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서원이 된 사찰

“공존의 시간을 이루다”

2023-03-28     이지범

잘 알려지지 않은 영남의 명산, 비슬산. 이 비슬산 자락의 고을에 얽힌 이야기가 여럿 있다. 예로부터 영남의 현풍과 유가 고을 사람들은 서당과 서원, 향교에서 『소학(小學)』으로 인성을 길렀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중엽까지 풍미했던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는 말은 1751년 이중환이 『택리지』에 기록할 정도였다. 그 유명세를 따라 이곳에도 서원과 향교가 남아 있다. 유학 동네의 서원과 향교, 그 속에 공존하고 있는 절의 모습도 우리가 새롭게 볼 측면들이다. 유교 사관에 젖은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기층 민중들과 삶을 함께했던 수행자들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라 고증의 가치도 있다. 

1392년 조선 개국으로 ‘학문의 전당’ 지형이 바뀌었다. 불교는 유학인 성리학으로, 절은 서원과 수호(守護)사찰로 대체됐다.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길복(吉福)을 위해 국가에서 1407년부터 지정한 자복(資福)사찰은 그 하나의 증거다. 

16세기부터 절들은 수호사찰로도 변모했다. 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 수호나 왕실의 태실 안위와 보호 또는 전란의 공을 세운 이를 위한 사당으로 바뀌었다. 시묘살이를 위한 암자를 겸한 수호사(守護舍)도 있다. 또 서원의 수호사찰로 왕릉과 왕실 묘를 지키는 능침 혹은 봉릉사찰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 사찰은 서원·향교를 보좌하는 역할과 임무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빈대 설화’도 생겨났다. “유독 절에 빈대가 들끓어서 승려가 절을 불태우고 떠났다”는 빈대사찰의 구전설화는 유자(儒子)로 지칭되는 빈대들의 산천 유람에 가마꾼과 시중, 엄청난 조세와 부역을 견디다 못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버린 폐사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생겨난 텅 빈 절을 말한다. 

소수서원, 남계서원 등과 함께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금화사 터의 용두 4기와 장대석, 주초를 옮겨 지었다. 

 

도동서원

오늘날 비슬산 자락의 달성군에는 유교 유산이 곳곳에 있다. 조선시대 향교는 ‘일읍일교(一邑一校)’ 원칙으로 현풍향교가 있다. 서원은 11개소, 서당은 남계서당(유가읍)·승호서당(논공읍)·금암서당(다사읍)이 현존한다. 정사(精舍)인 수봉정사(화원읍) 1곳과 육신사, 포산사 등 사당(祠堂) 2곳도 남아 있다. 

2019년 7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대구 달성 도동서원은 ‘소학의 화신’으로 불린 김굉필을 배향하는 사액(임금이 내린 편액)서원으로, 서원 철폐령에도 제외된 곳이다. 전학후묘(前學後廟)·전저후고(前低後高)의 건물배치는 중국 송나라 주희가 말한 ‘추뉴(樞紐, 만물의 축과 중심을 나타냄)’를 이뤘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추모하기 위해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세워졌었다. 4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앞마당에 있다. 

도동서원은 1568년 비슬산 기슭의 쌍계골에 처음 건립된 쌍계서원으로 정유재란 때 불에 타고, 1605년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중건됐다가, 1607년 사액 받은 이름이다. 퇴계 이황은 한훤당 김굉필을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이라고 칭송했다. 사액된 기념으로 한강 정구가 심은 은행나무, 흙 담장, ‘물 위에 비친 달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수월루, ‘마음의 근본을 부른다’는 환주문, 배움터인 중정당(보물) 등 볼거리가 많다. ‘조화로운 중용을 이룬다’는 중정당 건물에 세워진 6개 민흘림기둥 위쪽에 ‘상지(上紙)’라는 하얀 닥종이로 90cm 띠를 두른 것은 조선 오현(五賢) 중에 으뜸을 모신 서원이란 상징인데, 전국의 서원에서도 유일하다. 또 아래 기단에는 용머리 4개를 돌출해 놓았다. 선비들의 학문 성취와 출세를 기원하는 등용문의 돌조각으로, 서원 앞 낙동강[西江]의 수해가 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벽사 의미로 두었다. 

도동서원의 석조물은 절과 서원이 공존하는 대표 사례다. 『영남읍지』(1871)와 『현풍군읍지』(1899), 『교남지』(1940)에는 “현 동쪽 5리에 창건 시기를 알 수 없는 금화사 옛터가 있다. 이 절의 주초와 탑석은 향교, 서원, 관아 등에 사용됐다”고 나온다. 쌍계서원을 건립할 때 금화사의 용두 4기와 장대석·주초를 옮겨 짓고, 1605년 지금의 자리로 서원을 옮기면서 같이 운반해 사용한 것으로 추측한다. 중정당 축대의 용두는 돌계단 소맷돌 등에도 사용했지만, 세호(작은 호랑이)는 묘의 망주석에 새긴 상징으로 불교 석물이 아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나무 한 그루 성하지 않을 때 옮겨 지은 목조 수월루도 예사롭지 않아서 눈길이 머문다.

유가읍 금화사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절에서 쌀을 씻으면 구천(九川)을 허옇게 덮은 쌀뜨물이 현풍읍내를 지나 낙동강까지 흘러갔다”는 쌀뜨물 전설과 “가는 스님은 봐도, 오는 스님은 못 봤다”는 중간골 전설은 ‘승려가 간 골짜기’란 뜻의 동네 이름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현풍향교

현풍향교는 도동서원과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에 건립돼 1759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 축대와 서재, 외삼문에는 통일신라 석탑의 면석과 기단, 배례석 등이 사용됐다. 연꽃무늬와 안상 등이 뚜렷한 것을 보면 이곳이 절터였거나 절에서 가져다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때 창건돼 폐사된 금화사 터와는 1km 남짓 떨어진 곳이다. 또 예전부터 ‘탑골’이라 불린 치마거랑마을 구천변에는 용화사 터가 있다. 『현풍향교 기량집』에는 “1914년 군수 이범익이 폐사 석탑을 용재로 대성전을 축대한 것이 특이하다”고 했으며, 「매일신보」(1914년 5월 20일 자)에도 현풍향교 수리 기사가 실렸다. 예나 지금이나 관공서에는 치적이 중시된다. 옛 관아 뜰에는 비석이 즐비하다. 다른 사례도 있지만, 그 비석에 새긴 주인공은 역설적으로 당시 백성을 심히 괴롭혔다는 사실에 더 놀랄 수밖에 없다.  

현풍항교를 세울 때 사찰 터의 부재를 사용했다.
연꽃 모양의 석재가 축대와 기둥을 받치고 있다. 

읍내 현풍포교당은 6.25 전쟁 때 유일하게 피해를 보지 않은 절이다. 1908년 해인사 변설호 스님이 유가사와 도성암을 왕래하며 판도방·대방 절로 중창했다. 2013년 9월, 경내에는 통일신라 말엽의 홍문사 3층 석탑 부재로 3층 쌍탑을 원형대로 복원했다. 현풍초등학교 지역의 홍문사가 폐찰되면서 일부는 현풍향교 석재로, 일부는 초등학교 뜰에 유물로 보관됐다. 또 1673년 사찰 중건의 시주 내역을 새긴 공덕비가 있다. 이 밖에도 대니산 정상부에 939년 창건한 귀비사 터에는 정월대보름 전날 불산제(拂山祭)를 지냈으나, 1980년대 이후로 지내지 않는다. 유가읍 용리에는 고려 때 다층탑만이 남은 금수암 터와 3층 석탑으로 절터를 알려주는 염불암지, 논공읍 노이리 용화사 석탑은 2011년 인근의 연화사 터에서 옮긴 것이다.

현풍포교당 

 

인흥서원

비슬산 지맥에 형성된 화원읍 본리마을에는 여말선초의 문익점 후손인 남평문씨 세거지가 있다. 통일신라 때 창건한 인흥사 절터와 함께 어우러진 인흥리 동네다. 고려 때 일연선사는 인홍사(仁弘社)에 머문 지 11년 만에 중창하고, 어필 사액으로 인흥사(仁興寺)를 받아 바꿨다. 또 포산(비슬산) 동쪽 용천사를 중수해 불일사로 개칭했다고 「보각국존비」에 새겨졌다. 1264년 포항 오어사에서 옮긴 건축자재로 중창된 인흥사 터에는 임진왜란 때 소실돼 3층 석탑만이 남았다. 쌍탑 1기는 1959년 경북대 야외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세기에 형성된 마을의 세거지를 대표하는 수봉정사는 각종 연회 장소였고, 광거당은 학문을 닦던 배움의 장소였다. 이 건물에는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 수석과 묵은 이끼, 연못 있는 집)’이란 완당 김정희 글씨의 현판을 내걸었다. ‘水石(수석)’을 ‘壽石(수석)’으로 표기한 최초의 글로, 수석 동호인들이 아끼는 유산이다. 관(館)은 추사만의 매력적인 글자로, 태(苔)는 이끼가 자라 오르는 모습을 그린 멋진 글씨이다.

비슬산 북서쪽, 낙수(낙동강)와 이수(금호강)가 만나는 이천리에는 신라 고찰 선사암에 최치원이 머물렀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머물며 벼루를 씻었다는 세연지와 ‘신선이 타는 뗏목’인 선사(仙槎)를 타던 난가대 등이 있던 선사암 터는 1639년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1550~1615)을 배향하는 이강서원이 건립된 곳이다. 이처럼 비슬산 자락에 불교 공간이던 사찰은 조선시대에 유교 공간으로 바뀌었다가 사라진 채 실상을 알 수 없게 됐다. 다만, 그 쓰임새는 영원할 것이다. 

인흥서원에 있는 추적신도비(秋適神道碑). 추계 추씨(秋溪秋氏)의 시조 추적(秋適)을 기리는 비다. 

 

사진. 유동영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다. 현재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