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한거都心閑居] 말에 속지 맙시다

2022-12-05     석두 스님

靑山見我無語居(청산견아무어거)  
蒼空視吾無埃生(창공시오무애생)  
貪慾離脫怒抛棄(탐욕이탈노포기)  
水如風居歸天命(수여풍거귀천명)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빈도(貧道)와 가깝게 지내는 도반 스님이 신명나면 부르던 노래 가사다. 이 가사가 실은 고려 말에 실존한 나옹 혜근선사(懶翁 惠勤禪師, 1320~1376)의 게송임을 안 것은 출가하고 나서다. 일반인들에게는 임충현 선생님이 편시(編詩)하고, 한지영 님이 작곡해 만든 가곡 <청산은 나를 보고>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나옹 스님은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으며, 인도의 고승인 지공(誌公) 스님의  제자로서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였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보통 절에서는 새벽예불에 칠정례(七頂禮)가 일반적이다. 한데 빈도가 출가해 강원 생활을 시작한 순천 송광사에서는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의 명호를 부르며 예불을 보는 팔정례였다. 역대 선지식에 대한 흠모와 존경이다. 그만큼 나옹 스님의 불교사적 영향력은 고려 말에서 조선왕조까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승도 일찍이 나옹 스님을 알아봤다. 나옹 스님은 세납(歲納)으로 27~37세 때까지 10여 년을 원나라 수도인 옌징(지금의 베이징)에서 지공화상의 지도 아래 공부했는데, 그 시절 중국의 스님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곤 했다. 하지만 지공화상은 고려 땅에서 온 나옹 스님에게 판수(板首)를 맡겼다. 

당시 중국에서는 과거시험에 첫째로 합격한 사람을 판수라고 불렀다. 그리고 당시 중국 선종사찰(禪宗寺刹)에서 수행하는 스님 중 가장 위의 스님에게 판수라는 소임을 맡겼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총림(叢林)에서 최고 어른인 방장(方丈) 아래 최고 책임자 스님을 수좌(首座)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깨달음의 안목은 남달랐기에 중요 소임을 이방인 스님에게 맡긴 것이었다. 

하루는 나옹 스님이 게송을 지어 지공화상에게 보여드렸다.

“이 마음이 어두우면 
산은 산, 물은 물인데
이 마음이 밝아지면
티끌 티끌이 한 몸이네
어둠이랑 밝음이랑 함께
거두어 버리니,
닭은 새벽마다
꼬끼오.”

나옹 스님의 게송을 듣고 지공화상은 이렇게 화답했다고 한다.

“나도 아침마다 징소리를 듣는다네.”

이런 상황을 절집에서는 법거량(法擧量)이라고 한다. 수행자의 공부 깊이를 가늠하는 방법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아리송한 질문과 대답 속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법에 대한 안목을 되묻기도 하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한다. 때로는 크게 소리 지르거나, 어떤 특정한 신체 동작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조사스님들이 당신의 깨달은 견처(見處)에 따라 제자들을 제접(提接)하는 방식의 일종이다.

위의 게송에서 법거량의 핵심은 ‘꼬끼오’와 ‘징소리’의 대비가 아닌가 한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분명 차이가 난다. 둘은 분명 ‘같은 뜻의 소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소리’라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우주의 한 공간에서 ‘소리는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소리가 의미를 가질 때, 소리는 차별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늘 의미가 내포된 소리들에 둘러싸여 있다. 한 번도 소리에서 의미를 제거하고 본래 ‘원음’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소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보다도 소리에 덧입혀진 의미에 더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인간은 언어를 매개체로 의사를 전달했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소리의 높낮이로 감정을 전달했을 뿐이다. 그때의 소리에는 이성은 배제되고 직관적인 감성만이 전달됐다. 그래서 더욱 호소력이 있었으며, 감정 전달에 오류가 발생할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언어의 등장으로 우리는 보다 명확한 세계 속에서 냉철하게 사물을 분별하는 힘을 갖게 됐다. 그 힘은 과학적인 관찰을 가능케 했으며, 인류의 생활을 한층 더 진보된 삶으로 이끌어 왔노라고 자평한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우리는 더 소외되고 불행하다. 단순한 것은 사소한 게 아니다. 우리는 본래 단순하다. 아기들을 보라!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잠을 잘 잔다. 싫으면 찡그리고, 만족하면 방실방실 웃는다. 반려견들은 주인의 음색에, 표정에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주인이 던지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이제 30대의 젊은 나옹 스님에게 들리는 닭 울음소리는 예전의 닭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지공화상에게도 들리는 징소리는 예전의 그 징소리는 아닐 것이다. 두 스님은 드디어 ‘지음(知音)’의 경지에서 조우(遭遇)한 것이다.

한번은 나옹 스님이 중국 절강성의 항현 남병산에 있는 절을 방문했다. 거기서 한 중국 노승(老僧)은 젊은 나옹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나라에서도 참선법이 있는가?” 나옹 스님이 변방의 고려 출신임을 알고 약간은 무시하는 말투였을 것이다. 이에 스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해 뜨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떠야
강남 땅과 산과 바다는
함께 붉어집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우리는 우리
너는 너라고,
신령한 빛이야
언제나
그 빛이지요.”

우리나라는 대륙의 동쪽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동국(東國)’이라 불렸다. 해는 반드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해가 떠야 비로소 중국도 붉은 빛의 나라가 될 수 있다. 노승의 차별적 인간관을 보편적인 빛의 특성으로 훈계한 장면이다. 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깊은 동굴 속조차도 닿을 수 있는 공간까지는 고르게 비춘다. 못난 인간, 잘난 인간도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

한때 우리 사회는 보편적 복지정책과 선별적 복지정책 논쟁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무상급식에 대한 논쟁도 그런 연장선일 것이다. 언어는 그 단어 자체에서부터 우리에게 차별적 선입관을 심어준다. 선행적으로 쓴 ‘보편적’ ‘선별적’이란 단어 자체가 벌써 진영을 둘로 나누고 있다. 중요한 것은 ‘복지’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정책적 방향으로 나아가도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는 본말을 망각하고 지말에 매달리는 우를 가끔 범하곤 한다. 말의 의미에 휘둘리면서….

마지막으로 나옹 스님이 누이에게 보낸 편지글인 ‘답매씨서(答妹氏書)’의 마지막 게송을 적고 줄이고자 한다. 이 게송은 염불 공부법에 대한 당부이지만, 마음공부하는 이에게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마음속 깊이 잠시라도 잊지 말라.
생각하고 생각 다해 무념처에 도달하면
어느 때나 육문에서 금색광명이 빛나리라.

아미타부처님은 서방정토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계신 것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편리대로 살고, 밖에서 구하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 생각 생각이 간절하여 끊이지 아니하여 마침내 그 생각의 자리마저 놓아버린다면, 아미타부처님은 바로 그 자리에 나와 늘 함께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탐구는 치열하게, 하지만 생각은 단순하게.”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