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은해사 암자길

추사의 흔적을 찾아서

2022-11-30     우봉규

 

은해사 전경. 팔공산 동쪽 자락에 있다.

 

은해사는 팔공산 동쪽 자락 영천에 위치한다. 809년(헌덕왕 1)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했다. 몇 번에 걸친 소실과 중수를 거쳐, 1546년(명종 1)에 천교화상(天敎和尙)이 지금의 터로 옮겼다. 법당을 중수한 후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銀海寺)라 했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극락보전에 대웅전 편액이 있었으나 근래에 변경했다.

은해사에는 천 년이 넘는 거조암을 비롯해 백흥암, 운부암, 백련암, 묘봉암, 중암암, 기기암, 서운암 8개의 암자가 있다. 갓바위 부처님이 계신 선본사 역시 은해사 말사다. 은해사와 백흥암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佛光(불광), 銀海寺(은해사), 大雄殿(대웅전), 寶華樓(보화루), 一爐香閣(일로향각), 十笏方丈(시홀방장) 편액과 주련(柱聯)이 있다. (편집자 주)

익으면 떨어지는 것이 어디 지금의 붉은 감뿐이랴.

그야말로 무르익은 것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절기, 집 없는 가여운 중생들도 이제 꼭 집을 찾아야만 하는 시간, 일 년 만에 은해사를 찾는다. 그러나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조실 법타 스님을 만나러 갔지만 까닭이 다르다. 그동안 게을러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팔공산과 은해사의 산내암자 운부암과 백흥암을 간다. 마치 기적처럼, 둥둥 꼭 작년의 그 날처럼 일찍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가을바람에 휘날린다. 기후변화가 있다지만 어찌하여 우리의 절기는 이토록 어김없이 눈물 나게 우리를 찾아오는가.

언제나 이맘때쯤 이곳에 오면 그 모든 것이. 
날린다.
휘날린다.
떠돈다.
비를 뿌린 잔구름이 소리 없이 북쪽으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겨울의 종착으로 가고 있는 늦은 어스름. 

마치 하릴없는 노숙객처럼 카메라 하나를 메고 운부암을 오른다. 조금은 위압적인(?) 은해사 주차장을 얼른 피해 걸음을 재촉한다. 시간이 없는 탓이다. 빨리 걷기 싫어, 너무 빨리 걷기가 싫은데도 어쩔 수가 없다. 갑자기 추워진 탓인지 사람이 없다. 간간 잿빛의 스님 몇 분만이 수목의 터널을 걷고 있다.

운부암 아래쪽의 은해사는 운부암, 백흥암, 거조암, 백련암, 서운암 등의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보석상자를, 아니 보석암자들을 운위하고 있다. 덧보태 현판 대부분이 추사의 글씨로 장엄됐으니 그 이름이, 그 향취가 안개처럼 바다를 이루고 있다.   

이 은해사에 추사의 글씨가 이렇게 많은 것은 대화재 이후 1849년 중창을 담당한 주지 혼허 지조 스님이 평소 가깝게 지내고 있던 추사에게 편액 글씨를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추사는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한강 용산 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추사는 은해사에서 화엄종지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던 영파 성규 스님과도 친분이 있었고 외고조부 되는 영조의 어제완문(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영조의 편지)이 있는 은해사 주지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추사의 흔적은 없다. 발자취가 없다. 정말 글씨만 쓴 것일까? 보이는 것은 울울 창성한 수목들이요, 들리는 것은 쉼 없는 물소리뿐이다. 그런데 문득 그의 〈세한도〉가 생각났다. 이곳의 소나무, 아니면 전나무, 그것도 아니면 잣나무, 그것에 생각이 닿았다. 그리고 그의 청년 시절. 그 시절의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을 따라서 관내의 명승지를 여행했다. 남다르게 어릴 적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기에 인근 곳곳의 사찰 순례도 겸했다. 그렇다면 당연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이다. 많은 사가들의 추정대로 추사가 영남 일원의 사찰을 탐구했다면? 의당 이곳은 빼놓을 수가 없었을 터. 특히 중국 종남산의 향적사를 그리워했던 그이고 보면, 이곳 운부암은 마음속 그의 본향쯤이 되지 않았을까?

저 바위 어디쯤에 청년 추사가 앉았거나, 아니면 저 절벽 위 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유배 인생을 한탄하며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왔거나 오지 않았거나 그것은 별개의 일, 추사의 글씨가 이렇게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어쨌든 훗날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 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서체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 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佛光(불광), 銀海寺(은해사), 山海崇深(산해숭심), 大雄殿(대웅전), 은해사 성보박물관 소장
은해사 및 암자에 걸렸던 추사 김정희 글씨 현판들이다. ‘佛光’의 불(佛)자 획이 세로로 유난히 길다. 추사 글씨 중 대표적 수작으로 꼽힌다. 
운부암 보화루. 운부암은 금강산 마하연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하는 길지로 여겨지며, 영남을 대표하는 선방이다. 불이문을 지나 만나는 보화루는 1900년 중건됐다.  

 

반드시 추사가 걸어갔을 길.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유일하게 외우는 한시 한 묶음.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山(부지향적사 수리입운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고목무인경 심산하처종)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천성열위석 일색냉청송)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박모공담곡 안선제독룡)
향적사는 어디 있나 구름 덮인 산을 헤매는데
고목 우거져 인적 끊긴 깊은 산속에 먼 종소리
바위틈에 샘물은 졸졸 햇빛 차가운 푸른 솔숲
저물녘 빈 골짜기에서 망령 걷어내는 고요한 좌선
 __ 왕유, 〈과향적사(過香積寺)〉

전날 왕유가 올랐던 종남산 향적사를, 오늘 추사의 팔공산 운부암을 그렇게 오른다. 그런데, 빼다 박은 듯이 어쩜 이리 똑같을 수가 있는가. 하기야 중국의 종남산이나 여기 우리의 팔공산이 무엇이 다르랴. 그곳의 향적사와 여기 운부암이 무엇이 다르랴. 다 같은 지구라는 작은 물방울 속의 한 마을, 한 고장임에랴. 하여 시화에 능했던 왕유와 시서에 능했던 추사가 무엇이 다르랴. 사소한 국적만 다를 뿐인 것을. 또 천 년이 훨씬 흘렀다고 하나 그게 어디 시간의 차이에 있으랴. 눈 한 번 깜빡한 연월인 것을. 이 우주에 시간은 한갓 일개 미물 우리 인간에 한정된 참으로 헛된 망상인 것을.  어디선가 종소리는 울리지 않아도 새들이 종소리를 대신한다. 하얀 포말을 이루며 거친 바윗돌에 부딪히며 흐르는 물소리도 이곳과 그곳,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땡땡 아직은 짙푸른 수목 사이로 쏟아지는 마지막 햇볕 조각 또한 정확하다. 저물녘 빈 골짜기에서 자꾸만 달라붙는 세속의 독룡을 왕유처럼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무언가를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여행이 언제쯤 끝날 것인가?
서산에도, 내 머리 위에도,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운부암은 신라 선덕여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지세가 연꽃 모양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연화지라 일컫는 명당이며 옛적에는 팔공산 주인이 이곳에서 난다고 했을 정도로 지기가 출중한 곳으로 알려졌다.

전설에 의하면 도량 옆 뜰에는 의상대사가 창건 당시 짚고 온 지팡이를 땅에 꽂으니 즉시 살아나 푸른 잎이 돋아났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지금도 그 나무가 살아 있다. 운부암은 창건 이래 근세 한국의 조사스님들의 근본 수행처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에는 남한의 2대 중심 선원으로 선산 도리사와 팔공산 운부암을 꼽았다. 

경허, 만공선사로부터 운봉, 경봉, 향곡, 한암, 팔봉, 청담, 성철 스님 등 무수한 고승대덕들의 수행처로 규모와 위용을 떨쳤던 곳이다.  

어느새 어둑어둑.
되돌아 백흥암으로 가는 길은 묘연.

할 수 없이, 고맙게도 가을 참배로 이곳 은해사 운부암을 찾은 젊은 두 보살님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기꺼운 일. 역시 죽으란 법은 없다. 사실 너무 많이 알려진 운부암이나 백흥암 소개는 진부한 일, 그래서 굳이 걸어서, 그것도 일부러 해 질 녘에 이곳을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아름다운 암자 위로 떠 있는 구름과 바람, 그리고 옛사람들을 만나고자 함이다. 그들이 보았을 저 푸른 하늘을, 저 새소리를, 저 물소리를 듣고자 함이다. 그런데 할 수 없이 백흥암까지 몇 킬로미터는 차창으로 냄새를 맡을 수밖에. 백흥암 가는 길은 운부암과 다르게 양쪽 계곡이 아니라 사방 수목의 바다였다. 군데군데 수명을 다한, 아니 홍수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아름의 잣나무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것마저 아름다움.

백흥암 극락전(보물) 및 수미단(보물). 극락전 수미단은 조각과 구성이 아름다워서 극락전보다 16년 앞서 1968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특색있는 동물들이 조각돼 있으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불단이다. 
백흥암은 신라시대에 창건됐으며, 1521년 사찰 뒤편 태봉에 인종의 태실이 조성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는 
‘태실 수호 사찰’이 됐다. 극락전은 1643년 중건된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이다.
팔공산 중턱에 위치한 백흥암 전경. 추사 김정희가 쓴 시홀방장(十笏方丈)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었다.
팔공산 능선 자락에 위치한 중암암. 바위는 절을 받치는 기단이 되기도 하며, 바위가 만든 틈은 문이 된다.

 

흔쾌히 동행한 보살님들과 이런저런.
어느새 단아한 백흥암.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때 백지사(栢旨寺)로 창건됐으나 1546년 중창되면서 이름이 백흥암으로 바뀌었다. 1521년 사찰 뒤 태봉에 인종의 태실이 조성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는 ‘태실 수호 사찰’이 됐다. 백흥암의 중심 전각인 극락전(보물)은 1643년 중건된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이다. 이 건물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돼 있는데 이 삼존상을 받치고 있는 불단인 수미단은 조각과 구성이 아름다워서 극락전보다 16년 앞서 1968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수미단이란 절의 법당 내부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봉안한 대좌를 말한다. 우리 사찰의 수미단은 많은 용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정종의 태실이 있는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보물)은 11마리의 용으로 장엄됐고, 세종대왕자 태실의 원찰인 성주 선석사 대웅전 수미단은 용으로만 장엄됐으며, 인종의 태실 수호 사찰인 백흥암 역시 용이 두드러지게 조각됐다. 

사찰의 중심 불전 수미단을 용으로 장엄하는 것은 경상도 지역 태실 수호 사찰의 일반적 특징이다. 자기 자식을 용처럼 키우고자 했던 권력자들의 욕심으로 오히려 많은 사찰이 그 어려운 억불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다.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백흥암 수미단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불단 중에서 구성과 조각 솜씨가 가장 뛰어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복잡다단한, 아니면 그렇고 그런 세속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보름이 코앞,
형형한 전등달빛으로 환한 산문의 초저녁.

가는 길에도, 되돌아오는 길에도 당연 추사는 없다. 그러나 곳곳 글씨로 남은 그의 자취는 산재했다. 흩뿌려져 있었다. 운부암 뭉게구름의 향방, 백흥암 잣나무의 추억, 그리고 두 암자 갈림길 노송의 위엄, 또 그리고 〈세한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홀로 걸어서 걸어서 드디어 닿은 아랫녘 가을 은해사. 그 낮은 물빛 표표함에 무릎을 쳤다. 가슴을 쳤다. 기실 은해사는 안개의 바다가 아니라, 달빛의 바다였다.

향(香).
팔공(八公), 은해사(銀海寺)!  

중암암을 오르려면 커다란 바위가 갈라져 생긴 틈으로 올라가야 한다.

 

사진. 유동영

 

우봉규
〈황금사과〉로 동양문학상 수상을 시작으로, 〈객사〉로 월간문학상을, 〈남태강곡〉으로 삼성문학상을, 〈석정시(夕汀詩)의 불교적 해명〉으로 해인상을, 〈갈매기야 훨훨 날아라〉로 계몽아동문학상을 받았다. 한국일보사의 광복 50주년 기념작에 〈눈꽃〉이 당선됐다. 불교와 신화가 결합된 민족 설화와 분단에 관한 순수 작품에 주력해 왔으며, 저서로는 『산문, 그 아름다운 이야기』, 『경허와 그 제자들』, 『졸참나무처럼』, 『백산의 연인』 등의 작품이 있다.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