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입니까?_에곤 실레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2022-10-10     보일 스님
죽음의 공포, 성의 욕망, 인간의 실존을 고민했던 에곤 실레

어느 날 붓다가 제자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제자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붓다는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라고 말한다. 이어서 다른 제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는데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는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다른 제자가 대답하기를 “한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훌륭하도다. 너야말로 도를 아는구나”라고 기뻐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의 이 문답은 우리가 견고하고 영원할 것이라 믿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약한 토대 위에서 이어져 가는지 잘 보여준다. 

죽음은 삶의 선형적인 연장 속에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 속에 항상 죽음이 공존한다. 몸속으로 깊이 들이마신 숨이 도로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죽음이다. 그렇게 어렵거나 철학적이지 않다. 너무나 단순한 과정이고,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하는 경계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삶과 죽음은 오히려 한몸처럼 한 덩어리로 뒤엉켜 있으면서 그 경계가 애초에 있지도 않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 그 경계선은 호흡을 통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네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한 것인가.

 

불안이 열정이 될 때 

누구에게나 삶은 불안하다. 존재한다는 것 혹은 생존한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 싸우는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육체가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병들고 늙어가면서 여실히 느끼게 된다. 이 몸이 변치 않을 것이란 믿음은 망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허망함을 이겨내고자 누군가는 돈에 집착하고, 권력이나 명성, 섹스 혹은 마약에 집착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광기에 가까운 집착 이면에는 그 시작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근원적인 불안이 자리한다. 그 불안은 공포와 집착을 먹고사는 괴물과도 같아서, 집착으로 불안을 해소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불안은 커져만 간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불안이 공포를 낳고 그 두려움에 송두리째 잡아먹히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그 불안을 열정으로 바꾸기도 한다. 아예 솔직하게 그 불안과 위태로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그 열정의 온도를 높여간다. 바로 에곤 실레(1890~1918, Egon Schiele)가 그러한 경우이다. 

에곤 실레는 그의 작품에서 죽음의 공포, 성의 욕망, 인간의 실존을 고민한다. 에곤 실레의 시선에서 삶과 죽음, 욕망과 초월 또는 저속함과 고상함 등은 하나로 뒤엉킨다. 다가오는 죽음을 뿌리 깊은 성에 대한 욕망으로 잠시 모른 척할 수 있겠지만, 죽음은 이미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에곤 실레는 살고자 하는 근원적 욕망인 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오히려 그 처연한 죽음의 그림자를 동시에 담아낸다. 죽음은 어느 순간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에곤 실레는 그 불안과 두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 경계선을 와해시킨다.

“그림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다”

1890년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북동부 작은 마을 툴른(Tulln)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철도 역장이었던 아버지와 체코 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란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아버지의 반대에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는다. 과묵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지만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을 불태운다. 

에곤 실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기울어진 가세로 학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웠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빈 미술 아카데미는 아돌프 히틀러가 입학하려 했지만, 두 번이나 낙방했다고 하는 바로 그 학교다. 누군가는 열렬히 입학하고자 희망했던 학교였지만 에곤 실레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교의 분위기에 반발해 3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자퇴는 전화위복이 되는데, 클림트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에곤 실레는 빈 아카데미를 박차고 나온 이후부터 뭉크나 반 고흐 같은 작품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하게 되고 인간의 성에 집요할 정도로 천착하게 된다. 

당시 누구도 에곤 실레만큼 과감하고 대담하게 성을 소재로 한 인간의 내면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화가는 없었다. 심지어는 미성년자를 작품 모델로 고용했다고 해서, 미성년자 유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한다. 재판에서 유괴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누드화에 대해서는 음란하고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아 감옥살이도 하게 된다. 

 

클림트를 만나다

“너무 무서운 재능이다. 
너는 이미 나를 넘어섰다.” 
 - 구스타프 클림트 

평생을 사는 동안, 자신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자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1907년 에곤 실레는 당대 최고의 재능을 자랑하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다. 에곤 실레는 평소 자신이 존경하는 클림트에게 그림을 들고 찾아가서 스승의 되어 줄 것을 청했지만, 클림트는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말하면서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닌 동지로 지낼 것을 제안한다. 그때 에곤 실레의 나이 17세였고, 클림트는 45세였다. 나이 차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감하고 인정하는 관계가 된 것이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를 중심으로 결성됐던 빈분리파에 가입하고, 그와 행보를 같이한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는다. 클림트는 에곤 실레의 그림을 사 준다든가 작품 모델을 소개하거나 전시회 출품을 주선해줄 정도로 에곤 실레의 재능을 사랑한다. 두 천재의 만남은 이렇게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면서 서로를 독려하게 된다. 

이 시기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자화상을 누드화로 그리기 시작한다.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한 에곤 실레는 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을 비추어 보고, 본인의 벗은 몸을 관찰하면서 나약한 인간의 육체에 그 참모습이 들어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된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
자신의 벗은 몸을 관찰하며 인간의 참모습을 통찰한 에곤 실레의 <자화상>

 

죽음과 여인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삶이고 욕망이다. 에곤 실레는 인생의 씁쓸하고 고통스러운 속성을 그의 작품 <죽음과 여인>(1915)을 통해 보여준다. 이 작품은 에곤 실레 곁에서 평생을 헌신했던 발리 노이칠과 에곤 실레의 관계를 묘사했다고 전해지는 그림이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가 소개해준 작품 모델인 발리 노이칠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발리는 에곤 실레의 작품 모델이 되어주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주고, 옥바라지까지 해주었음에도 배신을 당한다. 에곤 실레가 더 조건이 좋은 에디트라는 여인과의 사랑을 위해 예술적 동지이자 인생의 동지였던 발리를 떠나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실제 에곤 실레와 연인이었던 발리의 관계가 끝남을 그린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림 속 여인은 가녀린 팔로 간절하고 처절하게 남자를 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지만, 남자는 이미 몸을 뒤로 반쯤 빼고 있다. 여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남자를 향하고 있지만, 오히려 남자의 엉거주춤한 자세 때문에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이다. 남자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과 귀찮음이 같이 서려 있다. 

이 작품은 원래 다른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지하세계, 즉 저승을 지배하는 신인 하데스가 대지의 여신이자 풍요와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신부로 삼아버린 이야기를 그렸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억울하게 납치된 페르세포네의 처지를 고려해서 반년은 저승에서 나머지 반년은 이승에 살 수 있도록 중재한다. 페르세포네는 죽음과 삶, 저승과 이승, 지하와 지상의 경계를 초월한 존재로 상징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분법으로 구분 짓고 경계를 쌓아가는 그 구획이란 것이 본래 없었음을 말해준다. 이 그림이 신화를 소재로 했든 자신의 처지를 소재로 했든, 에곤 실레는 그렇게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혹은 만남과 이별 사이에 어떤 경계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너무나 대비되는 두 세계가 만나서 조화를 이루거나 불화하고 또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생의 씁쓸하고 고통스러운 속성을 보여주는 <죽음과 여인>

 

시대와의 불화, 
경계를 와해하는 예술의 힘.

“그림을 못 그린다면 난 죽을 거야.”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후계자로서 동시에 빈분리파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명성을 날리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전시회의 성공으로 연일 주가를 올리며 소위 잘나가는 화가가 된 에곤 실레는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삶을 시작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 <가족>(1918)에서는 선과 색이 이전과는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선은 더욱 부드러워지고 색은 더욱 밝아진다. 비로소 불안에서 겨우 편안함에 이른 듯했으나, 그마저도 잠시였다. 

스페인 독감이 대유행하면서 아내와 태중의 아이를 동시에 잃게 된다. 우연인지 같은 해 그의 멘토인 클림트도 세상을 떠나는데, 그가 사랑한 사람들이 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는 에곤 실레는 최악의 상실감과 절망감에 빠져든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에곤 실레는 가족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그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리고 만다. 그렇게 에곤 실레는 1918년 10월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예술사에서 뛰어난 천재들이 그러했듯이 에곤 실레도 아주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남긴 작품들은 2,000여 점이 넘는 데생과 유화가 300여 점에 달할 정도로 많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많지 않았음을 직감이라도 한 걸까. 그는 살아 있는 시간 동안 치열하게 몰입하고 불태우다 삶을 마감했다.  

가족의 장례식을 마치고 자신도 죽었던 그해의 작품 <가족>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