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기억해 4·3!

4·3과 제주 불교

2023-02-28     한금실
4·3의 상징인 동백꽃. 붉은 동백꽃은 땅으로 스러져간 영혼을 의미한다. 
제주 함덕 북촌리 포구와 서우봉. 지금은 아름다운 해변으로 이름났지만 4・3의 아픔이 짙게 밴 포구다. 멀리 보이는 서우봉 아래에는 넓은 동굴이 있어 4・3 당시 주민들이 숨었고,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다. 

피로 물든 외꼴절

아름다운 해안가 마을 함덕은 제주에서도 유명한, ‘인싸’들의 핫플레이스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다양한 맛집과 자유로운 영혼들의 버스킹과 패러글라이딩 등 다채로운 관광상품들이 타지의 여행객을 끊임없이 끌어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 우리 부모님들의 유년 시절쯤 되던 시기로 가보면, 멸치잡이와 같은 어업에 종사하는 것 외에는 먹고살기가 썩 좋은 곳이 아니었다. 이유는 가늘고 하얗게 흩어지는 모래의 분포가 해안에서부터 마을 위 언덕 너머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름진 토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을의 농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었다.

1930년경, 함덕 외꼴절에서 주지를 맡고 있던 신홍연 스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파, 시금치, 무, 호배추 등과 같은 다양한 품종의 씨앗을 들여와 마을에 보급했다. 스님은 직접 새로운 농사법을 교육시키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수확해 마을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스님은 주민들에게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됐고, 외꼴절 역시 초등학교 소풍 장소로 이용되는 등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그후 희망이 가득 찼던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48년 4·3사건이 일어났다. 함덕마을을 비롯해 인근 조천면 일대에서는 연일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이 자행됐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주민들은 하나둘씩 산으로 떠났고 가을 무렵부터는 대규모 입산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행렬 속에는 외꼴절 신도들도 있었다. 일부 신도들은 무장대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꼴절에서는 낮에는 군인이, 밤에는 무장대가 찾아오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신홍연 스님은 이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밤에 몰래 왔다 갈 배고픈 무장대를 위해 솥마다 밥을 가득 준비해 놓았다. 밥을 하던 중에 혹 경찰이 오는 기척이 들리면 짚으로 솥을 덮어 감추고 스님은 변소 속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위태로웠지만 그래도 사람에 대한 온정이 남아 있어 숨을 쉴 수 있었던 그때, 1948년 11월 중순 갑자기 도량이 소란스러웠다. 토벌대에 쫓겨온 무장대원들이 살려달라며 외꼴절로 피신온 것이었다. 스님은 이번도 외면하지 못하고 법당 내에 있는 좁은 공간에 이들을 숨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이닥친 토벌대가 사찰 경내를 쥐 잡듯 샅샅이 뒤졌고 결국 무장대원들은 발각되고 말았다. 

토벌대는 신홍연 스님을 외꼴절에서 200m 떨어진 밭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몇 그루의 아름드리 큰 댕유자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 스님을 묶고는 뒤따라온 마을 민보단원들에게 총을 쥐여주며 죽이라고 명령했다. 토벌대의 명령을 어긴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민보단원들도 역시 언제든 토벌대의 살육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이어 날카로운 총성이 일제히 하늘을 꿰뚫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총알이 스님의 몸을 비켜나갔다. 신홍연 스님은 삼매에 드신 듯 미동조차 없으셨다. 토벌대는 민보단원들을 더욱 거칠게 몰아세우며 재차 사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후에도 계속 총알은 스님을 비껴갔다. 민보단원들이 차마 스님을 쏘지 못하고 모두 다른 곳을 향해 총을 발포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할 대로 격분한 토벌대는 이번에는 민보단원들에게 죽창을 쥐여줬다. 찌르지 못하면 민보단원들 모두 총알받이가 될 신세였다. 결국 민보단원들은 울부짖으며 스님을 죽창으로 찔러야 했다. 이 일은 현재에도 함덕에 사는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제주 화천사에 있는 ‘4・3 위령비’. 많은 사찰이 폐허가 됐으며, 스님과 불자들의 희생 역시 적지 않았다. 

불타버린 사찰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을 제주 4·3이라 한다. 

제주 불교 역시 이 4·3사건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45년까지 기록에 등장하는 제주지역 사찰의 수는 대략 100여 곳이다. 이 중 방화로 소실되거나 파옥된 사찰은 35곳이며, 스님들의 인명피해는 16명,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찰은 50여 곳에 이른다. 또한 당시 스님이나 사찰의 분위기가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면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모습으로 있었거나, 식민지와 해방기의 불안정한 시기에 굳이 신고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던 사례 등이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당시 제주 불교계의 피해는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더 심각할 수 있다. 

근대 시기 제주 불교는 1909년 제주의병항쟁의 의병장이었던 김석윤 스님의 의병활동을 시작으로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1940년대까지 야학운동, 농촌계몽운동, 법화산림 포교운동, 제주 불교 통일운동, 전통 한국불교 회복운동, 불교혁신운동 등 다양한 불교운동을 펼치며 제주도민의 삶 속에 튼실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4·3을 거치고 난 후, 근현대 제주 불교를 대표하는 주역들이 대부분 희생되고 운동의 근거지였던 사찰들이 불태워지면서 이러한 불교운동의 맥도 자취를 감췄다. 이것은 근현대 제주 불교의 정신이 4·3에 의해 파괴되고 단절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까지 제주 불교의 분열과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 원인이 되고 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적성지역(敵性地域)으로 선포하고 이에 불복하는 자는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한다’는 포고령은 해안가에 위치한 일부 사찰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찰에 해당되는 문구였다. 하지만 해안가에 위치한 사찰이라고 피해를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관음사, 수덕사 등 산간에 위치한 사찰이나 선광사, 북촌포교소 등과 같은 해안가의 사찰이나 모두 피해를 입긴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4·3 발생 중에 불교계의 피해가 심각했던 이유는 산간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제주도민의 삶과 이해를 같이한 밀착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함덕 북촌리에 있는 ‘4・3 위령비’

 

김석윤 스님과 월정사

월정사는 독립운동가의 사찰이었다. 1909년 의병항쟁을 일으키고 관음사와 법정사 창건에 주된 역할을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인 김석윤 스님이 193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김석윤 스님은 근대 제주 불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로, 1930년대에 근대시기 최초의 제주선원을 창설했고,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에서 고문을 맡아 제주 불교계를 이끌기도 했다.  

월정사는 1948년 12월 토벌대에 의해 건물 5채가 소실됐고, 사찰 경내에 기거하던 김석윤 스님의 막내아들 김덕수 스님과 신도 홍종대와 부정용 등이 토벌대에 끌려가 현 아라중학교 부근의 ‘박성내’에서 총살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49년 2월에 남아 있던 법당마저 토벌대에 의해 재차 전소되면서 월정사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이후 1949년 7월 김석윤 스님의 속가 맏아들인 김성수 스님이 관음사 포교당에서 사망하자 시름에 겨운 나날을 보내던 김석윤 스님도 다음 달인 8월에 입적하게 된다. 스님의 두 번째 아들인 김인수 스님도 모든 뒷수습을 마친 그해 겨울 차가운 방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제주 불교사에 많은 기여를 했던 김석윤 스님의 출가 가족들은 모두 4·3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김석윤 스님.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근대 제주 불교의 부흥을 이끌었다. 후손 중 많은 이들이 출가했으며, ‘수좌 적명’이 그의 손자다.

 

관음사 부처님

마지막으로 4·3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인 관음사를 빼놓을 수 없다. 관음사의 경우는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4·3 발생 당시부터 무장대의 주요 길목이었고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4·3이 본격화되기 전인 1948년 5월 말에는 토벌대가 기도 중이던 스님을 끌어내어 마차 위에 몸을 묶고 물고문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4·3이 유혈사태로 치닫는 1948년 11월부터는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실시됐고 이후 1949년 1월 4일부터 실시된 대대적인 한라산 공습으로 관음사 일대는 치열한 격전지가 됐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토벌대는 1949년 2월 12일 돌연 관음사를 방화, 경내의 전각 일체를 전소시켰다. 절에 토벌대가 불을 놓는 순간 화창한 대낮인데도 갑자기 천둥 벼락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고 한다. 당시 불타던 관음사의 상황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진다.

“관음사가 불에 벌겋게 타오르자, 갑자기 하늘이 깜깜하게 어두워지고 맑았던 하늘에 대 같은 산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대웅전이 불에 타고 이곳에 안치돼 있는 300여 년 된 목불에 불이 붙자 부처가 분노했다. 목불상은 불에 타면서 분노해 몸체가 격렬하게 떨리고 눈이 벌겋게 되어 번쩍번쩍 빛을 내더니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스로 폭발했다. 하늘마저 격노해 불을 붙인 토벌대에게 천벌을 내렸다.”

관음사를 방화한 후 그 잿더미 위에 3월 중순경 제2연대 소속 제2대대가 주둔하며 주변을 요새화했다. 그리고 당시 관음사 주지였던 오이화 스님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50년 7월 10일 생을 마감하게 된다.

누가 제주 불교의 미래를 묻거나 향후 발전 방향을 논하려 한다면, 4·3으로 희생됐지만 제주도민과 함께 행동하며 다양한 개혁운동을 펼쳤던 그분들을 먼저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나 답은 역사 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관음사 경내에 있는 ‘4・3 참호’ 흔적. 관음사는 무장대와 토벌대 간 큰 전투가 벌어졌으며, 토벌대에 의해 전소됐다.

 

사진. 유동영

 

한금실
20여 년 불교사를 연구하다가 시골에 나무 집을 짓고 카페를 차렸다. 15년 동안 바리스타로 일하다가 카페지기 반려견이 죽자 일을 그만두고 현재는 독립출판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