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일연의 자취(2) 도성암과 관기봉

도성과 관기, 비슬산의 두 성인과 그 후예들

2023-03-28     정진원
도성이 은거했던 도성암. 멀리 관기봉이 보인다. 

삼국유사』는 총 9개의 편목(篇目)이 5권으로 나뉘어 있다. 각 편의 제목은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이다. 권1에 「왕력」과 「기이 1」, 권2에 「기이 2」, 권3에 「흥법」과 「탑상」, 권4에 「의해」, 권5에 「신주」, 「감통」, 「피은」, 「효선」이 수록됐다. 「왕력」과 「기이」는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서술 방식이며, 이후 일곱 편목은 불교와 관련된 각종 일화로 구성됐다. ‘포산의 두 성인’ 관기와 도성의 신령스러운 삶에 관한 설화를 담은 ‘포산이성(包山二聖)’은 권5 「피은」편에 실려 있다. (편집자 주) 

비슬산에 일연이 37년간 살았다고 한다. 22세가 되던 1227년(고려 고종 14) 승과 장원급제 후 비슬산 보당암의 주지로 44세 때인 1249년까지 22년간 비슬산에 주석했다. 그리고 1264년(원종 5) 15년 만에 비슬산으로 돌아와 인홍사, 용천사에서 15년을 지내 비슬산 자락에서만 37년을 지냈다는 것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비상한 천재 스님이 청춘을 보낸 곳,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돌아와 고희가 되도록 그는 비슬산에서 무엇을 했을까. 100여 권이 넘는 저작의 산실은 바로 이 비슬산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집필을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한 것도 바로 이곳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정독할수록 평생을 들인 역작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비슬산에 두 성인을 비롯한 아홉 명의 성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일연’이라는 한 명의 성인을 더 보탤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제목은 왜 ‘포산이성(包山二聖, 포산의 두 성인)’인가. 마음에 물음표부터 찍고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도성이 깨달았다는 도통바위. 도성암 바로 위에 있다. 

 

포산과 소슬산, 그리고 비슬산 

‘포산이성’의 배경부터 찬찬히 살펴보자. 경북과 대구 달성에 위치한 이 포산(包山)의 이름부터 궁금증 폭발이다. 『삼국유사』에는 ‘소슬산(所瑟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의 ‘싸다[包·포]’의 의미라고 부연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삼국유사』의 지명이 아닌 ‘비슬산(琵瑟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산세로 보인다든지, 산스크리트로 ‘비슈누’ 신의 음사라고도 설명한다. ‘비슬’의 한자에 임금 왕이 4개나 있어 근현대 대구 경북에서 네 명의 왕이 나왔다는 흥미진진한 해석까지 있다. 혹자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전 대통령들을 네 명의 왕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처럼 우리 말의 수수께끼부터 ‘다빈치 코드’를 해독하듯이 아는 만큼 깜냥껏 이해할 수 있는 무수한 보물찾기 지도로 가득 차 있다. 

일연 스님이 두 차례에 걸쳐 37년을 머무른 데에는 자신의 고향이요 어머니가 살고 있던 장산(현 경산)과도 관련시킨 바 있다. 일연 스님의 일생과 『삼국유사』의 마지막 아홉 번째 「효선」편을 보면 스님의 효심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안의 편부 편모 슬하의 효자, 효녀의 다섯 이야기를 합하면 일연 스님의 평생에 걸친 사모곡이 완성된다. 만년에 국존의 자리를 사양하고 90대 노모를 모시고자 인각사로 퇴소하는 일화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경산과 비슬산의 거리가 100리 길이다. 아홉 살 첫 출가한 광주 무량사나 비구계를 받은 강원도 진전사는 어린 일연 스님에게 머나먼 길이었다. 그래서 승과에 장원한 후 보다 심정적으로 지척 거리인 비슬산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경산의 운문사 주지로 자리를 옮긴 것도, 하산소(下山所, 국왕이 국사·왕사가 만년을 편안히 보내도록 지정해주는 사찰)가 경산에서 멀지 않은 군위 인각사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각사 주변은 어머니의 고향 마을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 스님은 일생의 대부분을 그리고 특히 말년을 어머니와 멀지 않은 곳에서 수행 정진한다. 13세기 내내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백성들이 전쟁 속 도탄에 빠져 있던 상황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관기와 도성의 다빈치 코드

일연 스님의 청춘과 일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낸 비슬산에 그의 롤 모델로 보이는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여기서 『삼국유사』 스토리텔링의 몇 가지 스테레오 타입을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 권5 「피은」편의 ‘관기와 도성’의 성불 이야기에서 「탑상」편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아미타불과 미륵불이 된 이야기가 연상되고, 「감통」 편의 ‘광덕과 엄장’의 성불과 수행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삼국유사』는 모두 아홉 편목(篇目), 즉 아홉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비슷한 유형의 세 이야기는 왜 각기 「탑상」·「감통」·「피은」편에 실린 것일까.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대한 이야기다. 노힐부득은 아미타불로, 달달박박은 미륵부처로 형상화됐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러나 불교에 감응하여 통한다는 「감통」편이나 속세에서 초탈하여 수행자의 삶을 사는 「피은」편의 두 이야기는 어디에 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혹시 일연 스님은 비슬산의 성인에게 더 자신을 빗대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먼저 포산의 두 주인공 관기와 도성에 대해 살펴보자. 관기와 도성은 포산의 남쪽과 북쪽에 각자 수행처를 두고 십리허에 살며 구름을 헤치고 달밤에 휘파람 불며 신선처럼 오갔다고 한다. 서로를 만나고 싶으면 나무들이 상대 쪽으로 굽혀 손짓하여 기별을 알렸다고 한다. 이러한 도반이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흡족할까. 이렇게 수행의 경지가 해탈에 이른 어느 날 도성이 먼저 좌선하다 허공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그러자 관기도 그 뒤를 따라 속세를 떠나 진제(眞諦, 절대 불변의 진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단출하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 두 성인 중 도를 이루었다는 도성의 이름을 따서 도성암이라 부르고 절을 지었다. 지금도 도성암 뒤에는 도통바위가 남아 있다. 관기도 관기봉이라는 이름으로 우뚝하다.

 

비슬산 유가사(瑜伽寺). 도성암은 유가사 산내 암자다. 절 이름이 유가(瑜伽)라는 종파를 드러내는 드문 경우다. 일연 스님과 여러 시인의 시를 바위에 암각해 ‘일연문학공원’을 조성했다. 

비슬산의 성인들

그 이후에도 비슬산에는 많은 성인이 살았는데 그중 하나인 고려시대 성범 스님은 만일미타도량을 열었는데 두 성사의 영향으로 영험한 일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기와 도성 이후에도 반사(㮽師), 첩사(師), 자양(子陽), 도의(道義), 성범(成梵), 검을녀[今勿女·금물녀], 백우(白牛師) 등 총 아홉 분의 성인이 이 비슬산에 계셨다고 한다. 아홉 분의 성인 중에서 반사와 첩사는 관기와 도성의 후예로 보이는데 ‘피나무 스님과 떡갈나무 스님’ 정도로 부를 수 있겠다. 첩첩산중이니 옷도 필요 없어 피나무·떡갈나무 잎으로 최소한만 가리고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검을녀’라는 여성의 이름이다. 어쩌면 지금의 ‘그믐’과 통하는 이름일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의 단서가 가득하다. 예를 들면 향가인 ‘도천수대비가’를 지은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의 이름에는 눈먼 어린 딸의 눈이 뜨이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리고 열 번째는 자연스럽게 이들을 거명한 ‘일연 스님’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이 비슬산,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인 곳이 아닐 수 없다. 스님들도 여인도 수행하고 성불할 수 있는 곳, 달빛을 밟고 구름을 타고 서로 신선처럼 왕래하고 타잔처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자유로이 수행하는 곳…. 그야말로 소극적인 피은(避隱)이 아니라 진제와 속제(俗諦, 세속적 진리)가 둘이 아닌 곳에서 영원한 자유를 얻은 이들이 비슬산의 성인들이 아닐까 한다.

관기와 도성에 대한 찬시 두 수가 전하고 있지만, 이는 곧 최소 성인 열 분의 시이다. 그중 이 시는 일연 스님이 채록한 시다.

相過踏月弄雲泉(상과답월롱운천)
二老風流幾百年(이로풍류기백년)
滿壑烟霞餘古木(만학연하여고목)
偃昂寒影尙如迎(언앙한영상여영) 

서로 달빛 밟고 구름과 노닐며 왕래하던
두 성인의 풍류 몇백 년이 되었는가 
안개 자욱한 골짜기엔 고목만이 남아
일렁이는 찬 그림자 여전히 서로 맞이하는 듯하네.

__ 『삼국유사』 권5 제8 「피은」편 ‘포산이성(包山二聖)’ 

일연 스님은 이곳에 둥지를 틀고 때로는 관기처럼 때로는 도성처럼 비슬산 나무들을 도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피나무와 떡갈나무 잎사귀로 비바람을 가리며 달빛을 길 삼아 구름을 벗 삼아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님을 몸소 체득하였으리라. 

그러나 일연 스님이 살던 13세기 속세의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으로 굶주림과 싸움에 희생된 백성들의 아비규환 속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일연 스님도 구국의 일념으로 고려대장경을 새기고 왕의 스승으로 속세에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럴수록 그는 약초로 끼니 삼고 솔바람 속에 나무꾼이 얼기설기 부들로 자리 삼는 비슬산의 성인들의 모습을 마음에 아로새겼으리라. 그리하여 비슬산에서 관기와 도성, 검동이, 흰소, 피나무, 떡갈나무 부처들까지 진속을 아우르는 『삼국유사』를 마침내 일필휘지했을 수밖에. 

 

사진. 유동영

 

정진원
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 한국학과 교수. 홍익대에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에서 『삼국유사』 연구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