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실지견(如實知見) _ 귀스타브 쿠르베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2023-01-24     보일 스님
‘19세기 회화의 혁명’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세존께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舎衛城)에 들어가셔서 성안에서 걸식하고자 차례로 탁발하고 본래 계신 곳으로 돌아오셨다. 공양을 드신 후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시었다.” 대승경전 『금강경』 도입부에서 법회가 이뤄지게 된 인연을 설하는 내용 중 일부다. 
이 대목을 잘 음미해보면 대승불교의 태동 이후 신격화된 붓다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붓다의 인간적인 모습이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탁월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갈지라도,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 탁발해야 생명과 수행을 이어갈 수 있다. 공동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탁발하러 갔지만 아무런 공양도 받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것이 이 땅에서 삶을 살아내는 생명들의 진실이다. 

특히 “발을 씻고”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깨달은 성자라고 해서 구름을 타고 다니거나 허공중에 떠다니는 존재는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뭇 삶의 모습이 다 그런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은 붓다의 일상을 생생히 묘사하면서 그 성스러움에 관한 종교적 판타지마저 여지없이 깨버린다.   

 

19세기 회화의 혁명’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

서양화 전통에서 바라보면 불교는 일종의 ‘사실주의(Realism)’다. 욕망 속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기는 뒤바뀐 견해를 붓다는 통렬히 고발한다.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쾌락을 준다 해도 결국은 고통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붓다가 깨달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가 잘 말해준다. 어린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를 감행하게 된 동기도, 깨달음의 내용도 모두 뭇 생명의 고통을 응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붓다의 시선에는 세상에 대한 과장된 미화도 진실을 비껴가는 왜곡도 없다. 여실지견(如實知見),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냉철하고 날카롭게 꿰뚫어 본다. 깨달았다고 해서 천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깨달은 자나 구원자 혹은 신격화된 인간이 아닌 바로 이 세상의 뭇 삶들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죽음 이후의 내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의 생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현생과 내생의 복을 간구하는 게 아닌, 현생에서 지혜와 자비를 구현할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다. 꿈속도 환상도 아닌 깨어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표현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그 질문에 해답을 해주는 화가가 바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다.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현실을 본 대로 그린다.”
_귀스타브 쿠르베

귀스타브 쿠르베는 프랑스 오르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지주이면서 부농이었던지라 나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 속에서 예술적 감흥을 키워가던 쿠르베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 파리로 가지만, 이내 전업 화가로 방향을 튼다. 애초에 법학을 공부하러 간다는 것은 구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쿠르베는 파리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화풍을 보고 익히며 독학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간다. 쿠르베는 파리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1847년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화풍이 살아 있는 네덜란드로 가서 다시 다양한 화풍을 접한다. 현대 미술사의 다양한 사조의 수렴과 확장이 그의 그림에서 펼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주의가 쿠르베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그는 이전의 밀레, 벨라스케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준다. 

19세기 회화의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쿠르베는 주류 화풍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작품에서 분명하고 단호하게 일관된 관점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은 무수한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쓸데없이 크기만 클 뿐, 아름다움이나 예술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낙담하고 있을 쿠르베가 아니었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만국박람회장 근처 창고를 빌려 ‘리얼리즘(Realism)’이라는 이름의 개인전을 열었고, 이 전시는 살롱을 중심으로 신인 작가를 등용하던 당시의 제도권 시스템을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쿠르베는 자신의 그림이 ‘예술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들이 숨기는 진실을 추구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신과 영웅들 이야기를 묘사하던 이전 시대의 화법을 추종하길 거부했다. 과장되거나 미화된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물들, 사람들에 주목하며,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노동자 계급의 고통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즉 자신의 눈에 비친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을 그대로 그려 나간다. 낭만주의나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주목했던 신이나 역사적 영웅, 귀족들은 적어도 쿠르베의 안중에는 없었다. 

 

고된 노동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돌을 깨는 사람들>

세상의 고통, 삶의 진실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
_귀스타브 쿠르베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쿠르베는 당시 주류 화풍이었던 낭만주의나 신고전주의에 맞서 현실 속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낸다. 그는 모든 판타지 혹은 진실을 왜곡하는 묘사를 거부한다. 신성하거나 화려한 것 대신 볼품없고 초라하더라도 진실을 담아내려고 시도한다. 대표적으로 <돌을 깨는 사람들>(1849), <오르낭의 장례식(매장)>(1850), <안녕하세요 쿠르베씨>(1854) 등을 들 수 있다. 쿠르베의 이런 반골 기질은 르네상스 시대의 카라바조를 연상시킬 만큼 과격해서 항상 논란과 비난의 중심에 선다. 노골적으로 여인의 음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세상의 기원>(1866)이 대표적이다. 1850년 살롱전에 출품한 <오르낭의 장례식(매장)>도 그랬다. 

누구의 장례식인지도 모를 평범하고 지루한 장례식을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놨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끈 만큼 비난도 정비례해서 받았다. 왕, 귀족, 성직자, 영웅의 장례식도 아닌데 마흔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화폭을 가득 채웠다. 심지어 사람들의 표정에는 누가 세상을 떠났는지 궁금증마저 없어 보인다. 당시 제도권 평론가들에게 장례식은 낯설고 불편한 소재였기에 전시를 거절할 이유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쿠르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오르낭의 매장은 낭만주의의 매장”이라고 그 자신이 직접 기술하고 있다. 

<오르낭의 장례식(매장)>,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은 낭만주의의 매장”이라고 말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화가의 아틀리에>(1855)에서도 그의 예술관이 잘 드러난다. 원제는 상당히 길다. <화가의 아틀리에, 나의 7년에 걸친 예술 생활을 요약하는 실재의 우화>라는 제목이다. 제목만 읽어보아도 쿠르베가 얼마나 이 작품 하나에 자신의 역량을 집약시켰는지 알 수 있다. 가로 6m, 폭 3.6m에 이르는 거대한 캔버스에 묘사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은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등장인물부터 구도, 소품에 이르기까지 쿠르베가 의도한 다양한 장치들이 치밀하고 정교하게 배치됐다. 일반적인 그림 같으면 그림의 주인공은 당연히 가운데 서 있는 누드모델이 돼야 할 것 같지만, 중앙의 그림 속에는 엉뚱하게도 고향의 풍경화가 그려져 있다. 여하튼 캔버스 중앙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아마도 쿠르베 자신)를 기준으로 왼편에는 언제든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그려 넣었고 오른편으로는 자신의 응원군이라고 할 만한 예술적 혹은 지적 인연들을 배치했다. 쿠르베는 이 섞이기 어려운 양 계층 사이에서 세상을 그리고 있다. 

오른편에는 밝은 빛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고개를 들어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고 있다. 유일하게 고개를 숙여 책을 읽고 있는 보들레르, 무정부주의자 프루동,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 반면 왼편에 등장하는 어두운 세상에는 사냥꾼과 거지 등 자신이 혐오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묘사돼 있다. 한쪽이 생명의 모습이라면 다른 한쪽은 죽음을 의미한다. 즉 쿠르베는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진실이다. 붓다가 그의 제자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설했듯이, 우리의 삶에는 생과 사가 공존한다.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거나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말이다.      

“나는 그림으로 먹고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원칙을 벗어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 또 누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돈을 쉽게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네.” 
_쿠르베의 편지 중에서

평생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고, 진실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쿠르베는 사회 체제의 변혁에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쿠르베는 1830년 혁명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었던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면서, 1848년 2월 혁명에 가담한다. 노동자와 농민 등 역사 속에서 소외된 약자의 편에서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려 나간다. 그의 또 다른 화제작 <돌을 깨는 사람들>도 이 무렵 출품된다. 다 해진 셔츠와 신발,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망치를 쥐거나 돌을 나르고 있다. 더럽고 고된 노동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쿠르베는 성에 차지 않는지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듯이 대형캔버스에 커다랗게 그려 넣었다. 이처럼 쿠르베는 세상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말한다. 삶이란 원래 비루하고 남루하지만, 그래도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