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수행 공동체, 실상사] 실상사의 역사와 문화

파격의 선문禪門, 실상사에서 열리다

2022-12-27     주수완
구산선문 최초 가람 지리산 실상사. “북산에는 도의, 남악에는 홍척”이라고 하여 실상사는 홍척 스님이 선문을 개창했다. 창건 당시의 탑과 불상, 석등이 남아 있다.

9산선문(九山禪門)의 최초 가람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개창한 사찰로 통일신라 후기에 확립된 9곳의 선종 사원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다. 처음에는 지실사(知實寺)로 불렀지만, 개창한 홍척국사를 기리기 위해 존칭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庭國師)’에서 ‘실상’을 따와 고려 초 무렵부터 실상사(實相寺)로 불렀다. ‘실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곧 붓다이므로 ‘실상’은 참선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궁극의 목표일 수도 있겠다. 특히 원효 스님께서 『법화종요』에서 “실상이란 법신(法身)의 체(體)이며 변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라 설명한 부분으로 그리스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이데아’와도 통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문(四山碑文) 중 하나인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는 “북산(北山)에는 도의(道義), 남악에는 홍척”이라고 하여 설악산 진전사의 도의와 지리산 실상사의 홍척을 신라 선종의 양대 산맥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모두 당나라로 건너가, 6조 혜능의 제자인 마조도일(馬祖道一) 문하였던 서당지장(西堂智藏) 스님에게 배웠으므로 사실은 동창인 셈이다. 홍척은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그중에서 으뜸은 수철화상(秀澈和尙, 817~893)이었고, 그 외에 제42대 왕인 흥덕대왕, 선강태자 등을 문하에 뒀다고 하니 당시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홍척은 그의 스승인 서당지장의 법을 이어가는 것은 수철에게 달려 있다고 하여 그에게 실상산문을 부탁했다. 이후 수철은 산천의 탑을 예배하러 돌아다니기도 했고, 참선뿐만 아니라 화엄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 역시 경문왕으로부터 대사로 추증받아 궁궐에 불려가기도 했는데, 그에게 경문왕이 물은 것은 선종과 교종의 같고 다름이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를 기록한 수철화상비문에 새겨진 해당 내용의 글자가 결실돼 그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앞서 참선과 화엄을 동시에 추구한 것을 보면 수철은 상당히 폭넓은 종교적 성향을 지니면서 그 둘을 겸비할 것을 조언하지 않았을까 싶다. 뒤이어 그가 선을 단계별로 나눠 설명했다거나, 다음 문장에서 『십지경』을 지었다는 이야기들을 참고해 볼 때, 참선 수행을 하되 이를 화엄적으로 풀어 해석함으로써 다소 막연하게 흐를 수 있는 선법을 체계화한 게 아닐까 한다.

홍척의 제자로서 수철화상과 더불어 이름을 날린 편운화상도 빼놓을 수 없는데, 성주 안봉사를 창건했다는 기록 외에는 행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편운화상탑이 실상사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입적할 때까지 실상사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잘 찾아보기 어렵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조 연간에 이곳이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1586년 지리산을 다녀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에서 “절은 폐허가 된 지 100년이 지나,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 있고, 철불이 석상(石床) 위에 우뚝 앉아 있었다”라고 실상사를 기록하고 있다. 실상사 스님들은 1679년(숙종 5) 무렵까지 실상사를 대신해 백장암에서 사세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철불과 석탑, 석등만 남아 있던 실상사는 1690년 침허대사(枕虛大師)의 주도로 300여 명의 스님이 중건을 시작하며 사세를 회복했으며, 1821년(순조 21년) 의암(義巖) 스님이 중창해 대가람을 형성했다. 이후 고종 연간에 절터를 빼앗기 위한 방화 사건이 일어나 1882년(고종 19)에 삼중창이 이뤄졌다.

실상사 약사전. 조선 중기에 건립했으며, 꽃살문 문양이 화려하다. 
약사전 여래좌상(보물). 철로 조성된 몇 안 되는 부처님이다. 실상사가 폐허일 때는 무성한 수풀 속에 덩그러니 있었다. 

약사전의 부처님 

실상사는 이처럼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경내에 이들 역사를 함께한 많은 성보문화재들이 전해진다. 그 가운데 절의 역사를 알리는 첫 문화재는 단연 거대한 철조여래좌상, 보광전 앞의 동·서 삼층석탑 및 석등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철조여래좌상은 실상사 창건기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홍척국사가 처음 창건했던 실상사는 지금의 백장암 자리였고, 현재의 실상사로 사세를 확장한 것은 수철화상 때였으므로, 그 무렵 석탑·석등과 함께 조성됐을 것이다. 높이가 2.66m이니 만약 이 부처님이 서 계셨다면 높이 5.3m가량의 장육상이 되는 규모다. 하지만 신체에 비해 커다란 얼굴 때문에 그보다 더 거대한 불상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이 이 철불은 경직되고 투박한, 그래서 통일신라 말기의 도식화된 양식이라 평가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철이라는 재료를 사용한 것에서부터 의도적으로 파격적인 미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선종이란 원래 언어적 사고의 틀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수행을 중시하기 때문에 기존의 인체를 재현하는 듯한 불상의 틀을 깨뜨리는 것은 곧 언어적 틀을 깨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겠다. 

마치 “마조 스님께 무엇을 배우셨습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북을 치고 나면 피리가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던 서당지장 스님이나,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물을 마시면 목마름이 해소된다”가 실상임을 강조하는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의 말씀이나 모두 뜻밖의 해답일 수 있지만, 또한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기도 해 파격의 매력이 있다. 실상사 철불은 바로 그런 미감을 담고 있다. 

원래 이 부처님은 약사불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복장 조사에서 발견된 원래 손의 수인을 통해 아미타부처님으로 조성된 것을 알게 됐다. 근래에는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조성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도상이 노사나불로 많이 조성됐으며, 또한 우리나라 선종사찰에서도 노사나불과 통하는 비로자나불을 많이 모셨던 점을 감안해, 원래는 비로자나불로 조성됐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됐다. 

미술사학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으나, 사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마치 너무 순진해서 당당한 듯한 이 부처님 앞에서는 그저 화두 하나를 받은 마음으로 이 부처님이 몸소 깨뜨린 틀을 나도 깨뜨리면 그만일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경주 중심의 세계관에서 점차 지방의 자치적인 세계관으로 발전하면서 지방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양식이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실상사 석탑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두 석탑의 상륜부가 신라 석탑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사례라는 점이다. 상륜부는 잘 남기 어려운데, 여러 번 화재를 겪은 사찰임에도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다. 더불어 이 상륜부의 세부적인 형태는 가운데 있는 석등의 상륜부와도 닮아, 두 석탑과 석등이 한 세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동·서 삼층석탑

파격을 보여주는 철불좌상과 달리 실상사의 동·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과 쌍탑 배치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실상사 석탑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두 석탑의 상륜부가 신라 석탑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사례라는 점이다. 그 유명한 불국사 석가탑도 상륜부는 실상사 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복원한 것이다. 그만큼 상륜부는 잘 남기 어려운데, 여러 번 화재를 겪은 사찰임에도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다. 더불어 이 상륜부의 세부적인 형태는 가운데 있는 석등의 상륜부와도 닮아, 두 석탑과 석등이 한 세트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단에는 마치 둥글납작한 병처럼 생긴 ‘복발’이라고 하는 부재를 두고, 꼭대기 부분에는 모퉁이마다 꽃장식이 달린 팔각형의 화려한 지붕 형태를 한 보개(寶蓋)를 얹은 모습이 서로 같다. 맨 꼭대기에는 석탑과 석등 모두 보주(寶珠)를 뒀다. 알처럼 둥근 핵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어서, 그 핵이 불꽃에 에워 쌓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그저 돌로 보이지만, 과거에는 이런 모습을 통해 탑과 석등 꼭대기에 불꽃이 빛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홍척국사의 사리탑인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스승과 제자의 사리탑

창건기에 이어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사리탑은 실상사의 번성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문화재들이다. 홍척국사의 사리탑은 <증각대사응료탑>이라 불린다. 형태적으로 보면 평면이 팔각형으로 이뤄진 부재들이 반복적으로 쌓였고, 하단부보다 상단부가 더 커서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수미산의 모습이 거꾸로 놓은 원뿔형, 혹은 깔때기처럼 위가 아래보다 넓고 큰 모습이어서 <증각대사응료탑> 역시 수미산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측한다. 

실제 아무런 문양이 없는 네모난 지대석은 공기(혹은 바람), 그 위의 2단의 팔각받침에 있는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바다, 그 위의 팔각대좌는 단단한 대지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금륜, 그리고 다시 그 위의 중대석에 새겨진 비천들은 천상의 세계인 육욕천을 상징하고, 그 위의 연꽃은 무색계의 하늘, 그리고 탑신인 팔각원당형에는 사천왕이 새겨져 도리천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수미산이 완결된다. 이 중에서 탑신을 받치고 있는 팔각형 평면에 모퉁이마다 둥근 공처럼 생긴 기둥이 받치고 있는 부재가 유난히 크고 높게 강조된 게 눈에 띈다. 마치 탑신에 모셔진 홍척국사의 사리를 더욱 극진히 받들기 위해 이처럼 커다란 받침을 하나 더 끼워 넣은 것 같다. 이 덕분에 무게 중심이 위로 더 치우치면서 수미산과 같은 형태를 연상하게 한다.

수철화상의 사리탑인 <능가보월탑>(보물)
실상산문을 개척한 홍척국사와 제자인 수철화상의 부도탑이 함께 있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초기의 부도를 대표한다. ‘스승과 제자의 탑이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스승 홍척국사의 탑이 후대에 세워졌을 수도 있다.

그의 제자인 수철화상의 탑은 <능가보월탑>이라 불리며, 홍척국사탑에 비해 더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를 하고 있다. 하대석은 기본은 팔각형이지만 홍척국사탑처럼 팔각형이 강조되기보다는 구름과 용의 꿈틀거림으로 보다 입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 하대는 물을 상징하며, 그 위에는 낮은 중대받침이 보이는데, 각 면에 사자를 새겨 이곳이 대지임을 보여준다. 그 위 중대석에는 향로와 비천이 새겨져 육욕천을 나타낸 듯하고, 그 위의 연꽃으로 장엄한 상대받침은 무색계를, 다시 그 위 낮은 받침 위에 올려진 팔각형 탑신에 사천왕을 배치해 도리천을 표현했는데, 적정한 비례를 통해 탑이 더 안정적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스승인 홍척국사의 탑이 더 오래된 양식이고, 제자인 수철화상의 탑이 나중 양식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수철화상탑이 더 오래된 양식을 보인다. 한국에서 알려진 최초 승탑이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인데, 수철화상탑은 이 염거화상탑과 기본이 동일하다. 때문에 탑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실제로 탑의 주인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만하다. 즉 홍척국사가 먼저 입적했지만, 탑은 오히려 나중에 세웠을 가능성이다. 창건 당시 백장암 자리에 세워졌던 실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 수철화상이기 때문에 홍척국사의 사리는 처음에는 백장암에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모셨을 수도 있다. 그러다 수철화상이 지금의 실상사 자리로 옮겨온 후에 수철화상의 탑이 세워졌고, 그 뒤 어느 시점에 백장암에 모셔져 있던 홍척국사의 사리를 옮겨와 새로 조성한 승탑에 모셨을 수도 있기에 탑 주인이 바뀌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런 경우라면 승탑 양식의 선후관계와 탑 주인의 선후관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금 거리를 두고 세워진 이들 사제지간의 승탑을 보고 있으면,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수철에게 홍척 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이에 수철이 “대사님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했다. 여기서 “온 곳(何處來)”은 “본성(性何)”과 대구를 이룬다. 어쩌면 홍척은 단순히 출발 지점이 어디인가를 물었던 것이 아니라, 그간 걸어온 궤적을 물은 것 같다. 진정 그가 누구인가는 그의 몸이나 태어난 신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걸어온 궤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까. 수철은 그것이 곧 ‘그대는 누구인가’의 질문임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스승이 될 홍척국사의 본성이 무엇인지 물었으리라. 두 탑을 바라보니, 마치 아직도 그 선문답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사찰 바깥 인근의 부도밭에는 역시 홍척국사의 제자였던 편운화상의 승탑과 함께 몇 기의 승탑이 조성됐다. 편운화상탑은 사리탑이면서 마치 향로처럼 생긴 독특한 형태를 띠는 데다 후백제의 연호인 ‘정개(正開) 10년’이라는 글자가 탑신에 새겨져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편운화상 부도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후백제 견훤의 연호인 ‘정개(正開) 10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910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백장암 전경

백장암 삼층석탑

실상사의 암자인 백장암에도 이 시기를 전후해 걸작 석탑을 세웠다. 돌로 세웠지만 마치 나무로 조립한 듯, 누각의 부재가 섬세하게 새겨진 게 특징이며, 누각 안에서 여러 천인과 비천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조각됐다. 1층 탑신에 돌아가며 새겨진 보살과 사천왕은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조형성이다. 돌로 만들었으면서도 누각처럼 그 속이 빈 것처럼 보인다. 조각가가 다양한 존상이나 목조 부재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비어 있는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그런 섬세한 조각을 덧붙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백장암 선원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돌로 세웠지만 마치 나무로 조립한 듯, 누각의 부재가 섬세하게 새겨졌다. 누각 안에서 여러 천인과 비천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조각됐다. 탑 앞에는 부도가 나란히 있다. 

 

거대 목탑이 있던 자리

실상사에 관한 고려시대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남아 있는 시각자료로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 더욱 큰 가람으로 성장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 목탑지를 들 수 있다. 비록 목탑은 현재 사라지고 그 터만 발굴됐지만, 7×7칸 한 변의 길이가 23m인 규모로 보면 신라 최대의 거찰 경주 황룡사의 9층 목탑보다도 오히려 1m씩 더 큰 목탑이었다. 이처럼 왕경(王京) 경주의 거탑보다 더 큰 목탑이 실상사에 있었다니, 목탑만 그렇게 컸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실상사 담장의 동쪽 바로 바깥에서 거대한 정원 유적이 발견됐는데, 특히 둥근 돌로 촘촘히 바닥을 깔아 만든 연못 터가 압권이다. 아마도 이 연못에 거대한 목탑이 비치지 않았을까. 

정유재란 등 조선시대의 혼란으로 사찰이 전소된 이후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품은 실상사의 암자인 약수암에 봉안된 목각탱을 들 수 있다. 비단에 그려지는 후불탱화와 달리 목조각으로 만든 목각탱은 대부분 경상북도 지역에 모여 있다. 이 목각탱은 전라도 지역에서 발견된 드문 사례일 뿐 아니라, 경북 지역보다 등장하는 존상이 간략화된 것이 특징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간략화된 것이 어찌 특징일까?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약수암 목각탱의 규모가 그만큼 작았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작은 화면에도 불구하고 굳이 입체적인 목각탱을 만들려고 했던 그 특이한 시도가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온다. 현재 약수암 보광전에 걸려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걸려 있다. 하지만 비록 원본은 아닐지라도 약수암의 고즈넉한 분위기만으로도 들러볼 가치가 있는 암자다. 

실상사 약수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실상사 부속 암자로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이 있다. 약수암은 실상사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으며, 나무로 조성한 ‘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이 있다.

 

현재 진행형인 실상사의 파격

실상사의 불교문화재는 조선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수철화상탑을 지나면 극락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 봉안된 본존불은 조선 전기에 조성된 건칠아미타불좌상이다. 이 상은 현재 보광전에 협시보살로 봉안된 건칠관세음보살상 및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건칠대세지보살상과 함께 아미타삼존불을 구성하나 지금은 이처럼 흩어져 봉안됐다. 현존하는 건칠불상들은 대부분 불상이나 보살상이 따로따로 전해지고 있는데 반해, 이처럼 삼존이 전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사례다. 그런데 이 아미타불의 뒤에는 김기라 작가의 작품인 독특한 LED 광배가 달려있다. 파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광배가 원래 빛을 표현한 것이니, 현대에 빛을 낼 수 있는 LED가 광배에 사용된 것은 매우 자연스럽기도 하다. 

약사전 철불 여래상 뒤편에 조성된 이호신 화백의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 그림. 실상사 공동체가 꿈꾸는 세계를 담아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본 철조여래좌상 뒤에는 일반적인 후불탱화가 아니라 실상사가 자리 잡은 지리산의 풍광과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명과 이야기를 꼼꼼히 그려 넣은 파노라마 산수화가 펼쳐져 있다. 지리산 화가로 불리는 이호신 화백의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이다. 기존에 불상 뒤에 걸리는 후불탱화가 부처님의 설법하는 모습을 그렸다면, 이 그림은 마치 부처님이 설법을 통해 설명하고 계신 세계를 담아낸 것 같다. 그야말로 ‘실상’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다른 절에서는 파격일지 모르지만, 실상사에서는 아니다. 철조여래좌상의 파격미에서 시작해 백장암 탑의 역발상적인 공간의 표현, 수미산을 건축으로 만든 두 스님의 승탑, 약수암의 작지만 입체로 만든 목각탱에 이르기까지 실상사에서는 파격이 일상이었음을 보여준다. 파격이야말로 실상사에서는 가장 전통적인 것이다. 

 

사진. 유동영

 

주수완
불교미술사학자이자 우석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인도와 실크로드에서 중국과 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미술 도상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불꽃 튀는 미술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