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상담실] 마음의 거울(面鏡)
열린 상담실
이번 겨울은 예년에 비해 몹시 춥고 눈이 많이 왔다. 마침 절에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였는데, 첫날부터 눈이 많이 내렸다. 이른 아침에 함박 쌓인 눈을 치우고 꽁꽁 언 손 으로 타 마시는 쑥차 한 잔의 향내가 온몸과 마음을 밑둥부터 따뜻하게 녹여준다.
과연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 다. 동안거(冬安居) 일주일 동안 아침은 굶고 점심과 저녁공양 또한 죽비소리에 맞추느라고 몇 숟가락 먹지 못했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배가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노라니 부끄럽게도 삼매(三昧)에 빠지기 보다는 오히려 지 나간 날들의 상념(想念)이 순간순간 머리 속을 헤집고 지나간다. 문득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 라니, 지나간 일들이 마치 찻잔 속의 설탕처럼 현재의 삶 속에 녹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는 흠칫 놀라게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과거의 느낌과 현재의 그것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마치 천하를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을 주었던 일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회한(悔恨)의 그림자 가 되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하면, 괴로워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던 아픔이 지금에 와서는 즐겁고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 초는 정말 암울한 시절이었다. 특히 그 시대의 가장 전면(前面)에 서야 했던 대학생에게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으니 '80년 5월에는 드디어 광주사태가 일어 났고 전국의 대학은 기약없는 무기한의 휴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2년간의 휴 학 끝에 어렵게 복학을 해서 의과대학의 본과 일학년이 된 상태였다.
휴업조치가 내리던 날 부산의 광복동 거리에서 적십자가 그려진 헌혈차에 난생 처음으로 헌 혈을 하고, 짐을 꾸려서 통도사의 백련암(白蓮庵)으로 들어갔다. 짐이라고 해보았자 담요 한 자락뿐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책에 대한 욕심만은 버릴 수가 없어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털어서 수십 권의 책을 사들고 갔었다.
흔히 백련암 하면 성철 스님이 계셨던 해인사의 백련암을 떠올리겠지만 통도사에도 같은 이 름의 백련암이 있다. 통도사 입구에서 옆길을 따라서 한 4Km를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 데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당시 경봉(鏡峰) 스님이 주석하시던 극락암이 있고, 곧바로 4Km를 더 올라가면 거의 산 끝자락에 백련암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절의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절 바로 옆에 고시생을 위한 숙박시설을 둔 곳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허름한 방 한 칸을 얻어서 기거를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속세 (?)에 두고온 친구들 생각에 무척 힘이 들었지만, 차츰 산 속의 새소리, 바람소리, 물 흐르는 소리에 익숙해지니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극락암에 경봉 스님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만나 뵈어야 되겠다는 생 각을 불현 듯 하게 되었다. 그래서 초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길을 물어서 극락암을 찾아갔 던 것이다.
그 당시 극락암은 하안거 중이엇던 모양이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도는 절마당을 돌 아서 뒤쪽 툇마루로 가니까. 웬 노승이 거의 운신을 못하고 혼자 누워 있었다. 눈은 휑하니 들어갔고 얼굴에는 저승꽃이 가득했는데 한눈에 경봉 스님임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경봉 스님께서는 89세의 노령에다가 기력이 쇠하셔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기척이 들리니까 고개를 돌리시더니 필자를 빤히 쳐다보셨다. 그 순간 스 님의 눈빛에서는 무엇이라고 형언 할 수 없는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당장 첫마디가 '니가 누고! 하신다. 그러면서 올라오라고 손짓을 하시는 것이아닌가. 마음을 조이면서 스님 옆으로 다가앉으니까 갑자기 "면경을 가져오너라"라고 소리를 지르셨는데 필 자는 갑자기 어리둥절 해졌다. 당시 불교에 문외한이던 필자로서는 면경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던지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던 보살이 달려왔다. 필자가 면경을 가져 오라고 한다고 하니까, 이 보살은 명정(明正)으로 잘못 알아 듣고는 스님의 마지막 시자인 명정 스님을 불러왔다. 명정 스님이 달려오니까 "아니, 명정(明正)말고 면경(面鏡)을 가져오 란 말이다!" 하시면서 역정을 내시는 것이 아닌가. 문득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스님께서는 모처럼 힘겹게 찾아간 젊은이에게 중요한 선문답을 하셨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세속적인 관심사 에 대해서 여쭈어보았더니 한마디로 잘라서 "나는 그런 것 모른다."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연히 마주친 경봉 스님과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부처님의 세계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스님이 말씀하신 면경(面鏡)은 어느덧 내 마음 속의 화두가 되었다.
마침 아침 신문을 보니까 내일부터 다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 자신의 마음속의 거울(面鏡)을 닦아서 난세(亂世)를 해결하는 지혜와 슬기를 길러야 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