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포토에세이_정토로 가는 길 극락전 순례

2022-10-24     유동영
화암사 가는 길에는 임도와 오솔길이 있다. 오솔길이라도 30분이면 오른다. 

‘나무아미타불’을 마음을 다해 열 번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죽음의 문턱이라 해도 일념이란 것이 단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을 찾아 스님의 법문을 듣고 법당에 앉아 부처님 전에 예를 갖추는 기본이 쌓일 때 일념도 다져질 것이다. 우리나라에 극락전을 주 전각으로 하는 절은 약 360여 개에 이른다. 그중 쉽게 인연이 닿으며 널리 알려진 극락 도량 여섯 곳을 찾았다. 

화암사 극락전
화암사 극락전
화암사 극락전

화암사 극락전

완주 불명산 깊은 계곡 암반 위에 자리한 화암사. 연구자들은 경내에 남아 있는 중창비에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머물렀다는 기록에 따라 대략 7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본다. 다만 1990년부터 30년을 넘게 절을 지키고 있는 주지 방착 스님은 그보다 한 세기 앞선 백제 무령왕 때 창건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근대까지 산내에 의상암과 용현암이 있었다. 국보 극락전과 보물 우화루 등을 포함해 범종 외 8점의 불화가 남아 있다. 또한 조선 초 대규모 중창 불사에 동참했던 사육신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의 공을 기리는 철영재가 극락전 왼쪽에 있다. 철영재 현판 글씨는 추사의 스승인 청나라 옹방강과 교류했고 시서화에 능했던 신위가 썼다. 

화암사 극락전 하앙. 용머리가 하앙이다.
화암사 우화루
화암사 우화루에 걸린 목어

극락전은 국내 유일한 하앙식(下昻式) 건축물일뿐더러 만듦새 또한 뛰어나다. 하앙의 역할을 하는 여덟 마리 용의 머리는 날렵하고 유려하며, 여의주를 쥐고 있는 다리는 나무에 홈을 만들어 역동적으로 보이게 했다. 앞면 하앙이 여덟 용인데 반해 뒤는 일곱이다. 비록 꼬리가 하나 없으나 여덟 마리의 용이 끄는 8기통 반야용선인 셈이다. 주석하며 불화 불사의 증사로 기록이 남아 있는 19세기 후반 덕진 스님은 흥선 대원군과 깊은 교류를 할 정도의 선승이었다. 성달생의 시주로 간행된 『부모은중경』, 『법화경』 등의 화암사 판본은 이후 조선시대 경전의 기본이 됐다. 

 

신륵사 극락전
신륵사 극락전
신륵사 극락전

신륵사 극락전

여주 신륵사만큼 이름이 나 있지도 크지도 않지만, 월악산 신륵사까지 충주호를 끼고 지나는 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지금은 사세가 기울어 어른 스님 한 분이 주석하고 있다. 오가는 신도보다 산에 오르는 등산객이 더 많으나, 한때 무학대사와 사명대사가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서쪽 마당에는 도량을 이뤘던 석물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고즈넉한 경내와는 다르게 극락전 안과 밖으로는 수백여 점에 이르는 단청과 벽화가 빽빽하다. 바깥벽 서쪽에는 <반야용선도>, <혜가대사단비도>, <아미타삼존내영도> 등이, 동쪽에는 <사명대사행일본지도> 등이 있다. 안쪽 벽에는 문수와 보현을 비롯한 금강역사, 나한, 조사, 스님 등이 그려져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봉황산 부석사 석등과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경』의 9품왕생 극락정토를 구현한 도량과 전각. 동쪽 매표소를 이용하면 차로 쉽게 오를 수도 있지만 한 번만이라도 남쪽 일주문에서 천천히 걸어볼 일이다. 오르는 내내 멀리 있던 소실점이 수시로 바뀌면서 새로운 풍경을 드러낸다. 천왕문에서 바라보는 팔작지붕 범종각의 위용, 범종각의 수직선과 계단의 수평선이 만드는 사각 프레임 안의 안양루, 팔작이던 지붕이 뒤에서는 맞배로 변하는 범종각, 범종각의 우측으로 비껴 서 있는 안양루, 안양루에 좌측으로 비껴 서 있는 석등, 동쪽을 향해 앉은 아미타부처님, 남동쪽으로 틀어 앉은 삼층석탑 등 걸음걸음이 흥미롭고 경이로운 극락정토다.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부석사 
부석사 

 

천등산 봉정사 덕휘루와 돌계단

봉정사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은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다. 1975년 해체 보수 전까지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해체 시 발견된 문서로 고려 공민왕 때 중수한 기록이 드러나며,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작은 돌들을 가져다 놓은 계단은 조금 좁지만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덕휘루에 큼지막하게 걸린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 현판은 이곳이 아미타 도량임을 알린다. 국보인 대웅전에도 석가모니부처님 대신 아미타 삼존불과 아미타 후불탱화를 모셨다. 법당 안에는 어느 절에나 있는 ‘사진 촬영 금지’라는 푯말이 없다. 대웅전 동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닫힌 듯 열려있는 고졸한 암자, 영산암이 있다.

 

팔공산 은해사 아침 전경
은해사 극락보전 안
은해사 극락보전 

은해사 극락보전

은해사는 산내에 8개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교구본사 가운데 드물게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셨다. 중생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도록 권했던 원효 스님이 은해사에 주석했고, 극락보전에는 생전에 염불 수행을 강조했던 일타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일타 스님은 생전 법문에서 “사람의 한평생 가운데 제일 중요한 순간이 언제인가? 죽기 직전이다. 죽기 직전에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외우면 그 사람의 마음이 무량한 빛, 무량한 수명의 아미타불과 함께하여 극락왕생을 이룰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법당은 날렵한 솜씨로 장엄돼 있으나 화려하지 않은 절제된 품격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보물로 지정된 후불탱화는 수장고에 있고 대신 사진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은해사 극락보전 천장

 

무위사와 월출산

 무위사 극락보전

영암과 강진에서 보는 월출산의 모습은 서로 사뭇 다르다. 영암 읍내의 월출산은 거칠고 웅장한 반면, 강진의 월출산은 완만하고 부드럽다. 무위사는 월출산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라의 큰 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대왕과 그의 형 효령대군의 도움으로 1430년에 지어졌고,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수륙재를 봉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무슨 연유인지 수륙재는 오랫동안 맥이 끊겨 있다가, 주지 법오 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봉행돼 올해 5회째를 맞았다. 전각과 더불어 또 하나의 걸작인 <아미타여래삼존벽화>의 세밀하고 자유자재한 필선을 놓칠 수 없다. 생각이 끊기고 말문이 닫힌다. 뒷벽의 <백의관음도>와 마당의 <선각대사탑비> 그리고 삼층석탑이 어우러져 이루는 월출산 극락정토의 향연은 “나무아미타불”을 절로 나게 한다.  

월출산 무위사 삼층석탑과 선각대사탑비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