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만든 사람들

대장경 왜·어디서·누가 만들었을까?

2022-09-28     최연주

왜 판각했을까

팔만대장경 판각은 13세기 중엽 몽골군 침공과 관련 깊다. 1206년 칭기즈칸이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를 건국한 직후, 중국은 물론 만주·서역, 그리고 동유럽까지 정복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고려와 인접한 요(遼)·금(金)나라도 멸망시켰다. 

그 과정에서 거란의 잔존 세력인 금산(金山)·금시(金始) 왕자가 이끄는 군대가 몽골에 쫓겨 고려 영토에 들어왔다. 1216년 고종 3년 12월 의주-해주-철원까지 진출했고, 이듬해 7월 김취려에 의해 충주 박달현에서 저지당하자 동계(東界)를 넘어 여진 지역으로 물러갔다. 다시 침입해 오자 고종 5년 8월 강동성(지금의 평양 부근)에서 고려와 몽골, 그리고 동진(東眞) 연합군이 대응해 물리쳤다. 거란 군대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이 이뤄졌고, 이어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었다. 

고종 8년 8월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 와 횡포를 부리다가, 고종 11년 11월 저고여 등 10인이 귀국 도중 함신진(지금의 의주)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은 고려를 의심해 외교 관계를 끊었는데, 대규모 출병을 알리는 의사표시였다.

고종 18년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골군은 첫 침공 이후 고종 46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논의가 진행될 때까지 수시로 침공해 왔다. 몽골은 동선을 달리하며 침공해 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러 우리 국토를 짓밟았다. 고종 19년에는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이듬해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丈六尊像) 등이 몽골군에 의해 불탔다. 

고려는 불법(佛法)의 힘을 빌려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게 됐다. 이는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불상과 범서(梵書)를 마구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에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남김없이 태워 버렸습니다”라며 대장경 판각 착수 배경 중 하나가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소위 초조대장경의 소실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초조대장경의 판각 배경이 1011년 현종 2년 거란군 침입에 따른 격퇴와 연관돼 있음을 밝히고, 이번에도 대장경을 판각한다면 몽골군이 물러갈 것이라 믿었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대장경 판각을 호국사업으로 인식하면서 부처의 힘으로 몽골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2 ‘신해세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辛亥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는 기록으로 문집이 진주의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됐음을 알 수 있다. 사진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어디서 만들었을까

대장경 판각을 위한 별도의 기구가 설치됐다. 『고려사』 고종 38년 9월 기사에 따르면 “임금은 성의 서문 밖에 대장경판당(大藏經版堂)에 행차해 백관을 거느리고 분향했다. 현종 때 판본이 임진년(고종 19년) 몽골군에 의해 불타 버렸다. 왕이 여러 신하와 함께 다시 발원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해 16년 만에 공역을 마쳤다”고 한다. 

여기서 대장경 판각을 위해 임시 기구인 도감이 설치되고, 16년간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팔만대장경에 편제된 불교 경전의 각 권말에 간기(刊記, 간행의 기록)가 새겨져 있다.

“○○세에 고려국의 대장도감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새기고 만들었습니다(○○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세에 고려국의 분사대장도감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새기고 만들었습니다(○○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로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간기에 ‘봉칙조조(奉勅雕造)’라고 한 사실은 몽골과 전쟁 중이지만 고려 국왕이 황제임을 천하에 알리며 자주적인 대외관을 반영했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은 단순한 불교 경전의 집합체가 아니라 당시 우리 역사를 새긴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개원석교록』 말미의 “○○세에 고려국의 대장도감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새기고 만들었습니다(○○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부분. 사진 동국대 불교학술원 제공

대장도감은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강화경(江華京, 지금의 인천 강화군)에 설치돼 판각과 관련된 정책 입안 등을 맡아 보면서 경판을 판각한 기구로, 분사대장도감은 사업에 필요한 인적(人的) 물자의 조달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경판을 판각한 기구로 이해된다.

대장경 간기를 분석해 보면 대장도감은 고종 24년부터 35년까지, 분사대장도감은 고종 30년부터 35년까지 각각 경판을 판각했다. 고종 36년에는 판각되지 않았고, 고종 37년과 38년에는 도감을 알 수 없는 경판 30매와 22매가 판각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고종 35년에 사업이 마무리된 것으로 짐작한다. 특히 분사대장도감은 고종 30년부터 6년간 판각했는데, 판각 수량은 전체 10% 안팎으로 조사된 것으로 보아 그 역할과 임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종 물자의 조달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분사대장도감의 설치 운영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계수관(界首官)이 파견된 대읍(大邑)인 경남 진주와 남해 등 다양한 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2 ‘신해세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辛亥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는 기록으로 문집이 진주의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됐음을 알 수 있다. 또 『종경록』 권27에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을 통해 남해에 설치됐고, 최근 『당현시범』 권하에 ‘병오세개령분사대장도감개판(丙午歲開寧分司大藏都監開板)’을 통해 경북 김천 개령에도 설치됐음이 밝혀졌다.

『당현시범(唐賢詩範)』 권하 8, 10, 11장, 사진 해인사 제공 
장경판전에 보관된 중국의 시문집이다. ‘병오세개령분사대장도감개판(丙午歲開寧分司大藏都監開板)’이 새겨져 있어, 경북 김천 개령에도 분사도감이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종경록』 권27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 부분. 사진 동국대 불교학술원 제공

한편 사(寫)함의 『아육왕경』 권1 간기는 ‘을사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인데, 계선 밖에 음각으로 ‘중방(中房)’·‘한립(漢立)’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중방’은 경판 판각을 위한 별도의 공방(工房)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중방’이라는 공방은 동서남북을 지칭하는 공간과 연관돼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해인사를 비롯하여 수선사(지금의 송광사) 등 사찰에서도 경판 판각에 참여했음이 밝혀졌다. 

임시 수도인 강화경에는 대장도감이, 주요 지역에는 분사대장도감이 설치됐다. 몽골과의 전쟁 중에 8만여 매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경판을 효율적으로 판각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판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인적 자원, 즉 필사자, 각수(刻手), 목수 등의 참여, 그리고 관련 물자의 원활한 조달 등을 고려해 여러 곳에 분산해 운영했을 것이다.

 

누가 판각했을까

팔만대장경 목판에는 각수로 추정되는 다양한 인·법명이 새겨져 있다. 예를 들면 임대절(林大節)은 고종 25년에 판각된 『마하반야바라밀경』 권13에 ‘대절도(大節刀)’, ‘진사임대절간(進士林大節刊)’으로 새겨 자신이 과거급제한 진사임을 밝혔다. 허백유(許白儒)는 고종 23년 판각된 『대반야바라밀다경』 권23에 ‘대정허(隊正許)’, ‘허백유(許白儒)’라 새겨 자신이 초급장교인 대정임을 밝혔다. 고종 24년과 25년 판각된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75와 권182에 참여한 천균(天均)과 영수(永壽)는 자신의 인·법명 앞에 ‘충주(忠州)’를 새겨 충주 사람임을 밝혔다. 판각된 시기를 알 수 없는 『자비도량참법』 권9에는 ‘호장중윤김련(戶長中尹金練)’, ‘호장배공작(戶長裵公綽)’이라 새겨 지역사회의 여론 주도층인 호장의 참여를 보여준다. 

각수들은 인·법명을 이체자(異體字, 뜻과 음은 같으나 모양이 다른 한자)로 새기는데, 손창(孫昌, 孫慞), 보기(宝基, 宝其), 보균(宝均, 甫均), 한주(漢珠, 漢周, 漢朱), 유휘(有暉, 有煇, 有輝) 등이 있다. 자신의 성씨와 이름을 이체자로 번갈아 새기기도 하는데, 홍윤성(洪允成, 允成, 允誠), 박숭보(朴崇宝, 崇宝, 崇寶, 崇甫, 崇保) 등이다. 자신이 판각했음을 밝힌 김대명(金大明, 刻大明, 刻金大明), 양세경(刻梁世卿), 윤보(允宝, 允甫, 允宝造), 금강(金剛, 金剛手, 金剛刀), 지경(之景, 之竟, 之竟手), 희백(希白手, 希伯刀), 그 밖에 송고(松古刊), 자지순(志淳刻), 지정(志貞手), 지화(智和刻)도 있다.

『마하반야바라밀경』 권13 13장, 사진 해인사 제공
임대절(林大節)은 ‘진사임대절간(進士林大節刊)’이라고 새겨 자신이 과거급제한 진사임을 밝혔다.
『방광반야바라밀경』 권7 39장, 사진 해인사 제공
요원(了源) 스님은 ‘천태산인 요원수(天台山人 了源手)’라 새겨 자신이 각수승임을 밝혔다.

각수라고 밝힌 천허(天虛刻手)와 계안(刻者戒安), 스님임을 밝힌 녹상(道人祿祥)과 효겸(比丘孝兼刻)이 있다. 한편 요원(了源) 스님은 고종 24년 판각된 『방광반야바라밀경』 권7에 ‘요원수(了源手)’, ‘천태산인 요원수(天台山人 了源手)’라 새겨 자신이 각수승임을 밝혔다. 고종 28년 판각된 『대방등대집경』 권3 간기에 이어 ‘뇌자공덕력(賴玆功德力) 영탈윤회보(永脫輪迴報) 엄부여자당(嚴父與慈堂) 우유극락향(優遊極樂鄕) 천태산인요원수총삼십구폭(天台山人了源手摠三十九幅)’이라 새기기도 했다. 

대장경 판각에 참여한 각수는 개인이 간행한 경전 간행에도 참여했다. 고종 15년 조월암에서 간행된 『소자(小字)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 조사된 ‘석광(釋光)’은 고종 24년부터 8년간 활동한 전문 각수승이다. 그는 『소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비롯해 고종 24년 최이가 간행한 『대자(大字) 금강반야바라밀경』, 고종 25년 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각수로 참여했다. 석광은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정통한 각수승으로 추정된다. 고종 23년 12월 정안(鄭晏)이 간행한 『묘법연화경』 7권 발문에 따르면 산인(山人) 명각(明覺)에게 판각을 요청해 완성시켜 널리 보급한다는 내용이 있다. 명각은 대장경의 여러 경전을 판각했는데 『대보적경』 권110에 ‘명각(明覺)’, ‘명각수(明覺手)’, ‘명각도(明覺刀)’, 그리고 『대방등대집경』 권17에는 ‘명각수단심(明覺手段心)’, ‘명각심작(明覺心作)’, ‘명각수단심공(明覺手段心工)’ 등 ‘명각(名却)’, ‘명각수(名却手)’, ‘명각각수(名却刻手)’, ‘명각(名角)’, ‘명각도(名各刀)’, ‘각도(覺刀)’ 등을 다양하게 새겨 전문 각수승임을 알 수 있다. 

고종 23년 해인사에서 간행된 『불설범석사천왕다라니경』 판각에 참여한 대승(大升)은 고종 25년 판각된 『마하반야바라밀경』 권11 등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종 26년 최이가 간행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서 득인(得仁)·동백(東伯)·숙돈(叔敦)·일명(一明)·은유(恩儒) 등이 조사됐는데, 이들은 판각 첫해부터 참여한 전문 각수로 밝혀졌다. 그리고 고종 30년 단속사 주지 만종이 간행한 『선문염송집』에서 득심(得心)·문익(文益)·천효(天孝)·법란(法蘭) 등 각수 20여 명도 동일하게 조사됐다. 대장도감 또는 분사대장도감 체제 아래에서 활동하면서 별도의 경전 판각에 참여했던 것이다. 

각수의 활동 추이를 통해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서 대장경 판각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엽 민족적 위기 속에서 고려의 모든 계층이 참여해 이룩해 낸 역사기록물임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각수(刻手)

 

최연주
동의대 교수이며, 동의언론사 주간을 맡고 있다. 동의대에서 『고려대장경의 조성과 각성인 연구』로 문학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고려대장경연구』, 『왜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을까』와 공저로는 『국역 고려사』, 『동아시아의 목판인쇄』, 『고려시대사강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