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초대석] 가평 백련사 승원 스님

사진으로 어록을 남기신 스승, 관조 스님

2022-10-31     김남수

“승원 스님!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어요. 지금까지 냈던 것과 다른 좋은 작품집을 한 권 출간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스승 관조 스님이 세상과 이연(離緣)을 앞둔 2006년 가을, 승원 스님의 손을 잡고 남기신 말이다. 그래서 승원 스님은 가평 백련사 나뭇잎에 단풍이 들라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올가을, 사진집 『관조(觀照)』를 내면서 16년 짐을 덜었다. 10월 24일 부도와 탑비 제막식도 했다. 

 

관조원(觀照園)

백련사 대웅전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축령산 잣나무 숲 사이로 관조원이 나온다. 바위로 새긴 관조원 표식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관조 스님의 부도가 있다. 옆에 비석이 없으면, 부도인지 알 수 없을 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커다란 바위에 스승을 모셨다. 사각형 검은 테두리와 눈동자가 새겨진 렌즈는 누가 보아도 카메라를 상상하게 한다. 예술가로서의 스님을 남다르게 모시고 싶었다고. 

“1974년에 출가했는데, 스님은 사진을 찍고 계셨죠. 조그만 방 안에 암실을 두고 필름을 인화하고 계셨습니다. 방을 청소하려 하면, ‘만지지 마!’ 하고 호통을 치셨죠. 어린 마음에 보이는 것만 대충 훔치고 나오곤 했습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사진이 작품으로서 대접받지 못할 때다. 특히나 스님이 사진기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니 시선이 아주 따가웠다고. 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다비식이나 수계식, 예불을 사진에 담고자 할 때는 핀잔을 많이 먹었단다. 지금에 와서는 은사스님 사진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한다.

“스님 사진에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건축물과 문화재가 많이 있습니다. 법당과 벽화, 꽃살문, 수미단뿐 아니라 궁궐과 서원까지 담으셨죠. 옛것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뒤지다 보면 스님의 사진에 모두 있습니다. 사진의 힘을 느끼죠.”

 

“사진은 스님의 사리(舍利)입니다”

승원 스님은 1999년 백련사에 발을 디뎠다. 범어사에 있던 은사스님의 필름을 백련사로 옮겼다. 또 다른 필름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어, 모으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모두 모으니 20만 장. 

필름 보관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은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사진첩을 내기 위해 3년 전부터 분류하고, 3만 5,000장을 디지털로 변환했다. 1년여 마지막 작업을 거쳐 사진첩을 발간하게 됐다. 관조 스님은 한 번 출사하면 3박 4일 이상을 머물렀다. 몇 번이고 같은 장소를 찾았다. 빛이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습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출사하시면 껌껌한 새벽에 일어나 저를 깨우셨죠. 셔터를 누를 때는 얼마나 몰입했는지, 주변 상황은 아무것도 모르셨습니다. 자연의 빛으로만 사진을 찍었기에 사진을 보면 어두워요. 어둡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한 티끌 안에 온 세상이 다 들어가 있는 화엄의 세계죠. 은사스님은 ‘사진은 깨달음의 순간을 낚아채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죠.”

관조 스님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제목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또 “사진으로 어록을 남긴다”라고 자신의 작업을 표현할 만큼 자부심이 강했다고. 30대 초반에 해인사 강주를 할 만큼 공부했지만, 이후에는 오로지 사진만 했다고 한다.

“(관조 스님은) 사진은 깨달음의 순간을 낚아채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꿈에 본 절터, 백련사

승원 스님은 도심 포교 활동을 주로 하고 있었다. 인연이 돼, 1999년에 백련사에 왔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 올 때만 하더라도 법당과 요사채가 붙어 있는 건물 한 채였다. 

“한국전쟁 당시 홀로되신 백련심 보살님이 절을 세우겠다는 원력으로 100일 기도했는데, 어느 날 꿈에 절터가 나타났나 봐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셨겠죠? 이곳에 와 보니 바로 그 절터였던 거예요.”

삯바느질로 돈을 모아 절을 지은 보살님은 백련사에 머물다, 남은 재산 모두를 동국대에 보시하고 공덕비 하나 남기고 가셨다. 본디 도반 스님하고 인연이 있었는데, 스님이 오시게 됐다고. 지금은 부지를 매입해 12,000평이 넘고, 창살 문양이 특히 아름다운 대웅전과 템플스테이 수련관 등 꽤 많은 건물이 들어섰다. 스님은 2000년대 중반 3년 동안 조계종 소임을 맡기도 했다. “그 기간에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했더니, “초하루나 재일 때만 절에 왔죠.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네요”라며 허허 웃는다. 

사찰이 창건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뒷산 이름이 축령산(祝靈山)이다. 신령스러움과 기도가 함께 하는 산, 예부터 사찰이 있지 않았을까? 좌우로는 운악산과 명지산 숨결이 느껴진다. 백련사가 있는 가평은 유달리 군부대가 많다. 산으로도 둘러싸였지만, 군부대도 호위하고 있다.

백련사는 템플스테이로 알려졌다. 템플스테이 참가자를 위해 다실 전용 전각을 짓고 있었다. 템플스테이를 찾는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스님과의 차담’이기에 차담 전용 공간을 만들었다. 전각 이름이 ‘피안정(彼岸亭)’. ‘편하게 쉬었다 가라’는 의미다. 3면을 유리로 부착해, 앞뒤 산세를 보면서 차담을 진행할 생각이란다. 

템플스테이도 그렇고, 승원 스님은 많은 이들이 찾는 번잡함보다는 내실을 중요시하는 듯하다. 백련사 한쪽 편에 ‘부도전’이 있다. 돌아가신 신도분들을 모시는 공간이다.

“수계를 받고 원찰로 등록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불자였으면 합니다.”

“백련사를 원찰로 하는 가족 외에는 모시지 않습니다. 일반 분양하지 않거니와, 지척에 있는 분들이 오셔도 ‘일단, 백련사에 적을 두고 신행 활동을 하면 그때 받아 주겠다’라고 말하죠. 수계 받고, 원찰로 등록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불자였으면 합니다.”

스승 관조 스님이 ‘법’과 ‘뜻’ 외에 남겨 주신 것이 없다는데, 그 가풍을 따르는 듯하다. 지난 몇 달은 부도와 관조원을 조성하는 데 전력했다. 장마와 태풍으로 무너진 길을 닦고, 수로를 완비했다. 

세상과 이연을 마친 은사스님은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마라. 동서남북에 언제 바람이라도 일었더냐(열반송)”라고 하셨다. 승원 스님과 두런두런 차담을 나누는 해질 저녁, 가을바람 하나 방금 지나갔다.  

관조원 올라가는 길. 하늘 높이 솟은 잣나무 사이로 붉은 단풍잎이 몰려오고 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