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삼재 그리고 부적] 불교의 부적

업장소멸과 소원성취 위한 부적

2023-01-26     김연미

●일러두기

이 글은 일산 원각사 정각 스님과 필자가 함께 2년 동안 연구한 내용에 기초한 것입니다. 내용 중 일부는 논문으로 출간됐거나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됐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부적이라고 하면 보통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부적의 전통은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지갑이나 휴대폰 케이스 안쪽에 삼재 부적 또는 취업, 승진, 건강 등을 기원하는 작은 부적을 넣어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또한 여전히 적지 않다. 부적은 이처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사물이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담론에서는 기피 대상이기도 하다. 불안심리를 자극하는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부적의 힘에 기대어 보고 싶은 마음과 ‘부적의 효험을 믿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미신적’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공존한다. 

그런데 단순한 미신으로도 여겨지는 부적이 사실은 불교에서도 천 년 이상 전통으로 내려오던 관습이었다. 무속이 아닌 불교 관습 내부에서 고유하게 만들고 사용했던 부적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불교 부적은 한국에서만 사용됐던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고려시대부터 한국의 불교 신자들이 사용했던 부적과 동일한 종류의 부적들이 중국 서쪽 끝 돈황의 필사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 것이다. 새로운 부적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한 신년 봄을 맞이해 불교 부적 이야기를 독자들과 공유해 보고자 한다.

 

업장을 소멸해주는 부적

한 고려 여인이 지니고 다녔던,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부적으로 추정되는 부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부적으로 추정되는 이 부적은 원래 호암미술관에 소장됐던 고려시대 은제 팔찌 안에서 발견됐다가 최근에 팔찌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팔찌는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아름다운 꽃과 덩굴 문양으로 정성스럽게 장식돼 있어 이 팔찌의 주인은 상당히 신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도판 1). 팔찌 내부에 들어 있었던 이 종이에는 세 종류의 네모난 부적이 찍혀 있다(도판 2). 이를 통해 과거 우리 선조들은 팔찌 안에 부적을 넣어 몸에 지니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지갑이나 휴대폰 케이스에 부적을 넣어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도판 1. 은제 연화당초문 팔찌, 고려시대, 
직경 9.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전 호암미술관 소장)
도판 2. 은제 연화당초문 팔찌 안에서 발견된 불교 부적, 고려 13세기 초 이전, 11.3×10.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전 호암미술관 소장)

이 팔찌를 끼고 다니던 고려의 여인은 과연 어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부적을 가지고 다녔는지 문득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궁금증은 쉽게 풀 수 있다. 팔찌에서 발견된 각 부적의 하단에는 부적의 효험이 설명돼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상단의 부적은 ‘천광왕여래대보인(千光王如來大宝印)’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몸에 지니고 다니면 무량한 죄가 없어지고 미래에는 성불의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왼쪽 상단의 부적은 하늘에서 보배의 비가 내리게 하고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켜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되어 있다. 그 아래에 찍혀 있는 부적은 모든 장애를 소멸시키고 모든 사람과 부처님의 사랑을 받게 해준다고 한다. 여기서 장애란 업에 의해 생겨난 업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 팔찌의 주인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와 업장을 없애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며, 미래에는 성불까지 하기를 바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왕실의 부적 

다음으로 조선 초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며느리가 발원해 제작한 부적을 살펴보자. 이 부적은 오대산 중대에 위치한 월정사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상 내부 공간에서 발견됐다. 불상의 내부는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불경, 다라니, 불사리 및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귀한 물건들로 채워지는데, 간혹 불교 부적들도 불상의 내부에 함께 넣어졌다.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상에서 발견된 부적은 목판으로 종이에 찍은 부적이다(도판 3). 중앙에 두 분의 부처를 상징하는 두 개의 커다란 불인(佛印)이 연꽃 대좌 위에 놓여 있다. 그 오른편과 아래쪽으로는 18가지에 달하는 부적들이 나란히 배치돼 있는데, 각 부적에는 이름이 표기돼 그 효험을 알 수 있다. 

도판 3. 영가부부인 신씨 등의 시주로 제작된 부적, 조선 1456년, 월정사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상의 복장에서 출토. 사진 제공 정각 스님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상에서 발견된 18가지 부적들의 종류를 살펴보면, 지옥에서 벗어나고 불국토에 태어나게 해주는 부적, 죄를 없애주고 성불을 도와주는 부적, 만겁 동안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부적, 정토에 태어나게 해주는 부적 등 불교와 관련된 부적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벽사기복과 관련된 부적들도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열병을 피하게 하는 부적, 소망성취 부적, 귀신을 막아주는 부적, 송사에 휘말리는 것을 막아주는 부적, 삼재 부적, 안전한 출산을 위한 부적 등이다. 여러 가지 부적이 총집합된 이 부적은 우리 조상의 입장에서 누구나 걱정할 것이 없어지게 해주고 건강과 행복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상징적 종합보험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과 달리 전염병도 많고 출산 사망률도 높았던 과거에는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적이 세종대왕의 며느리가 만들었던 부적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부적의 왼편에 발원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발원문에 따르면, 이 부적은 1456년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신씨(申氏)의 시주로 만든 부적이다. 그녀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 1425~1444)의 부인이다. 발원문은 또한 이 부적이 그녀의 부탁으로 당대의 고승들이었던 신미(信眉)대사와 학열(學悅)대사가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신미대사는 세종대왕과 세조(재위 1455~1468)의 신임을 받았던 스님으로 한글을 만드는 데에도 공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당대의 고승이 부적의 제작에도 관여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예를 통해 조선시대 불교 부적의 인기는 왕실 인물들까지 관여했을 만큼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실의 며느리인 영가부부인 신씨가 왜 고승들께 특별히 부적의 제작을 부탁했던 것일까. 이 부분은 명확한 기록이 없어 추정해 볼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곧 태어날 손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부적의 발원문에는 영가부부인 신씨와 함께 그녀의 아들 영순군 이부(永順君 李溥, 1444~1470), 그리고 “아기 이씨”도 시주자로 적혀 있다. 그런데 이 부적에 들어 있는 18가지 부적 중에는 특이하게도 출산과 관련된 부적이 세 가지나 포함되어 있다(도판 4). 

도판 4. 영가부부인 신씨 부적 중에 포함된 출산 관련 부적들. 위에서부터 구산난부(救產難符), 능산인(能產印), 관음능산인(觀音能産印). 

출산의 어려움으로부터 구해준다고 하는 ‘구산난부(救產難符)’, 부적을 주서(朱書)로 써서 삼키면 아이가 바로 나오게 해준다는 ‘능산인(能產印)’ 부적도 들어 있다. 또한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부적이 하나 있는데, 그 모양을 보면 관음보살이 출산을 도와주게 한다는 ‘관음능산인(觀音能産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가부부인 신씨가 제작한 부적은 곧 태어날 영순군의 아이인 “아기 이씨”를 위해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영순군의 장남 남천군 이쟁(南川君 李崝)은 1458년생이다. 따라서 영순군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제작된 이 부적에 나오는 “아기 이씨”는 역사에 기록된 영순군의 장남보다 먼저 태어났던 아이임을 알 수 있다. 이 “아기 이씨”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태어나고 오래되지 않아 세상을 떴던 것 같다. “아기 이씨”가 일찍 세상을 떠났더라도, 그를 위해 만들었던 부적의 힘으로 극락왕생했으리라고 가족들은 위안 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정토인(淨土印) 부적

조선 초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부적들을 살펴보자. 1995년 11월 6일 경주 정씨 종친회가 경기도 파주 금릉리에서 조상들의 무덤을 이장하던 도중 한 무덤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미라를 발견하게 된다. 미라는 중종(재위 1506~1544) 연간에 국가 의식을 관장하던 통례원(通禮院)에서 정5품 벼슬인 찬의(贊儀)를 역임했던 정온(鄭溫, 1481~1538)으로 밝혀졌다. 정온의 미라는 곧바로 여러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이례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발견됐다. 때문에 정온이 입고 있던 수의와 관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수십 벌의 옷도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관에 들어 있던 옷 중에는 정온의 부인이었던 남원양씨(南原梁氏)의 비단 저고리와 치마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간혹 관 안에 추모의 의미로 가족들이 자신이 입던 옷을 함께 넣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무덤에서 발견된 남원양씨의 저고리를 살펴보자. 바로 이 저고리의 뒷면에 상당수의 불교 부적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도판 5). 윤기 있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저고리의 상단에는 우리가 방금 살펴본 영가부부인 신씨가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 형태의 부적이 반복하여 찍혀 있다. 그 아래에는 범자로 다라니를 새긴 큰 목판을 찍었는데, 그 중앙에는 극락왕생을 비는 ‘정토인(淨土印)’이 들어 있고, 그 밑에는 이 부적을 ‘지니는 사람은 다음 생에 정토에 태어난다(持人當生淨土)’라고 적혀 있다(도판 6). 남원양씨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적이 찍힌 저고리를 남편의 관에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5. 남원양씨 저고리, 조선 1538년경, 
정온의 묘에서 출토,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하단 오른쪽)도판 6. (좌) 남원양씨 저고리에 찍힌 정토인(淨土印) 부적. 
(우) 정온의 묘 관에 부착돼 있던 종이에 찍힌 같은 종류인 정토인 부적. 사진 출처 朴相國, 「파주 금릉리 慶州 鄭氏 墳墓에서 出土된 服飾에 찍힌 陀羅尼와 佛敎符籍」, 『韓國服飾』 16(1998), 사진15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정온은 왕실의 유교 의례를 담당하던 유학자였으나, 그의 부인은 그가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며 불교 부적이 잔뜩 찍힌 옷을 그의 관 안에 부장했다는 점이다. 과연 이것이 죽기 전 정온이 바랐던 바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부부 사이 일은 둘만 알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런데 이 남원양씨가 남편의 명복을 빌며 그녀의 저고리에 찍었던 ‘정토인’이 고려시대까지 기원이 올라갈 뿐만 아니라, 중국 서부 돈황에서도 발견됐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같은 종류의 부적들이 9~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돈황의 필사본에서도 발견된다. 이 돈황 부적들의 형태를 살펴보면, 오른쪽 상단에는 한자로 부처님을 뜻하는 ‘세존(世尊)’이라는 글자가 네모 칸 안에 들어 있고, 그 아래에는 나선형 소용돌이 모양이 그려져 있다. 좌측 중단에 새 발자국처럼 ‘人’ 모양이 여섯 번 그려져 있는 것도 특징이다(도판 7). 이러한 형태를 살펴보면, 남원양씨의 저고리에 찍힌 ‘정토인’과 같은 종류의 부적임을 알 수 있다.

도판 7. 돈황 문서에 들어 있는 부적, 9~10세기, 폴 펠리오 콜렉션 문서,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사진 김연미

이러한 부적들을 담고 있는 필사본들은 ‘장경동’이라고 불리는 작은 굴 안에 숨겨져 있던 돈황 문서 중 일부이다. 수만 권에 달하는 돈황 문서는 11세기경 장경동에 밀폐된 이래 그 존재가 잊혔는데, 이후 1900년경 폐허화된 돈황을 지키고 있던 도사 왕원록(王圓籙, 1849?~1931)이 장경동으로 통하는 밀폐된 문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런데 중국의 학자들이 이 돈황 문서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헝가리 출신 영국 탐험가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과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수많은 돈황 문서를 헐값에 사 자국으로 가지고 간다. 그 결과 불교 부적이 포함된 문서들 역시 현재까지도 영국의 대영도서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그렇다면 남원양씨의 저고리에 찍힌 ‘정토인’ 외에도 한국에서 사용했던 불교 부적 중에 돈황 문서에서 발견되는 부적들이 더 있을까. 현재까지 원각사 정각 스님과 필자가 찾아낸 고려시대 부적은 총 20가지 종류며, 조선시대에는 그 수량이 더 증가한다. 그중 돈황에서도 발견되는 부적들은 약 8종류에 달한다. 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불교 부적이 단순히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중국 서부에서 한반도를 아우르는 거대한 불교 부적 문화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거쳐 넓은 문화권에서 사용되었던 불교 부적의 전통은 한국 현대사회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근대를 걸쳐 현대로 넘어오면서 불교 부적과 민속신앙에서 사용하는 부적 간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일례로 우리가 살펴본 ‘정토인’은 과거부터 ‘생정토인(生淨土印)’, ‘당생정토부(當生淨土符)’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극락왕생을 위한 부적으로 사용돼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무당들도 같은 종류의 부적을 사용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오늘날 무당들은 이 부적을 극락왕생뿐 아니라 취업 및 승진을 위한 부적으로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당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부적이 현세의 삶을 극락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인데, 취업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현대 한국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적의 효용 역시 계속해서 변모해 가는 것이다.  

 

김연미
한국과 중국의 다양한 불교미술을 연구하고 있다. 요나라의 불탑에 깃든 화엄사상과 밀교의례에 대한 논문으로 2010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하이오주립대, 예일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이화여대에서 부교수로 근무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