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에서 고통을 응시하다_프란시스코 고야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2022-11-14     보일 스님
69세 때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화상 ⓒ위키미디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이제 전쟁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희망 섞인 그 기대는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으로 여지없이 무너진다. 최근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던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작전 성공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영토 수복과 점령지 해방이 북동부 전선 하르키우주뿐만 아니라 남부까지 수많은 도시와 마을에 걸쳐서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야만성이 다시금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특히 개전 초기부터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작은 도시 부차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러시아군은 민간인을 처형하고 약 280여 구에 달하는 시신을 불법으로 매장했다. 그 상당수가 손목이 결박된 채 처형된 사실이 밝혀졌다. 부차 지역뿐만 아니라 키이우 인근에서도 최소 410구 이상의 민간인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아직 통계에 산정되지 않은 지역을 감안하자면 앞으로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학살의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과거의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21세기에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도 우리 동네처럼 편의점과 세탁소가 있고, 차들이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는 곳이었다. 전쟁은 이 모든 풍경을 한순간에 모두 뒤바꾸어 놓는다. 너무나 참혹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짐승과도 같은 무자비한 폭력과 야만, 광기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고통에 맞서는가. 이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그림이 있다. 바로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게 만드는 불편한 진실을 그린 <전쟁의 참화 연작> ⓒ위키미디어

 

1808년 5월 3일

어두운 밤, 군인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사람들에게 장총을 겨누고 있다. 몇 명의 군인이 도열하고 있는지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화폭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군인이다. 바닥에 내려놓은 등불이 이 어둠 속에 벌어지는 야만과 광기를 밝힐 뿐이다. 군인들은 두 발을 크게 벌리고 상체를 잔뜩 수그린 채 금방이라도 이라도 발사할 태세이다. 팽팽한 긴장감, 말 그대로 일촉즉발이다.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무리 중에 한 사내가 양팔을 번쩍 든 채로 무릎 꿇고 서 있다. 그 사내의 눈빛은 공포에 질려 있으나 분노와 억울함도 엿보인다. 그 사내가 입고 있는 유난히 하얀 상의가 선혈이 낭자한 바닥과 대비되면서 그들의 무고함과 선량함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그 남자의 등 뒤로는 여러 사람이 두려움에 떨면서 피해 있다. 

누군가는 아예 죽음을 직감한 것인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마치 백기를 들고 항복 의사를 보이는데도 총살을 집행하는 것과 다름없다. 몇 명은 붉은 피를 흘린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앞서 총살이 집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듯 수많은 사람이 공포 속에 서 있다. 경악스럽게도 그 늘어선 줄의 끝은 알 수 없고 멀리 보이는 교회 건물까지 이어져 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흥미로운 건 사격을 하는 군인 중에서 그 누구의 얼굴도 확인할 수 없다. 반면 학살을 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지만 화가는 어느 쪽이 정당한지를 판결해주는 듯하다. 

이 그림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가 그린 작품으로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광기를 고발하는 대표적 작품이다. 1808년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이 이베리아반도 점령 후, 페르난도 7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형(조세프 호세 1세)을 스페인의 왕위에 앉히자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들이 이에 항거한다. 마드리드에서 열린 반(反)나폴레옹 시위에서 프랑스군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민간인 학살을 서슴지 않는다. 그의 작품 <1808년 5월 3일>은 민간인 학살, 그날을 소재로 한다. 이 그림은 훗날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등과 같은 반전, 반폭력 메시지를 다룬 작품에 영감을 주게 된다.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광기를 고발하는 대표적 작품 <1808년 5월 3일> ⓒ위키미디어

전쟁의 참화 연작

프랑스군의 만행에 대하여 스페인의 비정규군 민간인 게릴라들은 프랑스와 나폴레옹이 퇴위하기 전까지 항전을 계속 전개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에게 엄청난 피해와 학살, 약탈, 강간을 자행하면서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때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고야는 그 참상을 동판화로 작업, <전쟁의 참화 연작(Los desastres de la guerra, 1810~1814)>을 남기게 된다. 

<전쟁의 참화 연작>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들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게 만드는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고야는 이 불편한 진실에 눈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고야는 극적인 사실주의로 마치 종군기자가 전쟁의 참상을 사진 찍어내듯 장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생생히 담아내고 그려낸다. 각 작품에 달린 부제만 읽어봐도 그 내용이 어떨지 상상이 간다. <이유가 있든 없든>, <그리고 거친 짐승들>, <그들은 원치 않는다>, <그리고 거기선 저항자에게 어떤 도움도 없다>, <최악이 시작되다> 등이다.

거칠고 투박한 방식의 에칭(etching, 동판 따위의 금속판에 밑그림을 그리고 산으로 부식시켜 판화를 만드는 기법) 속에서 살육과 저항이 한데 뒤엉키는 가운데, 매 장면 절규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수십 장에 이르는 끔찍한 이 연작들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인간의 광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사람들은 고야에게 어째서 그토록 비인간적인 모습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냐고 질문한다. 고야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야만인은 되지 말자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이다.” 

“나의 스승은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그리고 자연이다.” 

1746년 고야는 스페인 동북부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난다. 고야는 어려서부터 도금 장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예술적 성향을 타고난다. 고야는 그림만이 아니라 조각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라고사의 가톨릭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화에 노출되고 종교 화가인 호세 루산에게도 그림을 배운다. 회화에 대한 안목과 실력을 높여가면서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지만, 번번이 낙방하고 만다(그곳에서 그림 공부를 이어나가지 못한 게 한이었던지, 훗날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방식으로 인연을 맺는다). 

이후 고야는 로마에 가서 잠시 머물다 마드리드로 돌아와 궁중 내부의 벽을 장식하는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아서 하기 시작한다. 고야는 이때부터 이전 세대의 스페인 화단을 대표하던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판화로 표현해 가는 한편, 천편일률적으로 신고전주의를 추종하는 흐름을 거부한다. 판에 박힌 그리스 조각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상류층의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려주다가 차츰 명성을 얻게 된 고야는 급기야 카를로스 4세의 수석 궁정 화가가 되기에 이른다. 많은 논란과 비밀을 간직한 <카를로스 4세의 가족>도 이 시기에 작업한 그림이다. 

겨우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되었을 무렵, 고야는 세비야에 휴가차 방문했다가 병을 얻어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상실한다. 이쯤 되면 실의에 빠질 법도 한데, 오히려 “이전에는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전혀 관찰하지 못했던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고야는 어둡고, 기괴한 화풍의 그림을 다수 선보이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고, 스스로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 집에서 이른바 ‘검은 그림’들을 작업한다. 말년의 고야는 조국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외롭게 눈을 감는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인간이 가진 이성과 광기 사이의 위태로움을 보여준 <로스 카프리초스> ⓒ위키미디어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인간의 야만과 광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노선이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질문에 고야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고야는 그의 작품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부제를 가진 <로스 카프리초스>(1799)에서 인간이 가진 이성과 광기 사이의 위태로움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기와 폭력 앞에서 시선을 돌려 외면할수록, 부엉이의 날갯짓은 더욱 요란해질 것이다. 고야는 욕망에 민감해지고 폭력에 둔감해지는 혼몽 속에서 우리 내면의 괴물이 깨어난다는 것을 이 작품으로 잘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광기를 지켜보면서도,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듣는 우리의 익숙함과 나태함이 바로 걷잡을 수 없는 또 다른 참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정도의 마음으로는 괴물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깨어 있는 마음만이, 우리를 광기와 파멸의 나락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2,500여 년 전 어린 싯다르타 태자는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숲속에서 미물 곤충들에서부터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서로 잡아먹히고 잡아먹는 먹이사슬을 응시하게 된다. 싯다르타가 이에 큰 충격을 받고 불도에 들어서게 된 것도 바로 이 고통에 대한 응시에서 시작된다. 생명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깨어 있는 마음만이 이 광기와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고야의 간절한 메시지를 듣다 보니, 『숫타니파타』의 구절이 떠오른다. 

“일어나 앉아라. 
잠을 자서 너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화살에 맞아 고통을 받는 
이에게 잠이 웬 말인가? 
평안을 얻기 위해 
일념으로 배워라.”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