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

고려인의 간절한 염원, 대장경으로 새기다

2022-09-28     남권희

고려대장경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을 말하지만, 고려에는 팔만대장경보다 200여 년 전에 판각된 초조대장경이 있었다. 팔만대장경이 몽골 침입이라는 국난 시기에 조성됐듯, 초조대장경 역시 거란의 침입이라는 또 다른 국난 시기에 조성됐다. 팔만대장경과 비교해 초조대장경의 가치를 조명해보자. 

 

칙판대장경과 거란대장경

대장경은 불교 문헌이 결집된 집합체다. 한문으로 조성된 최초 대장경은 북송시대 조성된 칙판대장경(敕版大藏經)이다. 중국 송(宋)나라 개보(開寶) 연간(968~976)에 주로 제작됐다고 해서 개보장(開寶藏), 혹은 개보대장경이라 부른다. 북송 때 황제의 명으로 만든 대장경이라 해서 북송칙판대장경(北宋敕版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판각된 이후 고려로 전해져,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을 이루는 바탕이 된 대장경이다.

대장경은 목판으로 새겨진 팔만대장경이 가장 많이 알려졌지만, 기록 방식에 따라 필사본(筆寫本, 손으로 직접 쓴) 대장경, 금은자사(금·은 등으로 입힌) 대장경이 있다. 수록 내용에 따라 밀교대장(密敎大藏), 조성된 시기에 따라 송(宋)·금(金)·원(元)판 대장경,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 명나라 시기 조성)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그 밖에 발견 장소에 따라 중국의 방산석경(房山石經)이나 돈황의 석굴에서 발견된 여러 종의 대장경이 있다.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석경(보물)’, 통일신라, 화엄사 성보박물관 소장

고려의 초조대장경이나 팔만대장경은 중국의 송판, 즉 칙판대장경 체제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13만여 판, 5,040여 권 480질에 해당하는 본 장과 이후 계속해서 간행된 속간을 포함한 북송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을 일컫는다. 익주(益州)에서 판각됐기 때문에 ‘촉본대장경(蜀本大藏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480질에 해당하는 본 장만을 ‘칙판대장경’으로 칭하고, 그 이후에 간행된 것은 ‘송조대장경’으로 별도로 칭한다.

중국의 다른 대장경은 한 행에 17자를 기본으로 이뤄지는데, 칙판대장경은 14자를 배열한다. 초조대장경, 금판대장경, 팔만대장경이 이 형식을 따른다. 칙판대장경과 초조대장경·팔만대장경의 형식은 같지만, 분량과 내용·글자·문장·저자·서명 등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가와 생략과 같은 변화에 기인한다.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초조대장경에 영향을 많이 준 거란대장경은 요나라에서 조성한 것으로 ‘거란장’으로 부른다. 본문의 문자는 한문으로 쓴 것이지만, 형식은 ‘개보장’이나 초조대장경과 다르다.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필사본, 리움미술관 소장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 경전으로 국보로 지정됐다. 

 

200년 먼저 간행된 초조대장경

몽골 침입 때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의 실물 인출본(印出本, 인쇄본)이 점차 알려지면서, 대구 부인사에 보관돼 있던 초조대장경 관련 연구가 20세기 들어 진행됐다. 이에 따라 팔만대장경의 불교사와 서지학 연구에 집중됐던 관심이 200년 먼저 간행된 초조대장경의 조사 및 연구로 옮겨갔다. 

초조대장경의 인출본은 현재 국내에 300여 권, 일본 교토의 남선사(南禪寺), 대마도의 대마역사민속박물관, 이키섬의 안국사(安國寺) 등에 모두 약 2,500여 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조대장경의 판각은 현종 2년(1011) 무렵에 착수됐다.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 나라에 선양코자 했음은 물론, 특히 신앙으로 당시 당면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발원에서였다. 

북송에서 동양 최초로 많은 양의 칙판대장경이 판각되고 8년 후인, 성종 10년 (991)에 최초로 인쇄본이 고려에 전해진다. 이후 몇 차례 전래됐고, 불교가 국가적 신앙이었던 고려 정부는 이를 판각해 문화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다. 초조대장경의 판각에는 주로 송나라에서 들여온 판본이 밑바탕이 됐으나, 거란에서 만들어진 대장경의 내용도 적지 않게 편입됐다. 거란판은 초조대장경보다 늦은 요나라의 1031년에 착수돼 1054년 무렵까지 완성됐다고 본다. 문종 17년(1063) 3월에 고려에 도입돼, 기존에 있던 초조대장경에 보충해 간행되기 시작했다. 송판의 대장경도 추가로 도입됐다.

추가로 전해진 대장경의 간행과 편입 때문에 초조대장경의 조성 시기를  폭넓은 관점에서는 대체로 현종 2년(1011)부터 선종 4년(1087)까지로 보고 있기도 하다. 대체로, 초조대장경은 1011년에 시작해, “완성 후 경찬회를 개최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1029년경에 1차로 완성한 것으로 비정한다. 나머지는 추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조대장경 『정법화경』 권1의 제일 앞과 뒤. 사진 필자 제공
팔만대장경 『정법화경』 권1의 제일 앞과 뒤. 사진 동국대 불교학술원 제공

 

초조대장경 어디서 판각했을까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외침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국난의 시기에 판각됐다. 이러한 정황은, 몽골 침입 시 이규보가 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고려는 대장경을 판각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현종 2년에 거란주(契丹主)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와서 정벌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거란 군사는 오히려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즉, 대장경의 판각은 현종 시기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호국불교의 차원에서 시작됐다. 한편으로는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창건하고 이 절에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많은 경전을 간행했으며 그 사업의 일환으로 대장경 간행을 시작했다는 견해도 있다. 

대장경 간행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는 시기는 문종 때다. 대각국사 의천이 “현종은 5천 축의 대장경을 새겼고, 문종은 천만 송의 경을 새겼다”고 함으로써 대장경이 현종과 문종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판각 장소는 개성의 사찰일 것으로 짐작한다. 판의 보관은 처음에는 개경의 흥왕사에 봉안했으나, 이후 대구 부근의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졌다. 

『고려사』 고종 38년(1251) 9월 “임진년(1232년), 대장경판이 몽골병란에 타버렸다”고 하며,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도 “몽골군이 잔인하고 흉포하여 지나가는 곳마다 불상, 불경 할 것 없이 모두 불살랐고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었던 대장경 판본도 모두 태워 오랜 세월의 공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고 나라의 대보를 잃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고종 19년(1232) 이전에 대장경이 부인사로 옮겨왔고, 보관돼 있던 초조대장경판이 몽골군에 의해 모두 불타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 vs 팔만대장경

초조대장경 중 찍어낸 시기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는 일본 이키섬 안국사에 소장된 『대반야바라밀다경』 219권 중 6권이다. 1046년에 김해부의 호장 허진수(許珍壽)가 국가의 안녕과 돌아가신 부모의 천도를 원해 찍어낸다는 발원문이 실려 있다. 

초조대장경의 형태를 찍어낸 한 판의 일반적인 크기로 살펴보자. 바탕 종이의 높이는 27.8~29.3cm, 인쇄된 부분의 높이는 21.5~23.5cm, 종이의 길이는 45~47.5cm로 나타난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과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의 경우 1장의 길이가 약 55cm로 다른 경전에 비해 크다. 한 장의 크기는 대체로 팔만대장경과 거의 같지만, 『화엄경』 등 일부 경전에서는 권차나 내용의 순서가 이동되거나 바뀐 부분도 적지 않다. 수기(守其) 스님이 팔만대장경을 조성할 때 송판, 거란판, 초조판 등과 대조하면서 정본을 만들어 수정했기 때문이다. 

초조대장경 『어제비장전(御製祕藏詮)』에 수록된 변상도(變相圖).
불법의 가르침을 읊은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진 필자 제공 

초조대장경이 팔만대장경과 다르거나 특별한 점을 현존하는 2,500여 점의 초조대장경 판본의 측면에서 비교해보자. 

첫째, 각 장을 연결할 때 대체로 판의 본문 앞 가장자리에 작은 자로 간략한 제목을 새기고, 장차의 표시를 ‘장(丈), 폭(幅)’ 등의 용어를 사용한 점이 팔만대장경과 다르다. 팔만대장경에는 연결의 끝 가장자리에 제목을 새기고 장차의 표시도 ‘장(張)’자를 많이 사용했다.

둘째, 권말의 제목 뒤에 중국에서 칙판대장경을 처음 만들 때의 관련자인 ‘교정, 윤문, 풀이, 감독한 사람들의 관직과 인명 기록’이 약 60여 건이 된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된 12권의 중국 ‘칙판대장경’에서 볼 수 없는 기록이다. 

셋째, 팔만대장경과 달리 책 말미에 간기가 없다. 

넷째, 『어제비장전』, 『어제불부(御製佛賦)』, 『어제소요영(御製逍遙詠)』에는 아주 정교한 구도의 판화 100여 건이 새겨져 있다. 

다섯째, 일부 경전에서는 단어, 문장, 단락을 고쳐 교정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출본의 글씨 중 크기가 다른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중국 송판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송 태조와 관련된 이름을 피해 글자의 획을 생략하는 피휘(避諱, 동아시아에서 사람을 부를 때 본명을 직접 부르지 않고 돌려 부르는 관습) 현상이 나타난다. (敬, 竟, 殷, 匡 등의 마지막 획을 생략했다.) 예외적으로 『법원주림(法苑珠林)』의 경우는 한국 유통본을 저본(底本, 원본)으로 해 새로 판각했기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建’의 마지막 획을 생략한 곳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일곱째, 책의 형태에서 국내본은 대체로 권자본(卷子本, 두루마리 형태의 책) 형식인데, 일본 소재본은 권자본이었던 것을 모두 절첩본(折帖本, 병풍처럼 접는 식으로 만들어진 책)으로 고쳐서 보관했다. 

여덟째, 서명이 같은 여러 경전에서 편철이 달라진 대표적인 것으로는 『화엄경』이 있다. 특히 팔만대장경 중 60권 『화엄경』은 한 행이 17자이나, 초조대장경에서의 행자 수는 14자이다. 편성도 50권으로 구성된 점이 다르다.   

초조대장경 『무량문파마다라니경』 권선본(두루마리 형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초조대장경으로 제1~3장, 제4~14장, 제15장 내용이 연결돼 있다.
초조대장경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66,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대승불교의 중요 학파인 유식학파의 기본적인 논서로 11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에서 첫 번째로 조성됐던 초조대장경은 불교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호국불교의 상징 역할을 충분히 했다. 비록 현재는 새겨진 판목이 남아 있지 않고 찍어낸 경전도 당시 분량의 1/2도 남아 있지 않지만, 남아 있는 것들은 글자 서체·판각의 정교함·종이와 장정 면에서 매우 우수한 편에 속한다. 특히 초조대장경은 ‘전체 12권밖에 남아 있지 않은 중국의 개보장의 내용과 권말의 편찬, 교정, 간행 등의 기록’이 있어, 대장경의 초기 조성에 관한 불교사의 중요한 기록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또 100여 장에 달하는 목판화는 미술사에서 특별하다. 『유가사지론』을 포함한 일부 경전에 표시된 고려시대 각필구결(角筆口訣, 한문을 읽을 때 그 뜻을 각 구절에 달아 쓰던 문법적 요소)의 부호는 고려시대의 우리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남권희
경북대 사회과학대학 문헌정보학과 명예교수(서지학 전공). 주요 저서로 『지식정보의 소통과 한국 금속활자 발달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