연화 대좌가 구분이 되지 않는 거칠고 투박한 반가사유상이다. 얼핏 보면 사과밭 한가운데 방치돼 있는 시골의 볼품없는 유물이다. 이런데도 꽤 많은 팬덤을 지녔다. 알맞은 빛이라도 들면 표정 없는 고졸한 미소가 보는 이의 말문을 닫게 만든다. ‘봉황리 마애교각불상’과 같이 광배에는 다섯 구의 화불이 새겨져 있다. 문경 갈평리 5층 석탑의 본래 자리는 이 반가사유상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이었으나, 도난 위험 때문에 현재 자리로 옮겼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단석산 아래 ㄷ 자 모양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10구의 마애불상들 가운데 하나이고. 북쪽 면 5m 정도 위에 3구의 불상들과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 함께 새겨진 세 부처님의 손이 공양을 올리듯 모두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향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어쩌면 ㄷ 자 동쪽 면에 8m 높이로 새겨진 부처님을 향한 것일 수도 있으나 굳이 중간에 반가사유 보살님을 배치했다. 무리로 새겨진 점이 ‘봉황리 마애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비슷하다. 햇빛이 강한 날이라 해도 투명한 천장이 조도를 줄여주긴 하지만 빛이 약해 바위의 반사가 덜한 날 찾으면 조금 더 편안한 불보살님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글・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