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탐라 천 년, 제주 천 년의 불교

고려시대 탐라 불교

2023-02-28     전영준
서귀포 법화사. 고려시대 거찰이었으며,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근대 이전, 특히 고려시대 제주의 사정을 전하는 문헌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고려시대의 제주 또는 탐라국 후기의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제주에서 축적된 고고학 연구를 반영하는 학제간 융합을 적용해 살펴봐야 한다. 

 

‘탐라’에서 ‘제주’로

고려시대 탐라에 대한 기록은 925년(태조 8)의 방물(方物, 지방에서 조정에 바치는 특산물)을 바쳤다는 기록, 938년(태조 21)에 탐라국 태자 말로(末老)가 고려에 조회해 성주·왕자 작위를 내려줬다는 기록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기록만으로 ‘탐라가 고려의 지방정부로 존재했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즉 이전의 탐라는 고려에 부정기적으로 방물 헌상을 하고 개성에서 개최되는 팔관회에 참여하는 고려의 외방 번국(蕃國)으로, 주변국의 위치였다. 고려 이전의 탐라국은 해상활동을 중심으로 이웃 국가들과 교류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의 외방에서 독립국의 지위로 교역했을 것이다.

1105년에 이르러 고려는 탐라를 복속하여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제주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다. 1105년(숙종 10)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삼았다는 기록, 1153년(의종 7)에 현령관으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탐라가 명확하게 고려의 지방으로 편제(編制)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제주에서 생산되는 여러 물산에 대한 지배력 확장, 다양한 경로를 통한 물자 확보에 주력했다. 대체로 지역 수탈, 혹은 고려가 지방 통제력을 강화해 나가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탐라국 시대를 마감하고 고려의 정치 지배력 내에 편입된 제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탐라국보다 큰 나라였던 고려의 지방 통치 또는 번국에 대한 고려의 대외정책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된 시기는 1105년이지만 여전히 ‘탐라’ 지명을 사용했고, 1229년(고려 고종 16) 이후에야 ‘제주’라는 명칭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시대의 제주를 알기 위해서는 ‘고려 존속기간에 탐라국이 중첩된다’는 시기적 특성을 반영하며, ‘탐라 천 년, 제주 천 년’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탐라 불교

고려시대 제주 불교에 대한 이해는 고려가 주변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상의 특징을 반영해야 한다. 탐라국이 고려 팔관회에 참여하면서 상호 문화적 교류가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고려의 선진적 불교도 제주에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제주시 오등동에서 발굴 조사된 ‘오등동 절터’ 창건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2년 10월 5일부터 12월 1일까지의 진행된 정밀 조사에 의하면, 시기를 달리하는 건물지 3동과 기와류, 청자류, 북송(北宋)시대의 동전 등 유물이 출토됐다. 조사 과정에서 건물지의 중복이 확인돼 발굴 조사가 연장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확인된 조사(2023년 1월)에서는 건물지 5동과 고려시대 제작된 양질의 청자와 원나라 시대의 청자, 분청사기, 금동(金銅)으로 제작된 다층소탑(多層小塔)이 출토됐다. 건물지 기단부 형식으로 보아 오등동 절터의 역사 편년을 고려 전기로 특정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금동다층소탑은 고려시대 이후 사라진 목탑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금동소탑이 출토지를 알 수 없다는 것에 비해, ‘오등동 절터’의 금동다층소탑은 출토지가 분명하다는 점도 의미를 지닌다.

오등동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으로 제작된 다층소탑, 사진 제공 대한문화재연구원

오등동 절터 외에 고려시대 사암(寺庵)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수정사·법화사·원당사·묘련사·서천암·보문사·산방굴사·존자암·월계사·문수사·해륜사·만수사·강림사·소림사·관음사의 15곳 내외다. 이들 사찰 중 수정사지·법화사지·원당사지(현 불탑사) 발굴 결과, 대체로 10~12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들 사찰은 고려시대 전반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 수정사는 마을 공원으로 변했다. ‘절물마을’이라는 이름만이 이곳이 옛날 절터임을 보여준다.

수정사(水精寺) 터

수정사의 최초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조선 태종 때까지도 비보사찰(裨補寺刹)로 130여 명의 노비를 둘 정도로 제주에서는 법화사에 이어 규모가 매우 큰 사찰이었다[『태종실록』 권15, 태종 8년 2월 28일 정미(丁未)]. 

수정사지 발굴 조사는 1998년과 2000년에 이뤄졌는데, 건물지 12동, 도로와 보도, 탑지, 석등지, 담장지, 폐와무지(못 쓰는 기와 등이 모인 곳), 적석유구(積石遺構) 등이 확인됐다. 옛 수정사는 금당(金堂, 사찰의 중심 법당)을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이 건물을 중심으로 중정(中庭) 형태의 건물을 회랑식으로 배치했으며, 중정 내에 탑과 석등을 뒀다. 금당지를 축으로 보도, 문루, 종루를 배치했다. 경사진 면을 다듬어 세 개의 큰 축대로 각 건물 간의 조화를 고려한 배치로 파악한다. 출토된 유물은 북송대의 화폐와 11세기 청자류가 출토되면서 창건 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의 탐라 고찰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은 각종 명문와(銘文瓦, 글이나 그림이 새겨진 기와)와 함께 제작 시기가 이른 토기 및 시유도기(施釉陶器, 유약을 바른 도기), 자기류가 다량 출토됐다는 점이다. 특히 기와는 고려시대 특정 시기에 사용됐던 일휘문(日暉文, 도깨비 눈 모양의 형태) 막새가 포함됐다. 

130구의 노비가 있었다는 기록과 조사된 12동의 건물지 유구를 고려하면 수정사의 창건과 여러 차례의 중수에는 고려의 와장이 직접 제작했거나, 기와 제작술을 습득한 이들이 제주에서 직접 제작한 기와를 사용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사원수공업’의 확장과 관련해 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수정사 터 탑 몸돌,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수정사 터 탑 몸돌 문양 복원도, 국립제주박물관 제공

 

법화사

법화사지 또한 비보사찰의 위상으로 존재했는데, 수정사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건물지 10동, 계단시설, 보도시설, 폐와무지, 담장, 추정 연지(蓮池)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구가 확인됐다. 출토 유물로는 명문와를 비롯한 각종 기와, 청자를 비롯한 각종 도자기, 도기, 청동 등잔, 화폐 등이 다량 출토됐다. 

법화사지는 네 차례에 걸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차 시기의 유물 중 ‘至元六年己巳始重刱十六年己卯畢(지원육년기사시중창십육년기묘필)’이 기록된 기와가 발굴됐다. ‘1269년 중창을 시작해 1279년에 마쳤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 이전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중창 시기인 1269년, 즉 13세기 중반 이전의 개원통보(開元通寶), ‘法華經前燈盞此樣四施主朱景(법화경전등잔차양사시주주경)’이 기록된 청동 등잔, 청자 양각 연판문 대접, 고급 도기 등 중요 유물이 확인됐다. 개원통보의 뒷면 상단에는 초승달 모양이 새겨졌는데, 이 양식의 사용 시기는 무종(武宗) 회창년간(會昌年間, 841~846)이다. 출토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일부 도기 중에는 10세기 이전의 제작 수법을 가진 것들도 있다. 청동 등잔 또한 남송(南宋) 때의 등잔과 유사해 10~11세기 유물로 판단하고 있다. 또한 폐와무지에서 발견된 청자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녹청자 계열로, 11세기경을 중심 연대로 하는 것이어서 12세기 이전에 법화사가 운용됐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至元六年己巳始重刱十六年己卯畢(지원육년기사시중창십육년기묘필)’ 글자가 새겨진 기와편. 지원 6년(1269)에 중창을 시작하여 지원 16년(1279)에 중창을 마쳤다는 내용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봉황무늬 수막새,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용 구름무늬 암막새,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이처럼 법화사의 유물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고, ‘지원(至元)’이라는 글자가 기록된 기와는 법화사의 창건과 제주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기와의 사용을 알려준다. 상당히 고급 기물이 사용됐다는 점에서, 이미 사찰의 창건부터 사용됐을 기와 제작이 수준 높은 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함께 발굴된 용과 봉황문이 장식된 원나라식[元式] 기와 배면에 포목흔(布木痕, 기와에 남은 면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나라 와장에 의해 제작된 막새기와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막새기와를 사용한 건축물은 원나라 목수와 기술자들이 제주에 이주해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법화사에는 원세(元世)를 비롯한 원의 기술자에 의해 조성된, 원나라 황제의 피난 궁전이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의 기술자가 투입돼 제작된 원나라식 기와, 원나라 상도(上都) 궁성에서 확인되는 주초석, 용과 봉황문 막새의 사용은 원나라 황실 건축 기술이 그대로 적용된 건물이라는 것과 원 순제의 피난궁이 법화사 경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추정케 한다. 

 

불탑사 5층 석탑(보물). 원당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원당사 절터에 불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원당사지(현 불탑사)와 보문사지

원당사지도 10세기 중반경에 제작된 청자를 비롯해, 주로 11~12세기에 제작된 청자발과 청자 대접을 근거로 창건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원당사지에서 발견되는 평기와는 고려 중기의 기와 제작 수법을 보이고 있다. 온전한 상태의 기와는 적으나, 복원 결과 어골문(魚骨文)과 결합된 중심 문양이 대부분 기와 중앙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묘련사지 조사에서도 출토된 명문와 및 기와를 분석해 고려 중기로 그 창건 시기를 잡고 있다. 특히 ‘동원차처관이원촌(同願此處官李員村)’과 ‘만호이(萬戶李)’ 등이 새겨진 기와는 1991년 제주목 관아지 발굴 조사에서도 출토된 일이 있으며, 1987년 제주시 외도동 수정사 절터에서도 확인됐다. 그리고 최근 조사된 ‘오등동 절터’에서도 확인된다. 창건 이후 조선시대까지 운영됐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면서도 옛 기와를 재활용했다는 기존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현재 제주 조천읍에 보문사지가 있다. 이곳은 제주의 옛 행정구역으로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을 이어주는 교통 중심지에 있었다. 고려~조선 시기 제주목을 중심으로 대정현과 정의현 간의 주요 간선로는 긴급 교통로의 기능을 수행했다. 유배인, 군사 및 물자 등의 이동 등에도 요긴하게 활용됐다. 간선로에는 관원을 비롯해 왕래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관청이나 시설이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는데, 보문사지는 그 역할의 중심에 있었다. 

제주도 보문사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인다. 이후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에도 총 22개의 사찰과 함께 기록되지만, 기능이나 역할 등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지는 않다. 

보문사지는 보문원지라고도 하며 현재 경작지와 남양홍씨 선산으로 조성돼 있는데, 상당히 많은 유물이 흩어져 있어 이른 시일 내에 발굴 조사가 요청되는 곳이다. 꾀꼬리오름 기슭에는 보문사지의 샘인 원물이 보존돼 있으며, 이곳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도자기류를 비롯해 어골문 계열의 복합문 기와가 확인된다. 최근까지 기단석과 다듬어진 초석들도 한군데 쌓여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반출됐는지 보이지 않는다. 보문사지에서도 고려시대 일휘문 암막새 조각이 수습됐다. 밝은 갈색의 일휘문 암막새 기와는 매끄럽게 제작됐다. 일휘문은 태양무늬에서 변형된 형태의 문양으로, 도깨비 눈 모양의 독특한 형태다. 일반적으로 외곽에 한 줄 혹은 두 줄의 원호를 두르고 내부에 눈동자 문양의 반구형 요철을 나타낸 형태를 하고 있다. 연화무늬와 당초무늬 같은 식물 문양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 대신 추상적 문양을 넣음으로써, 질병과 재난 등의 피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2018년 4월, 보문사지 현장 수습).

제주 서부지역의 곽지사지로 알려진 절터 인근에서도 일휘문 막새 기와 조각이 수습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도드라진 귀목만 남아 있고, 주변부는 모두 훼손돼 어떤 유형의 막새인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회청색의 단단한 막새 조각으로 제주에서 대정으로 이어지는 일주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습됐다. 

일휘문 막새의 제작이나 사용 시기 등을 고려할 때 이른 시기의 제주에서는 일휘문 막새와 같은 용도의 기와가 제작돼 널리 사용됐을 것이다. 수습 지역이 동북부의 보문사지와 서북부의 곽지사지여서 범위가 상당히 넓고, 거의 같은 시기 또는 앞선 시기의 막새를 모방한 기와들이 제작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례로 볼 때,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운영됐을 15곳의 사암에 대한 일괄 조사와 연구로 고려시대 탐라국에 전해진 선진 불교의 유형과 운영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원수공업의 전승도 함께 이뤄졌다는 점을 검토함으로써, 궁벽한 곳에 놓인 제주 불교라는 시각을 벗어날 분명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문헌 기록에만 의지해 제주 불교의 전래를 확대 재생산하기보다는, 융합적 연구방법론을 활용하여 고려시대 제주 불교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진. 유동영

 

전영준
제주대 사학과 교수로, 2017년부터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의 연구책임자다. 논문으로 「고려~조선시기 제주 동부지역의 교통로와 普門寺址」(2020), 「전근대 한국해양사의 연구경향과 성과」(2020), 「고려시대 寺院의 僧徒와 僧軍 운용」(2022) 등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