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소확행#] 절 지키는 가을의 전설, 은행나무

노랑 카펫 깔고 극락세계로 안내

2022-10-24     최호승
가을의 전설 따라, 노란 단풍의 극락세계로 미리 들어가 본다. ‘오묘하고 고요한 도량’ 남양주 묘적사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나무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키가 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바람이 달라졌다. 뜨겁던 햇볕은 간지럽고 따갑다. 풍경도 옷을 바꿔 입기 시작했다. 처연했던 산과 들이 신록의 바다로, 신록의 바다에서 짙은 녹음으로, 짙은 녹음에서 황금빛 들판으로 그리고 울긋불긋 색색의 빛깔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가을이다. 붉게 물드는 단풍 말고 샛노란 단풍이 드는 시기는 11월 초다. 9월 추석 지내고 10월 단풍에 물들면 금세 다가오는 고약한(?) 냄새가 있다. 코끝을 찡그리게 만들지만, 기꺼이 다가가게 만드는 고목들이 있다.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는 3억 년 가까이 지구에서 살아남았다.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에서 자주 보이는데, 우리나라엔 불교가 전해진 시기에 같이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생명력이 강한 만큼 우리나라의 모진 역사와 줄곧 함께였고, 마을 어귀나 향교 그리고 사찰을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서 있다. 게다가 스님이 지팡이를 꽂자 자랐다는 등 신비로운 이야기도 제법 얽혀 있다. 가을의 전설이다. 은행나무가 깔아놓을 샛노란 카펫 밟으며 가을의 전설 따라, 노랑 단풍의 극락세계로, 도량 안으로, 미리 들어가 본다. 

 

엄마, 자식, 손자가 다 한 나무에 있는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영동군청

절집에 있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절집은 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으며,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들었다. 한 그루 나무가 붓다의 상징이기도 했다. 붓다의 열반 후 수백 년 동안 예배 대상은 보리수였다. 선원, 강원, 율원 등을 모두 갖춘 도량은 ‘수풀로 우거진 숲’, 즉 ‘총림(叢林)’으로 부른다. 

2022년 8월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총 25그루다. 여기서 절집의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는 4그루다. 모두 절집 초입에 있는 아름드리 천년 고목들이다. 

양평 용문사에는 아파트 14층 높이인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는 42m, 수령은 1,100여 년으로 용문사를 상징하는 나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높다. 그래서 전설 같은 이야기도 많다. 신라의 마지막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게 지금의 은행나무라는 말도 있다. 세종 때는 장·차관급인 정3품 당산관 품계를 받기도 했다. 화재로 타버린 천왕문 대신 은행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 천왕목(天王木)으로 불린다. 

 

당산나무처럼 1,000년 동안 도량을 지킨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문화재청

‘삼대(三代) 은행나무’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영동 영국사에 있다. 키는 31m, 나이는 1,000살이다. 가슴높이 둘레가 약 11m 정도이니 두 팔로 품기에 버거울 정도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인상적인데,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부모에게 독립한 자식처럼 자란다. “엄마, 자식, 손자 은행나무가 한 나무에 있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나이가 1,000살 넘는 은행나무는 금산 보석사에도 있다. 보석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으니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처럼 여겨진다고. 키는 영국사 은행나무보다 큰 40m이다. 보석사 은행나무는 처음엔 6그루였단다. 절을 창건한 스님이 육바라밀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여섯 보살’을 상징하도록 했는데, 훗날 하나의 나무로 붙어서 성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

 

1년에 단 한 번 노란 꽃비를 공개하는 청도 운문사 은행나무 ⓒ청도군청

소리 내 운다는 전설이 서린 나무가 보석사 은행나무다. 그래서일까.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 대사의 순절비가 보석사에 있다. 청도 적천사를 참배하러 간다면 키 25m, 나이 800살의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적천사 은행나무도 고승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국사 보조 스님이 고려 명종 5년(1175)에 절을 다시 짓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게 지금처럼 고목이 됐단다. 절 입구에 일주문처럼 암수 2그루가 서 있는데, 천왕문 앞에 떡 버티고 있어 금강역사 같다. 

 

천연기념물 못지않은 절집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부럽지 않은, ‘가을의 전설’이 서린 절집 은행나무도 많다. 청도에는 적천사와 함께 이름난 은행나무가 있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고 천연기념물인 처진 소나무, 그보다 한국불교 비구니스님들의 스승 명성 스님이 주석 중인 청도 운문사 도량 안에 있는 은행나무다. 400살이 넘은 이 은행나무는 처진 소나무와 그리고 명성 스님과 함께 도량을 지켜왔다. 그래서다. 운문사는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 무렵 막걸리를 공양 올리고 경내에 소금단지를 묻고 화재로부터 산림과 도량을 보호해 달라고 발원한다. 승가대학 신일당 앞 넓은 마당에 가까이 마주 선 은행나무의 장관은 자주 볼 수 없다. 11월 초 1년에 단 한 번 산문을 열 때 기연이 닿은 사람만 마주할 수 있는 노란 단풍이다. ‘나무 전시장’이라 불리는 강화 전등사엔 대웅전 앞 느티나무, 대웅전 뒤 단풍나무로 유명하다. 은행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얽힌 전설이 묵직하다. 숭유억불의 조선 후기, 조정은 전등사로부터 많은 양의 은행을 공출해 갔다. 턱없이 부족한 양에 전등사에서는 아랫마을에서 은행을 주워 모으다 “은행이 열리지 않으면 공출도 없다”라며 기도를 시작했다. 나무에 은행이 열리지 않도록 수나무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어떻게 됐을까? 이후 열매를 맺지 않는 수나무가 됐다. 

가을의 전설이 또 있다. 태안의 명산이라 불리는 백화산에 자리한 태안 흥주사 마당에도 1,000년으로 흘러가는 은행나무가 있다. 900년 넘는 고목인 흥주사 은행나무는 ‘노승이 신비로운 꿈을 꾸고 불철주야 기도하고 꽂아 둔 지팡이가 은행나무가 됐다’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두물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양주 수종사에도 사연 깊은 은행나무가 있다. 피부병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에서 상경하는 길에 청명한 물소리를 좇아 다다른 곳에 세운 절이 수종사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 스님이 수종사에서 차를 달여 마실 정도로 물이 좋다는 게 수종사다. 이 좋은 물로 500년 넘게 자란 은행나무는 세조가 절을 짓고서 심었단다. 작은 해탈문 밖 벼랑 끝에선 은행나무에서 내려다보는 두물머리 풍광도 일품이다. 

은행 이파리로 온 도량이 노랗게 물드는 ‘오묘하고 고요한 도량[묘적妙寂]’ 남양주 묘적사도 은행나무 명소다. 은행나무 2그루가 도량을 호위하듯 법당 앞에 굳건히 서 있다. 은행나무가 노랑 단풍을 떨구는 날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암나무서 수나무로 바뀐 강화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

 

노랑 카펫 아름다운 명소들

전국에 은행나무 명소는 많다. 1,000년 넘은 수령의 은행나무는 절집 밖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에도 있다. 수령은 적지만 이름난 은행나무도 많다. 바람에 은행잎이 춤을 추는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은행나무, 수몰 위기에서 목숨을 건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 전등사처럼 암나무였다가 수나무로 바뀌었다는 서울 문묘,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 은행나무도 사연을 알고 보면 사랑스럽다. 

해마다 은행나무가 떨군 노랑 단풍으로 카펫을 까는 아름다운 길 역시 전국에 산재해 있다. 홍천군 내면 광원리를 비롯해 괴산군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 보령시 청라면 오서산길,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나주시 남평읍, 거창군 거창읍 의동마을, 경주시 서면 도리마을 등이 유명하다. 

가장 아름다운 거리숲 ‘곡교천 은행나무길’ ⓒ아산시청
가장 아름다운 거리숲 ‘곡교천 은행나무길’ ⓒ아산시청

그중에서도 아산 곡교천 은행나무길은 말 그대로 황금터널이다.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가 공동 주관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거리숲’ 부분에 선정된 길이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길 중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아산시에서 ‘차 없는 거리’로 운영 중이라 여유롭게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정류장 갤러리 옆에 6개월 뒤 수신인에게 편지를 전하는 빨간색 ‘사랑의 우체통’도 인기다. 

황금터널을 너머 극락으로 안내하는 길도 있다. 일주문부터 안양루와 석등,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길 자체가 ‘극락세계로 향하는 길’인 영주 부석사의 은행나무길이다. 매표소부터 일주문, 천왕문에 이르는 길에 깔리는 노랑 카펫을 밟으며 목탁이나 풍경소리 따라 무량수전에 다다르는 모든 순간순간이 극락이다.  

2,000여 그루가 길을 만든 홍천 은행나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