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한거都心閑居] You’ll never walk alone

2022-11-30     석두 스님

10여 년 전, 영국에 있는 조계종 사찰인 연화사에서 잠시 주지로 있었다. 그래서 영국인들의 축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경험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작은 동네에 속한 그곳에서도 9부 리그 소속의 선수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응원하고, 사람들이 마치 소풍 나온 이웃인 양 즐겁게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파란 잔디에서 평범해 보이는 선수들이 뛰고, 소박해 보이는 이웃들이 응원하는 그런 모습이 영국인들에게는 일상의 삶인 것 같았다.

축구는 그들에게 삶의 활력소 같아 보였고, 동질성과 통합의 장이 되었다. 그 많은 동네 펍(Public House)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며, 대형 스크린으로 축구를 함께 즐기는 그들에게서 그 순간만은 삶의 노곤함과 피로감을 풀 수 있는 통로인 듯했다. 때론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극성팬(홀리건)이 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축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국의 프리미어리그(EPL)는 세계 최고의 리그가 될 수 있었다.

“당신은 결코 혼자 외로이 걸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클럽 리버풀FC 응원가이다. 이 응원가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이태원 참사’로 온 나라가 애도와 슬픔에 잠긴 시기에 응원가 얘기를 하는 것은 두 사연이 너무도 닮은 측면이 많아서다.

1989년 4월 15일. 이날은 영국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영국 잉글랜드 셰필드에 위치한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하지만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할 그곳에서 불행하게도 94명의 관람객이 현장에서 압사했다. 이후 후유증으로 3명이 더 세상을 떠나 모두 97명이 유명을 달리했으며, 766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영국에서는 이 사건을 ‘힐스버러 참사’라고 부른다.

불행한 일은 예고가 없다. 언제든 우리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올 수 있다. 하지만 사고(incident)와 참사(disaster)는 대처하는 마음의 방식이 달라야 한다. 사고는 불시에 발생하는 특이하거나 불쾌한 일이기에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참사는 그 대처법이 사고와는 달라야 한다.

참사는 투명하게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화반탁출(和盤托出, 있는 대로 다 털어놓음)과 발로참회(發露懺悔, 자기의 죄와 허물을 여러 사람에게 고백하여 참회함)해야 하며,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발생한 불행한 일을 바라보는 정확한 시각이 그래서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이런 시각을 갖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초 토대는 고행(苦行)도 아니며, 장좌불와(長坐不臥)도 아니다. 올바른 인식(認識)이다. 

‘바로 본다는 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덕목은 자신의 욕망이 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개인적, 집단적 욕망은 본질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욕망은 본인이 그 욕망에 대한 대가를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집단적 욕망은 사회적 시스템을 변질시키고, 사회적 통합을 깨트리고, 도덕심을 타락시키는 해악을 사회 전반에 미치기 때문에 더욱 해롭다. 

‘힐스버러 참사’를 바라보는 정치권과 경찰, 일부 언론의 인식과 유가족과 생존자, 일반 영국민들의 인식이 너무도 달랐다. 사고 직후 경찰은 ‘극성 리버풀 팬’과 술에 취한 과격한 팬들의 행동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도 경찰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희생자 가족들과 리버풀 팬들은 법원에 제소했고, 결국 27년이 지난 2016년 4월에 이르러서야 법원은 경찰의 과실을 인정하는 판결을 하게 됐다.

초기 대응에서 책임회피와 은폐, 축소로 희생자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일부 영국 국민은 언론의 잘못된 정보 탓에 희생자들에게 원인을 돌렸고, 국민의 통합은 깨지고 반목과 불신이 사회 전반의 불안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동체의 양심에 지속해서 악영향을 미친 참사로 남았다.

이 재난은 결국 예측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예견된 것이라는 법원의 판결은 받았지만, 정치권은 이미 국민에게 믿음을 줄 수 없는 영역이 됐다. 그들의 역할에 더는 신뢰를 보내지 않게 된 것이다. 이후 총리 마거릿 대처는 리버풀 팬들에게는 철천지원수가 됐다. 오죽했으면 “대처가 죽으면 파티를 열 거야”라는 리버풀 응원가가 만들어질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반면 당시 리버풀 감독이었던 케니 달글리시는 참사에 대한 무한책임을 안고 매일 같이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었으며, 진심으로 사죄했다. 참사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 쉬지 않고 바쁘게 희생자들을 찾아다녔던 달글리시는 정신적, 육체적 피폐함이 더해져 건강을 잃었다. 결국 자의로 1991년에 감독직을 내려놓게 된다. 원래 리버풀의 레전드였지만, 불행한 참사에 대한 그의 진정성 있는 태도로 그는 리버풀의 레전드 중 레전드로 더욱 추앙받게 됐다고 한다.

그 해, 리그 챔피언을 결정하는 마지막 경기에서 상대팀 아스날 선수들은 꽃을 들고 입장해 리버풀 팬들에게 위로와 위안의 마음으로 꽃을 전달했다. 아스날이 2골 차로 우승컵을 가져갔지만, 리버풀 팬들은 모두 기립해서 박수로 그들의 리그의 우승을 축하했다. 이날의 경기는 리버풀과 아스날이 형제의 구단이라고 불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개인적 ‘깨달음’이란 지혜의 눈을 열어 세상을 보는 올바른 안목을 갖기 위한 것이다. 

그 깨달음의 완성은 사회적 확장성에 있다. 그것이 대승사상(大乘思想)의 정신이기도 하다. 혼자만을 위한 ‘깨달음’이 개인적 만족과 행복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대중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힘이 결여됐다면, 종이 위에 쓰여 있는 좋은 말씀일 뿐이다.

선가(禪家)에 이런 게송(偈頌)이 있다.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니
경전을 펼쳐 보아야 글자 하나 없건만
항상 큰 빛을 발하고 있다.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바로 서야 ‘깨달음’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는 ‘깨달음’의 본질적인 요소가 우리 모두에게 각자 내재해 있다고 한다. 단지, 잘못된 생각과 집착이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깨달음은 경전에 쓰인 문자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통합’은 계도와 여론몰이에 있지 않고, 국민 상호 간에, 국가와 국민 간에, 권력을 가진 자와 그 권력을 준 자와의 신뢰와 믿음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솔직함과 정직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상처가 빨리 아문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