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의 본원력

아미타부처님의 등에 업혀 가다

2022-10-24     효신 스님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좌상(보물) 

한평생 속는 재미로 사는 게 중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번뇌의 존재인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를 예토(穢土)라 부른다. 반대로 부처님이 사는 곳은 정토(淨土)로, 환희와 기쁨이 가득 차 있어서 극락정토라고도 한다. 구마라집은 ‘모든 정토는 오직 부처님에게만 있고 중생에게는 없다’고 한다. 『법화경』에서 설하듯, 부처님 나라는 사바세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처가 돼야 하는데, 우리가 지닌 불성이 결실을 맺는 순간 바로 부처를 이룬다. 왕생(성불)은 내재한 불성의 씨앗이 꽃피운 결과다.

보살은 4종류가 있는데, 보리심을 내거나[新發意·신발의], 보리도를 닦아 행하고 있거나[久發意·구발의], 보리에서 견고하게 물러나지 않거나[不退轉·불퇴전], 한 생만 지나면 부처의 지위에 오르는[一生補處·일생보처] 경우다. 용수보살은 범부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기 위해 아비발치(avāivartika, 불퇴전 지위)에 오르는 두 갈래의 길, 어려운[難] 길과 쉬운[易]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부처님이 부재한 시대에 홀로 두 발로 걸어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로, 보통 3아승지겁(三阿僧祗劫, 무한히 긴 시간)을 지나는 수행자의 삶을 보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부처님을 믿는 인연에 의한 것으로, 배(비행기)에 올라타 힘들이지 않고 단숨에 도착하는 방법이다. 오직 본인의 힘으로만 부처가 되는 전자의 길은 힘겹지만, 부처님 등에 업혀 가는 후자의 길은 쉽다. 담란(曇鸞, 476~542) 스님은 이를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불렀고, 도작(道綽, 562~645) 스님은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칭했다. 

우리를 단숨에 부처의 나라로 데려다주는 비행기는 아미타(Amitābha·無量光, Amitāyus·無量壽)부처님이다. 명문대 입학이나 경영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전문 컨설턴트에게 맡겨 버리면, 본인은 일체의 부수적인 잔일 없이 컨설턴트가 알려준 대로 공부만 하면 된다. 아미타부처님은 우리를 부처로 만들어 주고, 정토에서 살게 해 주는 컨설턴트다. 하지만 그 믿음을 지니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가장 간절한 신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장 쉬운 길이지만 가장 어려운 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토에 태어나 완전무결한 부처를 이루고자 한다면 아미타부처님을 그냥 믿고 의지하면 된다. 중생을 향한 아미타부처님 당신의 본래 원력[本願力]이자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마지막 한 명까지도 구제하려는 분이 아미타부처님이다. 그 대자비의 마음에는 오직 상몰중생(常沒衆生, 죄악이 많아 끊임없이 윤회하는 중생)에 대한 연민만 있다. 이 마음을 선도(善導, 613~681)대사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그저 급히 구해 내는 경우로, 호넨(法然, 1133~1212) 스님은 부모가 못난 자식을 제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같다고 비유했다. 이처럼 정토문은 본디 범부를 위하고 겸해서 성인을 위한 것이다. 아미타불은 낮은 근기의 중생을 위해 정토의 출입 문턱을 낮췄다. 능력이 부족한 범부들에게 성불의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신 소조불상으로 손 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극락전이며, 부석사의 원융국사탑비 비문의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불상을 아미타불로 본다.

 

왕생에 이르는 3가지 마음과 4가지 실천법

정토문 입문자의 기본자세는 겸손이다. 스스로 부족함을 자각해 아미타부처님을 받아들이는 수행문이다. 범부에서 부처로의 승화 과정에 법장비구의 48대원이 있었고, 그가 아미타불로 완성됐다. 법장비구가 걸어온 길, 예토에서 정토를 연결하고 범부와 부처를 연결해 주는 다리는 바로 정토삼부경이다. 정토삼부경인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의 마음과 가르침[法]이 자세히 설해져 있다. 삼부경에서 말하는 수행의 핵심은 ‘부처님의 본원력을 믿어 염불[관상 또는 칭명]’하는 것이다. 

『관무량수경』에서 정토의 왕생을 이루고자 하는 상근기 사람은 “지성심(至誠心, 진실로 정성을 다하는 마음), 심심(深心, 깊이 믿는 마음),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의 3가지 마음을 갖추면” 된다고 한다. 선도 스님은 심심이란 자신이 상몰중생임을 알아 부처님의 본원력에 올라타 왕생함을 결정코 믿는 마음이라 설명했다. 담란 스님은 정토문의 회향을 2종류로 설명한다. 자신의 공덕을 중생에 회향해 아미타불의 정토에 함께 왕생하려는 왕상(往相)회향과 정토에 태어난 후 다시 사바세계로 되돌아와 중생을 교화하는 환상(還相)회향이다. 왕상회향은 상구보리(上求菩提)에, 환상회향은 하화중생(下化衆生)에 대입된다.

이 세 가지 마음의 구족이 어려운 경우에는 염불을 권하고 있다. 『관무량수경』에서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들 중에서도 하얀 연꽃[白蓮華]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도 공덕운 비구는 선재동자에게 염불삼매법을 가르쳐 “염불삼매는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하며, 임종한 후에는 부처님 전에 태어난다”고 설한다. 염불삼매는 현재의 모든 업장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 일체의 모든 업장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탐심만 제거하고 진심과 치심은 남아 있는 다른 삼매에 비해 염불삼매는 수승하다.
왕생에 이르는 염불의 횟수와 관련해 『무량수경』에서는 일평생 동안, 『아미타경』은 1~7일, 『관무량수경』에서는 일념(1번)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차이를 담고 있다. 이것은 근기의 다양성에 맞췄기 때문인데, 임종이 임박한 하품하생까지도 염두에 둔 경우가 『관무량수경』이다. 

일심(一心)으로 행하는 염불 행자의 4가지 실천법이 있는데, 아미타불과 성자들을 모두 공손하게 공경하고 존경하는 공경수(恭敬修), 오직 염불하는 것 외에 다른 행위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행하는 무여수(無余修), 쉼이 없이 항상 행하는 무간수(無間修), 일생 동안 멈추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 행하는 장시수(長時修)다. 일심의 염불은 죽지 않으려 힘을 다해 도망칠 때 강에 이르러 강을 바로 건널 뿐, 옷을 입고 들어갈지 옷을 벗고 들어갈지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는 경우와 같다.

영천 은해사 아미타여래좌상 

 

성불하기 위해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

도작 스님은 목환자나무로 염주를 만들어 하루에 7만 번 아미타불을 염했는데, 이는 염주가 탄생한 시초이기도 하다. 도작 스님처럼 수행자가 직접 실천행을 하는데, 왜 정토문을 타력이라고 하는가? 자력과 타력의 오해에 대해서는 김호성 교수가 「정토사상 연구의 몇 가지 동향」(2018)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자력이란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의 의지나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 마음 밖에 부처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의 부처를 보는 자력의 선문(禪門)은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일 수 있다. 밖에 있는 부처는 망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밖(앞)에 부처님을 세워 의지해 성불을 이루는 것은 타력이다. 비록 염불은 내가 하고 있으나, 염불하면 반드시 성불하게 해 준다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믿어서 행하는 것이기에 타력이다. 내 안에서 힘을 발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원력이니, 아미타부처님의 힘으로 염불이 행해지는 셈이다. 나는 단지 부처님의 본원력 자기장의 힘에 끌려갈 뿐이다.

성불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그래서 ‘아미타불’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현재의 이익성취와 무관하다고 여겨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관세음보살’의 명호에는 반가워하면서도 ‘아미타불’의 명호에는 주저한다. 불도에 들어온 것은 성불하기 위함이고 성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와 터널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곧 성불한다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다 마무리함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농장을 경영한 김승호(『돈의 속성』 저자) 씨 경험에 의하면, “땅을 곧게 갈려면 멀리 봐야 한다”고 했다. 최종 목적지의 밭 끝 지점을 향하는 게 아니라, 밭 너머의 지평선을 보며 트랙터를 몰고 가야만 일자로 곧게 이랑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염불하는 이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1장(丈)의 웅덩이를 넘는다고 생각하면, 1장 이상인 1장 4~5척 정도는 넘는다고 생각해야 그것을 넘을 수 있다”는 호넨 스님의 말과 상통되는 맥락이다.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을 6자로 말하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했다. 아미타불은 불법을 상징하는 빛의 결정체이자 궁극의 부처님이다. 이 부처님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궁극의 자리로 데려가 주신다는데 당연히 그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무아미타불’ 한 마디면 족하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

 

 

사진. 유동영

 

효신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