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수행 공동체, 실상사] 공존과 상생 마을과 함께

인드라망 숨결, 산내마을에 스며들다

2022-12-27     송지희

독특한 시골 마을 ‘산내’

지리산 실상사가 자리한 산내마을의 첫인상은 ‘생동감’이다. 평일 오후 한적한 마을 길을 삼삼오오 누비는 아이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우선 그렇다. 주민들의 연령대도 여느 시골과는 좀 다르다. 지팡이에 의지한 머리 희끗한 어르신보다, 활기찬 모습으로 분주한 청장년이 더 많다. 요샛말로 힙한 분위기의 카페와 공방, 아기자기하게 마을을 꾸며둔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좀 독특한 시골 마을’이란 평가가 자연히 뇌리에 박힐 수밖에. 

이 독특한 마을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남원시 산내면. 나고 자란 어르신들은 편한 발음으로 ‘살래’라고도 한다. 남원 동쪽에 위치한 4개 읍면 중 하나이며, 유명한 관광지인 뱀사골을 지나 백무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지리산을 떠올릴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상징 같은 곳이다. 서울시 6분의 1 수준에 달하는 103.4km2의 너른 면적에, 주민 수는 2,000여 명, 세대로는 1,045가구에 불과하다. 시골 마을임에도 농사를 짓지 않는 비농가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서는 점도 눈길을 끈다. 면적은 넓지만 결코 크지 않은 이 산내마을, 들여다보니 특이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폐교의 아픔도 비껴갔다. 도시 집중화로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고 노인만 남은 시골에서 폐교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러나 산내마을에는 여전히 어린이집과 병설유치원이 있고, 마을 내 초등학교엔 100명 가까운 수의 재학생이 다니며 중고등학교도 번듯하게 운영 중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고 마을에서 자라는, 미래를 향해 살아 움직이는 마을이란 방증이다. 이는 “산내면장은 남원시청 가서 큰소리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내마을은 한때 귀농귀촌의 성지로도 손꼽혔다. 실상사가 지닌 너른 터전과 이를 기반으로 운영해 온 귀농학교의 영향이다. IMF외환위기로 민생고가 극에 달했던 1997~1998년 무렵, 실상사 귀농학교는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처이자 안식처의 역할을 했다. 실상사의 너른 터전이 귀농귀촌인들의 정서적 구심점이 됐으며, 귀농학교로 이어진 기수별 인연들은 정착을 돕는 매개가 됐다. 그렇게 20년 동안 산내마을로 새로운 인구가 유입됐다. 때론 떠나고, 때론 정착했다. 어찌 보면 실상사 귀농학교는 산내마을이 지금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조용한 계기가 된 셈이다. 

방과후학교

실상사가 위치한 산내마을은 나고 자란 선주민과 새롭게 유입된 후 주민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느슨한 공존의 형태로 안착했고, 유의미한 변화를 일궈냈다. 바로 ‘마을공동체’다. (사)한생명’에 해답이 있었다. 한생명은 실상사와 마을을 인드라망의 가치로 이어온 징검다리다. 산내들방과후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매주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공방을 찾는다.

방과후학교는 ‘들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장은희 선생님이 진행한다.

한생명, ‘생명살림’의 확장

그렇다고 산내마을의 현재를 단순히 귀농귀촌 인구의 유입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한때 귀농귀촌으로 주목받았던 여타 지역의 현재와는 분명히 다른 ‘무엇인가’가 산내마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산내마을은 나고 자란 선주민과 새롭게 유입된 후 주민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느슨한 공존의 형태로 안착했고, 유의미한 변화를 일궈냈다. 바로 ‘마을공동체’다. 주민과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고, 실패율이 높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이 역시 이례적인 일이다. 지리산 기슭에 터를 잡은 수많은 마을 가운데, 유독 산내마을에서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생동감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마을공동체를 살펴보려면 먼저 ‘마을절 실상사’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상사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운동의 근본도량으로, 연기법에 의거해 공존과 상생, 평화를 통한 생명살림을 지향하고 실천해 왔다. 

산내마을은 바로 인드라망 운동의 첫 번째 실현지다. 나와 너, 나아가 우주의 모든 실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인드라망 ‘생명살림’의 가치가 마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구현된 공존과 상생의 노력이 마을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아닐까.

‘사단법인 한생명’에 해답이 있었다. 한생명은 실상사와 마을을 인드라망의 가치로 이어온 징검다리다. 2001년 설립돼 산내마을 주민과 귀농자를 연결하고,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가운데 살기 좋은 마을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조화로운 삶, 생명을 살리는 농업,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를 추구하며 2002년에는 산내여성농업인센터를 설립했고, 청소년과 여성, 노인 등 지역 주민의 교육과 문화, 복지 향상에도 주력했다. 그 결과물이 스스로배움터 방과후학교, 한생명 부설 산내들어린이집, 친환경농산물유통매장 느티나무, 은퇴 어르신들의 자립을 위한 목금토공방, 주민들의 물품 기증으로 운영되는 행복한가게 나눔꽃 등이다. 한생명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마을 직거래장터인 살래장, 산내마을 족구대회, 지리산 어린이청소년 글쓰기 한마당 등 마을에 활력을 전하는 각종 행사들을 기획해 시행하기도 했다. 

정체된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고 활기를 전하기 위한 노력들은 결과적으로 마을 주민들 간 유대감을 공고히 하고 정서적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산내마을이 귀농귀촌의 성지에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선주민과 후 주민이 함께하는 마을공동체로 성장한 동력이기도 하다. 10년이 넘는 세월, 그렇게 산내마을은 서서히 변화해 왔으며,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동안 한생명이 주도해 온 다양한 주민사업들은 자연스레 감소 추세를 밟고 있다. 정기적으로 열리던 직거래장터 살래장은 지역 행사와 결합한 비정기 사업으로, 여성농업인자활센터에 터를 둔 50여 개 동아리 사업은 20여 개로, 한글 강좌를 비롯한 마을 주민 대상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대폭 축소됐다. 

한형민 한생명 대표활동가는 “초창기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추구해 온 가치들이 한생명과 여성농업인센터가 주도한 각종 주민사업들을 통해 주민들의 삶에 습합됐다”며 “이제 공동체 활동가들도 각각 수행해 온 개별사업을 넘어 보다 큰 틀에서의 인드라망생명공동체로 확장하기 위한 전환점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인드라망의 철학을 좀 더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한생명의 마을공동체 활동이 어떤 방향으로 지속돼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전환점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어린이집

산내들어린이집에는 활동가와 마을 주민 자녀들이 다닌다. 이곳 원아들은 자주 자연으로 ‘야외나들이’를 간다. 자연 속에서 신나게 뛰어놀거나 농장에서 옥수수를 따거나 고구마를 캐서 구워 먹는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생태교육이 이뤄진다. 이곳 아이들은 어린이집 선생님인 김경란 씨를 부를 때 별명 ‘곰돌이’로 부른다. 김경란 씨는 처음에는 아이들이 별명을 부르며 반말하는 게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지금은 아이들이 자신을 어른이 아닌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는 밝고 순수한 모습에 매번 감동한다고.

 

느티나무 매장, 목금토공방…실상사 농장

사실 주민사업의 감소는 표면적인 축소일 뿐, 이면을 살펴보면 인드라망 가치관의 마을 확장과 맞물려 있다. 초기 한생명 활동이 마을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한생명이 아니더라도 여러 마을 단체와 주민들의 역량으로 충분히 마을 활동이 가능할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주민 인식 개선과 참여를 목적으로 한 사업들이 감소하는 대신, 느티나무 매장, 목금토공방, 나눔꽃·살림꽃 등 인드라망 가치관을 직간접적으로 실현하는 사업들은 한층 공고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2005년 개소한 느티나무 매장은 여전히 산내마을 유일의 유기농·친환경 농산물 매장으로, 지역 주민들은 물론,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열린 매장이지만, 마을 발전 및 도농 선순환 취지에 공감해 한생명 회원으로 가입할 경우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로컬매장의 특성상 지역 내 유기농 생산물도 매장 한편에 진열해 판매하고 있다. 특히 매장 옆 ‘빵아재’에서 매주 화·목·토 오전 일찍 만든 빵은 ‘핫템’으로 인기가 높다. 산내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인증샷으로 더욱 입소문을 타, 오후에는 품절되는 경우가 많다. 서봉근 매장지기는 “인터넷으로 유기농 농산물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느티나무 매장을 꾸준히 찾는 주민들이 산내면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적지 않다”며 “로컬 농산물이더라도 친환경을 원칙으로, 직접 생산 현장을 방문해 입점 품목을 까다롭게 확인하는 등 마을과 상생하면서도 느티나무 매장의 취지에 맞는 선한 소비가 이뤄질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눔꽃·살림꽃은 2021년 살림꽃협동조합으로 성장해,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 운영을 기반으로 자원순환·업사이클링(up-cycling) 가게로 안착했다. (사)한생명 사무실 옆 공간에서 주민들이 기증한 물품을 모두 1,000원에 판매하고 있으며, 자원순환을 위한 재봉수업과 체험학습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빵아재

빵아재는 실상사 농장과 마을에서 자란 밀과 천연발효종으로 빵을 만든다. 남원을 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이 됐다. 빵아재에서 화·목·토요일에 굽는 빵은 느티나무 매장에서 판매한다. 사진은 빵아재 이영준 씨가 빵을 굽는 모습.

목금토공방은 설립 당시 노인 은퇴자들의 창작공동체를 추구하는 공동작업장으로 개소했지만, 수요 계층이 다양해지면서 전체 주민 대상으로 확장된 사례다. 나무[목·木], 쇠[금·金], 흙[토·土] 의미의 ‘목금토’공방은 자연에서 빌린 자원을 활용해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교육과 활동을 지원한다. 특히 자원 소비를 줄이기 위해 친환경, 재활용 작업장을 추구하는데, 현재 연령과 무관하게 8주간의 목공 기초교육을 받은 주민회원 50여 명이 각자 필요에 의해 자체적으로 일정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공동작업장을 활용하고 있다. 

산내들방과후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매주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공방을 찾는다. 목공 체험은 자연스레 자연친화적 삶에 공감하고 체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공된 목재가 아니라 산에서 필요한 목재를 직접 고르는 과정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각 나무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이해부터 살아 있는 나무가 물건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 효과도 뛰어나다는 평가다.

목금토공방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은 실상사와 마을공동체에 필요한 물품 제작이다. 공방지기 낙지는 “실상사 선재집 개원 당시 책상과 의자 100세트를 밤새워 만들고는, 이후에 기술적으로 부족한 점을 발견해 다시 보수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며 “힘들 때도 있지만 공방을 수행처로 삼아 공동체와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목금토공방

목금토공방. 나무[목·木], 쇠[금·金], 흙[토·土] 의미의 ‘목금토’공방은 자연에서 빌린 자원을 활용해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교육과 활동을 지원한다. 공방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실상사와 마을공동체에 필요한 물품 제작이다. 실상사 선재집 개원 당시 책상과 의자 100세트를 밤새워 만들기도 했다.

목금토공방을 운영하는 김낙희 씨는 ‘낙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오징어땅콩’ 과자를 좋아한다. 본업은 한의사로 토요일에는 실상사 보적당에서 공동체 진료를 하며 마을의 건강을 책임진다. 

실상사 귀농학교는 지금은 운영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귀농학교 운영이 민간주도에서 관주도 형태로 변화하면서다. 대신 공동체의 든든한 터전이자 맏형격인 실상사 농장이 그 정신을 여전히 지켜가고 있다. 귀농귀촌 혹은 농사를 배우고 싶은 이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 형태로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상황에 따라 마을 정착을 위한 지원도 병행하고 있다. 특히 농장은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책임지는 동시에 마을공동체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정서적 토대이기도 하다. 

3만 평 부지의 너른 논과 밭에서 매년 공동체 자급자족을 위한 쌀과 각종 농산물이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고 결실을 맺는다. 공동체와 주민들의 협력과 울력에 힘입어 연간 5~6톤가량 수확되는 쌀은 실상사 공양간을 포함한 공동체의 1년 먹을 양식이 된다. 밭에서는 감자와 고구마, 고추, 양파, 배추와 무 등 각종 채소가 주 작물로 재배된다. 오신채인 마늘만 전량 외부로 판매되고, 다른 작물들은 실상사 공양간을 비롯한 공동체의 먹을거리로 활용되며, 쌀과 함께 생협과 느티나무 매장 등에서도 판매된다. 내년부터는 더 많은 사람이 친환경 농산물을 접할 수 있도록 수확량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바로 ‘자급을 넘어 자립으로 가는 공동체’를 모토로 한 변화다. 

오창균 농장지기는 “실상사 농장은 공동체를 통틀어 생산이 가능한 유일한 곳이기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볼 계획”이라며 “수확량을 2~3배 증가시켜 마을공동체 복지 혜택을 강화하는 한편, 먹을거리를 통해 인드라망의 철학과 가치를 더 폭넓게 구현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마을’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마실 간다’가 여기서 파생됐다. 마을은 그만큼 함께 어울린다는 의미가 강하다. 후자의 의미로 보면 지금의 산내마을이 꼭 그렇다. 마을 애칭 ‘살래’는 이제 선주민 어르신들의 편한 발음을 넘어, 후 주민들이 새롭게 부여한 의미를 담은 ‘살고 싶은 마을’로 인식된다. ‘살래’에는 공존과 상생, 그리고 이웃과 함께하는 삶이 있다. 지리산에 깃든 이 독특한 마을공동체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자전거 작업장 

산내면 ‘자전거 문화 만들기’에 앞장서는 자전거 작업장. 고들빼기라는 별명을 가진 한형민 씨는 이곳을 운영하며 산내면 ‘자전거 문화 만들기’에 앞장선다. ‘자전거 문화 만들기’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자동차를 대체할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자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교통수단이 자전거임을 알리는 활동이다. 이곳에서는 자전거 수리와 대여는 물론, 컴퓨터·생활전자기기 수리 등 적정기술로 마을에서 자립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지역 청소년, 작은학교 학생들과 일년에 한두번씩 제주도나 남원시내까지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사진은 한형민 씨가 남원 시내의 한 초등학교 자전거 수리하는 모습.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