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수행 공동체, 실상사]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

실상사 30년, 공동체 30년

2022-12-27     불광미디어
도법 스님은 선우도량 결사를 추진하면서도 ‘세상의 아픔과 함께할 방법’을 고민했고, 그때 귀농운동을 만났다.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골을 넣은 황희찬 선수의 ‘생명평화결사’ 문양이 회자됐다. 손흥민 선수와 포옹하는 장면에서 오른쪽 등에 선명하게 보였다. 

“알고 계셨나요?”

“경기 전에는 몰랐죠. 이전부터 ‘국가대표 선수 중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인지는 이번에 알았어요.”

 

결사의 출발, 선우도량 

스님은 출가 후 오랫동안 선방에 있었다.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화두를 들었다. “망상이 날뛰고, 절망한 시절”이란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짙은 안개에 덮여 있는 조계종단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이런 고민을 나누던 스님들이 함께 구성한 단체가 ‘선우도량’이다. 1990년 11월 세납 40세, 승랍 20세 전후의 조계종 비구 스님들이 참여해 설립한 선우도량은, 금기시됐던 조계종단 내부의 승풍과 교육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창립 직후 덕숭산 정혜사에서 1년 8개월여 동안 결사를 했다. 결사는 1992년 실상사로 이어졌고, 실상사는 ‘선우도량 근본도량’이 됐다. 

‘선우논강’과 매년 2차례에 걸쳐 ‘수련결사’를 열며 현대적 승가상과 조계종 승가 교육을 고민했다. 선우도량의 고민에서 나온 대안은 1994년 조계종 개혁 후 조계종단의 법과 제도로 정착됐으며, 현재에도 ‘총무원-교육원-포교원’이라는 행정의 틀과 ‘기본교육(승가대학·기본선원)-전문교육(승가대학원·학림)-재교육’이라는 틀은 변화하지 않고 운영된다. 실상사는 1995년부터 조계종 최초 전문교육 기관인 ‘실상사 화엄학림’을 세워 추진했던 계획을 현실화하기도 했다. 

 

세상과의 만남, 귀농학교

1997년 어느 날, 당시 귀농운동을 펼치던 이병철 선생을 만났다. ‘불교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문명 대안의 가르침으로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옛날 사찰의 기록에는 3,000 혹은 5,000 승도가 주석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연구자 말에 의하면 ‘승도는 스님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찰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5,000명이 바로 사부대중 공동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병철 선생에게 “우리는 돈도 없고 실력도 없다. 실상사에 땅이 있으니 활용할 수 있고, 밥은 함께 먹을 수 있다. 내용은 채워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진행된 불교 귀농학교와 실상사 귀농전문학교, 실상사 농장은 귀농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찾는 중요한 공간이 됐다. 시기적으로 IMF 외환위기를 겪을 때였다. 많은 분이 실상사 귀농학교와 농장에서 심화교육을 받았고, 산내면 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개인적으로도, 또 실상사 차원에서도 세상의 아픔을 정면으로 처음 만나게 된 때인 듯합니다.” 

 

사부대중 공동체, 마을공동체

1994년 조계종 개혁이 전개됐고 1998년, 1999년에는 조계종에 큰 위기가 있었다. 도법 스님은 ‘총무원장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앞서서는 ‘선우도량’을, 뒤로는 ‘귀농운동’에 발을 내딛던 시기였다. 종단이 혼란스럽던 시기에 몇몇 스님과 재가자가 모여 ‘사부대중 공동체’를 고민했다.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종단과 사찰, 불교계의 도농공동체 운동을 이야기했다. 그때 창립한 단체가 ‘인드라망생명공동체’다. 

“불교계에서 ‘생명운동을 하자’면서 1999년 9월 창립한 단체가 인드라망생명공동체예요.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며 의견도 나눴는데, 종단 사태가 나면서 어려워졌습니다. 실상사와 제 개인 운동으로 귀결됐는데, 아쉽죠.”

생협도 만들고, 작은학교도 운영하고, 마을과 함께하는 한생명이 세워지던 시절이다. 불교 내적으로는 ‘사부대중 공동체’, 사회적으로는 ‘마을공동체’를 꿈꾸기 시작했다. 실상사가 생명평화 도량으로 바뀌었고, 귀농으로 많은 사람이 정착한 산내마을은 “귀농의 성지”, “공동체의 실험 공간”으로 변해갔다.

 

지리산과 생명평화운동 

세상과의 또 다른 만남은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근현대사에 전쟁의 공간이었고, 좌우 대립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던 곳이다. 먼저 지리산을 고민하자고 제안한 이들은 의외로 목사님들이었다. 이신행 연세대 교수, 양재성 목사 등이 “많이 오염된 지리산을 살리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지리산의 역사가 불교의 역사인데 우리가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에 선뜻 나섰다. 이렇게 해서 1999년 만들어진 단체가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연대’. 김지하, 김성동, 이병철, 박재일, 박성준 등 지리산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연결됐다.

단체 출범 후, 실상사와 인근 지역이 수몰되는 지리산 댐 건설 정보를 입수했다. ‘낙동강이 오염됐으니 지리산에 댐을 만들어 영남권 식수를 해결하자’라는 전형적인 개발 논리였다. 수경 스님, 연관 스님, 현응 스님 등이 함께하고, 조계종과 ‘환경운동연합’ 등 종교·시민단체가 나서 1차 백지화시켰다. 

“낙동강 순례도 하고, 지리산 순례도 했죠. 연관 스님은 ‘백두대간 종주’도 했고요. 그때부터 순례가 훌륭한 대중운동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했죠.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함께한 ‘새만금 3보1배’ 순례는 사회적으로 충격을 줬죠.”

지리산 운동의 또 한 축은 ‘생명평화운동’이었다. 지리산 댐 반대운동은 ‘지리산 살리기’ 국민운동으로 전개됐고, 2001년 2월부터 5월까지 사찰, 교회, 성당, 교당 등에서는 ‘100일 기도’를 진행했다. 기도 마지막 날, 전쟁의 상처가 있는 뱀사골에 5,000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를 거행했다.

“좌・ 우가 함께한 위령제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불교가 그런 것은 잘하잖아요? 100일 기도할 때, 저는 처음부터 1,000일 기도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5년간 탁발 순례를 통해, ‘단순 소박한 삶에 대안이 있다’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생명평화 순례

1,000일 기도를 회향할 즈음, ‘생명평화결사’라는 단체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기도 회향 후, 스님은 2004년부터 5년간의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진행해, 전국을 돌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 물었다.  

“1980년대 후반, 금산사에 있을 때 고민이 좀 있었죠. ‘간화선’과 ‘보현행원’이 계속 엇박자 났죠. 그때 처음 ‘금산사 화엄학림’을 시도했는데 잘 안 됐어요. 1,000일 순례나 떠나자는 마음을 먹었는데, 못 한 거죠. 그때 생각이 이어져 순례를 떠났습니다. 대중운동 차원보다는 제 생각을 꿰맞춰야겠다는 마음이 강했죠.”

2004년 3월 1일 시작해 ‘걷는다. 얻어먹는다. 얻어 잔다. 만난다. 대화한다’를 원칙으로 세웠다. 1,000일 정도 생각했는데, 5년간 진행됐다. 

“순례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단순 소박한 삶에 대안이 있다’는 것이죠. 자연과의 상생, 양극화되는 시대에 주변과 이웃 되기,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상대와도 잘 어울리는 그런 거죠.”

무엇보다 이런 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인간 간의 신뢰가 중요함을 확인했다. 순례 중이던 어느 날, 경북 영주에서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유기농 공동체’에서 숙식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때 70대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공동체 운동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확신을 줬다.

“스님, 나는 노동력도 없고, 실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 도움받아 농사하며 먹고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이 사람들은 나를 버리거나 무시하거나 함부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이 사람들과 함께하는 한, 그렇게 추하지는 않게 삶을 마무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고마워했어요.”

 

공동체적 삶

순례 후 ‘조계종 화쟁위원회’ 활동을 했다. 사회적으로는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파업,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조계사 피신 사건 등이 있었고, 불교 내부적으로는 봉은사 문제도 있었다. 순례 후에 중앙 일을 하지 않고, 여기 실상사의 공동체에 집중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글쎄, 잘 모르겠어요. 결과를 놓고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죠. 제 삶을 보면 ‘내가 뭘 해야겠다’ 해서 성공한 적은 별로 없는 듯해요. 참선해서 도인이 되겠다는 생각, ‘화엄학림’같이 맘먹고 시작한 일은 생각만큼 안 됐죠. 하나는 성공했네요, 탁발(웃음). 반면에, ‘빈 곳을 채워주자’ 하는 것은 잘된 것 같아요. ‘뜻은 좋은데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다. 그러면 나라도 하자’란 생각으로 귀농학교, 작은학교, 지리산 운동을 시작했죠. 화쟁위도 그렇게 시작했고요.”

선우도량 결사부터 시작하면 30년이 지났다. ‘30년 전의 실상사’, ‘지금의 실상사’에 대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물었다.

“공동체 운동 뜻에 공감했던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이 운동이 정착됐어요. 이 사람들이 만들고, 나는 ‘도울 것은 돕겠다’는 마음이죠. 30년 전하고 비교하면 아주 다른 절이 된 것은 분명하죠. 이전에는 바깥 정보를 배우고 꿰맞추고 했는데, 이제는 우리의 논리가 만들어지고 우리 실력이 늘어났어요. 사부대중 공동체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출가자가 감소하는 상황에 ‘조금 더 세게 말해도 되는 상황’이 됐죠(웃음). 이제는 바깥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배우기도 해요. 저나 실상사나 그런 게, 30년 동안 변한 것 같습니다.” 

 

대담. 류지호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