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차차차茶茶茶] 茶의 오묘함을 말하다

한국의 차, 선禪의 맛일까? -초의선사와 『동다송』

2023-04-26     이창숙

다산(茶山)과의 만남

매년 봄 남쪽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차향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 옛날 차를 즐기는 선인들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차를 좋아하거나 우리 차(茶)에 관심이 있다면 초의선사(1786~1866)에 대해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초의(草衣)’는 법호이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다. 전남 무안 삼향면에서 태어나 15세에 나주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했으며, 해남 대흥사 12대 종사이다. 시(詩), 선(禪), 차(茶), 불화(佛畫)에 능했으며 오늘날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초의에게 유가(儒家)의 철학적인 식견을 넓혀준 사람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다. 둘의 만남은 1809년, 아암 혜장(兒菴 惠藏, 1772~1811) 스님의 소개로 이루어진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과의 인연은 후일 사대부들과 교유하게 되는 토대가 됐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초의는 “다산을 따라 유서(儒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시를 배웠다”고 한다. 당시 불가(佛家)의 승려와 유가(儒家)의 문사들 사이에는 교유의 어려움이 있었는데, 초의가 쓴 「상정승지서(上丁承旨書)」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근자에 어떤 요망한 산승(山僧)이, 혹은 제가 송암(松庵)에 머무는 동안 유림(儒林)으로 돌아설 조짐이 있다고 떠들어대어, 그 말이 은사 스님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은사 스님도 덩달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이런 말 때문에 스승님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되어 왕래가 드물어 마음속이 거칠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모실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주변의 수군거림으로 인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정약용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하며, 가르침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초의의 글이다. 이렇게 시작된 초의와 정약용의 인연은 아들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1783~1859)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에서 정학연을 만나 학림암에 머물게 된 초의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도 만나게 된다. 추사와 그의 아우 산천도인 김명희(山泉道人 金命喜, 1788~1857)가 교분을 맺기 시작한 때는 1815년이다. 

초의가 만든 차가 처음부터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의 많은 경화사족(京華士族)과 교유가 확대된 것은 1830년쯤부터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고, 때로는 차를 보내달라는 ‘걸명시(乞茗詩)’를 보내며 초의는 그에 화답시를 보낸다. 이렇게 초의차에 대한 애호층이 형성됐고 초의와 경화사족들은 품격 있는 조선의 차 문화를 즐겼다. 초의가 만든 차는 당시 유행했던 중국차와 비교되며, 경화사족들 사이에서 조선의 차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초의선사 진영.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

 

“편지는 됐고, 차만 보내시오”

당시 중국에서 유입된 차가 경화사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차와 초의차를 비교하는 내용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늙은 서생 평소 차를 좋아하지 않아, 
하늘이 그 어리석음을 미워해 학질에 걸리게 했네. 
더워 죽는 것은 걱정이 없으나 목말라 죽는 것은 근심이라, 
급히 풍로에 찻잎을 끓여 마셨네. 
북경에서 들여온 가짜 차는 많은데, 
향편이니 주란이니 하며 비단으로 쌌도다. 
내가 듣기로는 좋은 차는 예쁜 여인과 같다는데, 
하녀와 같은 차, 추하기 더욱 심하구나. 
초의선사가 우전차를 보내왔다기에, 
대 껍질로 싼 새매 발톱과 보리잎 같은 좋은 차 손수 개봉했네. 
우울함과 번뇌 씻어주는 공덕과 효험은 더할 나위 없고, 
그 효과는 빠르고 산뜻하여 어찌 이리 크리오. 
노스님 차 가리기 마치 부처님 고르듯 하였으니, 
일창일기만을 엄격히 지켜 땄네. 
더욱이 찻잎 덖기를 정성 들여 원통(圓通)함을 얻으니, 
향기와 맛에 따라 바라밀 경지에 들게 하였네. (후략)”
_ 김명희, 『초의시고』 ‘초의에게 차를 받고 사례하다’

김명희가 학질을 앓게 됐는데, 초의차를 선물로 받고 초의의 차 솜씨를 칭찬한다. 차를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알 수 있다. ‘북경에서 들여온 차는 소문만 아름다울 뿐 추악하다’는 시의 내용으로 보아, 중국차는 포장에 비해 품질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다. 사실 김명희는 차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런 이유로 차를 가까이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초의가 보낸 대껍질로 싼 우전차를 급히 풍로에 끓여 마시니, 그 효과가 빠르게 나타났다. 김명희는 노스님의 정성으로 만든, 차의 향기와 맛에 바라밀 경지에 들었다고까지 말한다. 초의가 만든 차가 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칭송한 시다.

추사 김정희 역시 초의가 보낸 차를 마시고 품평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가 1838년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차를 보내주니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낍니다만, 매번 차를 덖는 법이 조금 지나쳐 차의 정기가 덜 드러난 듯합니다. 차를 다시 만들 때는 화후(火候)를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찻잎을 덖는 과정에서 불 조절이 잘못됐다고 지적한 것으로 보아, 추사는 이미 차 맛에 대한 기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걸명(乞茗) 편지를 보면 추사가 얼마나 초의차를 애타게 기다리는지 알 수 있다. 

“편지만 있고 차는 보이지 않는구려. 산속에 바쁜 일이 없을 터인데, 내가 이렇게 간절한데.... 늙어 머리가 다 희고 갑작스럽게 이렇게 하니 참으로 우습구려. 사람의 인연을 양단간에 끊겠다는 건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오!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편지도 보고 싶지 않소. 다만 차의 인연만은 없애지 못하고, 쉽사리 끊어버릴 수가 없구려. 이렇게 재촉하니 편지는 필요 없고, 다만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함께 보내시면 되오.” 

추사는 기다리던 차는 오지 않고 편지만 당도하자,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조른다. 편지 말미에는 “차를 보내지 않으면 마조 스님의 할과 덕산 스님의 몽둥이를 피해 달아날 도리가 없을 터이니, 다 미루고 이만 줄이오”라며 으름장까지 놓는다. 추사와 초의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추사의 편지에는 신분의 차이보다는 차를 잘 만드는 동갑 스님에게 차를 청하는 간절함이 배어 있다.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는 금령 박영보(錦舲 朴永輔, 1808~1872)의 스승으로, 금령이 준 초의차를 맛본 후 초의를 ‘전다박사(煎茶博士)’라 불렀다. 그는 초의의 차를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나는 맛에 대해 욕심이 없고 담백하지만, 차만은 그렇지 못하다. 차를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든다. 중국의 용단차와 봉미차는 훌륭하지만 그 값이 황금 무게와 같아 너무 사치스럽다. 초의의 차를 마셔 기름기를 씻어내니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날아갈 것 같다.”

차를 보내달라고 으름장 놓는 추사를 비롯한 애호층이 없었다면 초의차는 빛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다송(東茶頌)

초의가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한 시기는 1837년으로, 해거 홍현주(海居 洪顯周, 1793~1865)의 다도에 대한 물음에 초의가 답한 글이다. 홍현주는 정조의 사위로 그가 남긴 차와 관련된 시가 무려 110수나 될 정도로 차를 즐겼다. 

홍현주와의 만남은 스승 완호의 삼여탑에 새길 시문을 받기 위해, 초의가 직접 만든 차를 가지고 상경하면서부터다. 상경한 초의는 경화사족들과의 시회(詩會)에 참여하게 되는데, 1831년 청량산방 송헌에서 홍현주를 만난다. 초의는 시회에 늦게 도착했지만 다정하게 맞이한 홍현주를 잊지 못했고, 그때의 감격을 『동다송』에 드러내기도 했다. 홍현주가 북산도인 변지화(卞持和)편에 초의에게 다도를 물어, 그에 대한 답으로 초의가 지어 올린 것이 『동다송』이다.

『동다송』은 ‘조선에서 나는 차를 칭송한 글’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풍토와 정서에 맞는 차나무 환경, 차를 만들고 마시는 것에 관해 기록한 한국 차의 기초가 되는 귀중한 차 전문서다. 많은 문헌을 인용하고 있으며, 초의가 차를 직접 만들고 체득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의는 차나무의 생육조건과 찻잎의 모양, 차를 만들고 마시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지 강조하며 그 정밀함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했다.

“찻잎을 채취할 때는 오묘함을 다해야 하고, 차를 만들 때는 정밀함이 지극해야 한다. 물은 진수를 얻어야 하고 차를 우리는 것은 중도를 지켜야만 차와 물이 서로 어우러져 건령(健靈)이 드러난다.”

즉, 찻잎을 딸 때의 오묘함이란 ‘그 시기에 있어 너무 이르면 참된 향이 피지 않고 늦으면 차의 맛이 흩어지니, 때를 놓치지 않는 것’으로, 찻잎을 채취하는 시기의 중요함을 말한다. 찻잎을 너무 일찍 따면 참된 향이 피지 않고, 늦으면 차의 기미가 흩어진다. 알맞은 시기에 딴 잎으로 차를 만들어야 좋은 차를 만들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찻잎을 따는 시기를 곡우(穀雨, 4월 20일)니 입하(立夏, 5월 6일)니 하기보다는, 우리의 기후 변화에 맞게 채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찻잎을 채취할 때 날씨는 맑아야 하고, 이른 아침에 촉촉이 이슬을 머금은 찻잎을 따는 것이 가장 좋으며, 한낮에 채취하는 것은 그다음이라 했다. 

“차를 만들 때는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이 정밀하게 해야 한다. 즉 채취한 찻잎은 크기를 선별해야 하며, 솥에 찻잎을 넣고 덖어내는데 불 조절을 잘해야 한다. 찻잎을 덖고 말리는 것에는 법도가 있다. 이처럼 차를 만드는 것에는 현묘함이 있어 말로 드러내기가 어렵다.”

이 밖에도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좋은 물이 있어야 하며, 차 양이 많으면 맛이 쓰고 향이 가라앉으며, 물의 양이 많으면 차 맛이 없고 색이 옅어진다고 했다. 또한 “차를 마실 때도 사람이 많고 적음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며, “혼자 마시면 심오한 경지에 이르고, 둘이 마시면 좋으며, 서넛이 마시면 정취가 있으며, 대여섯이 마시면 들뜨게 되고, 예닐곱이 마시면 그저 마실 뿐”이라고 했다.

한국의 차, 선(禪)의 맛일까? 조선 후기, 초의와 초의차를 알아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선의 맛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차는 즐기는 사람 마음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났다.  

심사정의 송하음다도(松下飮茶圖), 리움미술관 소장

 

이창숙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박사, 현재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예문화와다도학과 초빙교수이자 문화살림연구원장이다. 저서로 『커피와 차, 인문으로 마시다』, 『초의 의순의 동다송·다신전 연구』(공저)가 있다. 전북도민일보에서 ‘차의 맛 소통의 맛’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