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삼재 그리고 부적] 고양 원각사 주지 정각 스님

진언은 삶의 바탕 위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2023-01-26     김남수
고양 원각사 주지  정각 스님

원각사의 보물 창고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 원각사는 근래 창건된 사찰임에도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가 지정 보물만 5점, 경기도 유형문화재도 13점이다. 모두 2,000점이 넘는다고. 

“고려대장경 재조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은 고려시대에 인출된 것이죠. 고려시대에 인출된 것이 국내에 대여섯 점 있는데 그중 하나입니다. 지금 해인사에 모셔진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자마자 인출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고려대장경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도 볼 수 있었다. 

“1461년 조성된 『능엄경 언해』는 훈민정음을 만든 후, 한문 경전을 언해로 번역한 최초의 책입니다. 『묘법연화경 언해』는 『능엄경 언해』를 조성한 후인 1463년 만들어졌죠. 책 본문에 보면 교정도장이 찍혀 있어요. 이 책으로 교정을 마치고 다시 수정 판각했다고 볼 수 있죠. 책 앞쪽에 변상도가 있는데, 변상도와 교정도장이 찍혀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Costa de Coora(한국 연안)’라는 글이 적혀 있는 한국 국명이 최초로 새겨진 서양 지도도 볼 수 있다. 독도를 ‘竹島(죽도)’로 표기했지만, ‘조선령’이라고 기명한 일본의 지도 등 여러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통폐지인(朝鮮通幣之印)과 같은 재미있는 도장도 있다. 관에서 옷감인 베 위에 도장을 찍으면 베는 ‘화폐’로 기능했다. 조선시대 화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원각사에 소장된 유물은 통일신라시대 불상부터 고려 및 조선시대, 해외의 유물까지 망라돼 있다. 정각 스님이 25년 넘는 세월 동안 모아 온 문화재다. 

원각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교 고문헌과 다라니 

 

불교 경전과 부적

정각 스님이 학문을 하는 스님으로 크게 알려진 계기가 된 책이 1996년 발간된 『천수경 연구』다. 동국대 석사논문으로 제출된 것인데, 곧바로 책으로 발간돼 천수경에 대한 이해를 한 차원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1~2년은 불교 부적을 연구 중이다. 

“불교 부적은 서역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할 때부터 함께 왔습니다. 대장경에도 여러 형태의 부적이 남아 있죠. 부적을 공부하는 부인론(符印論)은 인도의 오명(五明, 다섯 분야의 학문체계) 중 한 분과였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적은 고려시대의 불교 부적이다. 일본의 경우 9세기 초, 당나라로 넘어간 구법승들이 가져온 경전 목록에 부적과 관련된 목록이 있다. 당시 일본의 구법승들이 당나라에 오가기 위해서는 장보고 선단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 늦어도 통일신라 시기에 불교 부적이 전래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판단한다. 
정각 스님이 진행하는 부적 연구의 초점은 중국 ‘돈황 문헌’에 남아 있는 부적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남아 있는 24점의 부적 중 14개가 불교 부적이고, 7개가 도교 부적이란다. 돈황 부적을 모본으로 고려부터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 기록을 연구 중이다. 
부적은 불교 경전 내에 존재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최소 800년 이상 여러 형태로 신앙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 금기시되며 주류 학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중국에서도 황제의 칙령으로 조성된 대장경을 보면 ‘부적’을 일부러 빼기도 합니다. ‘너무 허황한 이야기가 있어서 정장(正藏)에서 뺐다’라는 기록도 있죠. 고려대장경을 보더라도 부적이 있는 경전의 바로 앞까지는 원문이 실려 있는데, 그 이후로 부적이 있는 곳은 삭제했죠. 부적이 있는 곳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거죠.”

현재 한국불교에서 부적은 금기시하는 분야이고, 학문적으로도 많이 다루지 않는다. 의외로 유럽이나 미국 쪽에서는 몇 년 전부터 관심이 높은 분야라고.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부적을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도 나왔고, 몇몇 주목할 만한 글도 발표됐다고 한다. 

고양시 식사동(食寺洞)에 10년 전 절터를 마련했다. 본래부터 큰 절이 있었을까? 고려시대 공양왕이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다라니와 진언

정각 스님은 진언(眞言)에도 관심이 많다. 불교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진언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를 염송하는 수행법이 흔히 행해지기도 한다. 진언, 즉 다라니에 묘한 효험을 기대하는 것이다. 

스님이 발간한 묵직한 책과 논문을 살피면, 밀교 혹은 불교 의례 계통이 압도적이다. 근래 김연미 교수와 「관음(觀音) 42 수주(手呪) 및 오대진언의 성립과 전개」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학문적으로 조금 의외이기도 한데, 연유를 물었다.  

“출가하고 강원을 다닐 때, 당연히 중관이나 유식사상에 관심을 가졌죠. 그런데 ‘천수경’을 주제로 학위를 받다 보니, 그런 계통의 논문 의뢰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이유라면 이유일까요?(웃음)”

출가하고 강원을 다니던 학인 시절에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 또 의례로 합송하는 ‘진언’에 관심이 많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뜻을 새겨보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꼭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산스크리트어를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의미를 알게 됐다.  
아직도 정각 스님은 습관적으로 진언을 외운다. 걸음을 내밀 때, 공양하기 위해 숟가락을 들을 때도 진언을 마음속으로 내뱉는다. 꿈에서도 진언을 외우는 경우도 많다. 불길한 꿈이 나타날 때 진언을 외우면 불길한 것이 사라지는 경우다. 
개인적인 체험도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탑승한 고속버스가 마주 오는 버스와 충돌했는데, ‘옴’이란 단어를 뱉는 순간 흰빛과 함께 솜털 구름 같은 것이 몸을 감싸는 체험이다. 어느 날은 저절로 글이 써지기도 했다. 

“진언은 진실어(眞實語)입니다. 그 진실어에는 큰 힘이 담겨 죽어가는 아이를 살린다는 이야기가 초기 경전에도 나오죠. 그러나 예를 들어 ‘옴 마니 반메 훔’이라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을 외운다고, 누구에게나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죠. 진언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바탕 위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조선시대 정수사 주지 직인과 조선통폐지인(朝鮮通幣之印). 조선시대는 품계에 따라 직인의 크기도 달랐다. 정수사 주지 직인이 관인보다 더 크다. 

 

학문하는 삶

“공부는 운명이다”라는 말이 꼭 스님에게 해당한다. 아버님은 경성제대를 입학해 일본 경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다. 외삼촌은 유명한 고형곤 박사.

“어릴 때 자다가 눈을 뜨면 아버님은 항상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계셨죠. 산다는 것은 ‘공부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죠(웃음). 책과는 상당한 인연이 있었던 듯해요. 그리고 공부라는 것은 재미있어야죠. 어려움도 있지만, 재미도 많았던 듯합니다.”

스님에게는 가톨릭 신학교를 졸업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합해 7년 다녔다.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지 않았다.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구했다고. 그때, 헤르만 헤세를 만났다. 『유리알 유희』라는 책을 읽고 ‘카스탈리엔’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찾아 절을 찾았다고. 그 이후 35년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박사학위를 받고 공부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고양에 포교당을 설립했다. 오전에는 예불하고, 오후에는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터로 이전한 지 10년이 됐다. 내년이면 중앙승가대 교수직을 정년 퇴임한다. 

“성보박물관을 건립하고자 부지도 마련했는데, 쉽지 않네요.”

스님이 아쉬움을 말하는 대목이다. 야트막한 산을 끼고 1,000평이 넘는 대지에 건물을 세울 때부터 박물관을 계획했다. 아직은 시절 인연이 
닿지 않아 터만 마련하고 있다. “글을 쓸 때도 내 의지가 있지만,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있죠. 박물관 건립도 그렇지 않을까요?” 시절 인연을 기대해 본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