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파계사 주지 허주 스님

"계곡물이넘치듯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2022-11-30     불광미디어
파계사 주지 허주 스님

허주 스님은 파계사와 1973년 인연을 맺어, 성우 스님(현 불교TV 회장)을 은사로 다음 해 출가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50년이다. 스님 출가에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스님이 살던 경기도 안양의 한 마을에서 2~3년 사이로 어린 학생 7명이 파계사로 출가했다. 대다수가 청소년티를 벗어나지 않은 나이였다.

“한 가족도 30년 살면 서로 흩어지는데, 50년을 한 문중으로 살았어요. 한 마을 7명이 파계사로 출가해, 한 분 입멸(入滅)하고 나머지 6명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고 있죠.” 

얼마 전 대구 ‘앞산’에 있는 은적사에서 주지 소임을 마치고 이생에 ‘주지 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출가한 지 50년 다 돼서 파계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됐다고. “소임을 살아야만 하는 시절 인연이었다” 한다.

파계사는 고송(古松) 스님이라는 큰 숲 아래에서 ‘화합’을 이루며 살고 있다. 조실 도원 스님(원로회의 의장 역임), 회주 성우 스님(현 원로회의 수석부의장)을 필두로 100여 명의 문중 스님이 있다.
“어른 스님들이 예전부터 이것저것 말씀하셨는데, 저는 조금 멋대로 살았죠. 법랍이 되니,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기 힘듭디다. 허허”하며 사연을 은연중 내비친다. 

 

4명의 임금

파계사는 조선시대 영조 임금과 관련이 깊다. 숙종이 영원(靈源) 스님에게 기도를 당부해 잉태한 임금이 영조다. 어느 날 숙종의 꿈에 스님이 대궐로 들어오더니 이내 보이지 않더니, 3일 뒤에는 상서로운 빛이 궐을 비췄다. 빛을 좇아 보니 영원 스님이 있었다. 세자를 보지 못하고 있던 숙종은 기도를 부탁했고, 얼마 후 왕후가 임신했다.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영조 임금이다. 숙종은 영원 스님에게 ‘현응(玄應)’이라는 호를 내렸다. 원통전과 관음보살, 하마비, 영조 나무 등 유물과 설화가 남아 있다. 절집에 왕의 위패를 모시는 곳은 흔치 않다. 파계사 기영각(祈永閣)이 그 공간이다.

“조실 스님께 여쭈니,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영각 안에 선조, 숙종, 영조 임금의 위패와 가마가 있었다고 해요. 2020년부터 해체 보수공사를 했는데, 단청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어요. 왕실 단청이죠. 그것만으로도 왕실과 파계사 인연을 알 수 있죠. 개산조 스님하고 세 분의 임금 위패를 다시 모셨습니다.”

원통전에 모셔진 관음보살 복장 유물로 영조 임금의 어의(御衣)와 발원문, 또 세종 임금의 중수문이 나왔다. 그렇기에 관음보살님을 모신 것은 조선 초기까지 올라간다. 이렇게 관음보살상에는 세종, 숙종, 영조 임금 3명의 자취가 있다. 그렇다면 선조의 위패는 기영각에 왜 모셨을까?

“원통전은 임진왜란 직후, 선조 임금 시절에 계관(戒寬) 스님이 중수하셨죠.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 주춧돌에 화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전쟁 직후임에도 원통전 복원을 지시한 거죠. 왕실에서 명했기에, 불에 탄 주춧돌을 교체할 시간도 없이 급히 건물을 올린 거죠.” 

허주 스님은 파계사와 왕실 관계를 살펴보고자 조선왕조실록을 살폈으나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억불 시대에 왕실과 사찰 간의 사사로운 관계를 실록에 싣지 않았겠죠?” 

파계사는 특이하게 관음보살님이 모셔진 원통전이 주전각이다. 

 

성전암과 영산율원

파계사 차를 타고 다른 지역을 가면, “저 차량은 파계(破戒)한 스님들이 타는 차예요?”라며 가끔 놀림을 받는다. ‘물줄기를 쥐어 잡는다’ 하여 파계(把溪)라 하고, 그 물줄기를 움직이지 말라고 진동루(鎭洞樓)까지 건축한 저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의 실없는 농담인 줄 알아듣는다고.

사실, 파계사는 현대불교의 선(禪)과 율(律)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찰이다.

“1955년경, 성철 스님이 당시 주지였던 한송 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오셔서 성전암을 법력으로 일으켜 주십사’하는 부탁을 받고 오셨다고 해요. 제자 한두 분하고 오셔서, 성전암에 철조망을 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셨죠. 여기서 10년 가까이 머무셨죠. 설과 추석, 안거 시작과 끝 날을 제외하고는 일절 사람을 들이지 않았죠.”

해인사에서 진행한 ‘백일법문’의 초고를 여기서 준비했을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지금도 성전암의 ‘현응선원(玄應禪院)’은 그 결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다. 영조 임금이 11세 때 지었다는 ‘자응전(慈應殿)’ 현판이 성전암에 남아 있다.

파계사는 한편 영산율원(靈山律院)으로 근현대 불교의 계맥을 유지했다. 본사가 아닌 파계사에 율원을 설립한 때가 1996년이다. 

성우 스님과 철우 스님이 ‘계율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계율 도량을 건립하자’라는 뜻을 함께해 세웠다. 이제는 총림에도 율원이 상설화된 곳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총림의 많은 율원장 스님들이 이곳 파계사 영산율원에서 공부했다”며 한국불교에서 파계사 영산율원의 위상을 말한다.

영조가 11세에 쓴 ‘자응전’ 현판

 

우리 시대의 불교

허주 스님은 파계사로 출가했지만, 수계를 받고 곧바로 통도사 강원으로 향했다. 파계사보다 오래 머문 절이 서울 봉은사다. 1988년부터 2002년까지 “14년 청춘을 봉은사에 바쳤다”라며 웃는다. 종단에서 교육국장 소임도 잠시 맡은 바 있다.

스님은 부인하지만, 행적을 살피면 ‘문서포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에 은사인 성우 스님의 「현대불교」에도 관여했고, 봉은사로 부임해서는 한동안 중단됐던 「봉은지」 발간 업무를 맡기도 했다. 봉은사 재무소임을 두 번 맡은 적도 있는데, ‘짧게는 1주일, 길게는 보름’이었다고. 결국 「봉은지」를 발간하면서 눌러앉았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스님은 탈종교화 시대에 불교의 가치, 특히나 영남불교에 대한 고민이 깊다.

“팔공산은 불교뿐 아니라 유학의 뿌리가 있고, ‘한티재’에는 가톨릭 순교지도 있죠. 대구 서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처가 됩니다. 하나의 산에 전통사찰이 가장 많이 등록된 곳이 팔공산입니다. 그런데 걱정이에요. 대구·경북만 하더라도 도심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힘든 절들이 많아요. 종교에 관한 관심이 줄어드는 시대고,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지식과 구원을 얻는 시대가 됐어요.”

 

허주 스님은 “파계사가 곧 성전암입니다”라고 말한다. 파계사의 역사를 간직한 성전암에는 현응선원이 있다.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자응전(慈應殿) 현판이 있었으며, 지금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2022년 동안거 결재에 들어간 선원장 벽담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과 함께.

 

“농담으로 영남불교가 전국 사찰을 먹여 살렸다 하는데, 다 옛말”이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겠지만, 스님이 생각하는 것은 ‘수행공동체로서의 사찰’이고 ‘탁마하는 불교’다.

“기존의 종교적 관행으로는 더욱 어려워질 거예요. 수행공동체로서 승가의 위계를 잡아 나가야 합니다.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승가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파계사는 보름법회 때 포살법회를 진행합니다. 2년 정도 된 듯합니다. 포살이라는 것은 참회하는 법회입니다. 마음속 때가 없고, 먼지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범망경을 합송하면서, 계목마다 해당하는 불자는 절 세 번 하면서 참회합니다. 신도분들도 좋아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이 음력으로 10월 보름, 동안거 입재 날이다. 100여 명 신도가 참여했다. ‘영산율원’이 있던 파계사의 전통을 지키며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고 있다. 보름법회에 100명, 초하루법회에 300명 가까이 참여하는데, 대구 시내의 여느 사찰에 뒤처지지 않는 편이라 한다.

“활자를 읽는 시대에서 영상을 보는 시대로 옮겨졌죠? 그런 면에서 ‘월간 불광’을 꾸준히 발간하는 걸 보면 놀랍죠. 이렇게 훌륭한 잡지가 불교계에 있나 하는 사람도 있어요. 스마트폰이 종교가 된 시대의 흐름을 간과할 수 없죠. 새로운 시도를 하며 불교를 함께 일구어 나갑시다.”  

 

대담. 류지호
정리. 김남수
사진. 유동영

 

허주 스님
1974년 성우 스님을 은사로 파계사에서 출가했다. 1978년 통도사 승가대학,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1988년부터 2002년까지 봉은사에서 소임을 살았다. 조계종 교육원 교육국장, 대구 은적사 주지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