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김형우 소장

“고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2022-08-30     김남수

김형우 소장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뿐 아니라, 사찰에 소재한 현판과 시문을 발굴하고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 일가가 마니산 정수사 대웅전 후불탱화에 시주한 기록이 있다. 이건창 일가의 불교 인연을 알리고 있기도 하다. 강화도 특집을 준비하면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강화도는 양명학(陽明學)으로 이름난 곳이죠?

정제두(鄭齊斗, 1649~1736) 선생이 고향인 강화로 내려와서 제자를 길렀는데, 그들이 양명학을 공부했지요. 그래서 ‘강화학파’라고 이름이 생겼어요. 강화가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큰 지역이 아닌데, 이런 이름을 유지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유학을 중세적으로 해석한 것이 성리학이라면, 근세적으로 해석한 것이 양명학이죠. 강화학파 학자들은 성리학뿐 아니라 무속, 불교까지 포괄했던 열린 학문을 지향했죠. 이건창의 5대조가 정제두 선생 밑에서 수학하면서 이건창 역시 양명학에 심취했고, 강화학파 학자들이 대부분 양명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건창은 젊은 시절부터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강화 양명학을 계승한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창 일가의 불교와 관련된 기록은 정수사뿐 아니라 전등사에도 있다. 

전등사 대조루(對潮樓)를 중수한 후, 이를 기록한 시문을 이건창의 조부 이시원(李是遠)이 지었다. 이건창의 동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건승(李建昇)은 전등사 모연문에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증조부인 이충익은 마니산 자락에 절을 짓기도 했다.

 

봉천산에 ‘봉은사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는데, 사실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봉은사(奉恩寺)는 강화 천도 이전, 개경에 있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을 모신 곳이고 제사를 지냈죠. 연등회 행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즉, 고려라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된 사찰이었습니다. 개경에서도 궁궐 지척에 위치하고 있죠.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직후 봉은사도 옮겨 왔죠. 그런데 지금 봉천산에 있는 ‘봉은사지’는 궁궐과 거리가 멀어요. 그렇게 먼 곳에 봉은사를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집들을 헐어 봉은사 길을 넓혔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궁궐 지척에 있는 번화한 곳에 세웠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합니다.

‘봉(奉)씨들의 은혜를 갚은 곳’이라 해서 지금 봉은사지로 불리는 곳이 개경의 ‘봉은사’로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다만, 강화 궁궐 근처의 중요 사찰들의 위치가 불명확하기에 봉은사의 위치도 추정하지 못하고 있죠.

 

선원사(禪源寺)를 둘러싸고도 이야기들이 있는 듯합니다. 위치도 문제고, 과연 ‘팔만대장경을 조성한 곳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강화도가 간척이 많이 이루어진 곳이기에, ‘당시의 입지와는 다르다’는 지적도 있지만 위치는 맞는 듯합니다. 다만,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고 조성했느냐?’는 논란은 좀 있어요. 거란이 침입하고 초조대장경을 조성할 때, 이를 총괄하는 대장도감을 절에 세웠거든요. 팔만대장경을 주도한 사람이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崔瑀, 1166~1249)이고,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이었으니 선원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죠. 다만, 대장경을 선원사에서 혹은 강화도에서 모두 판각하고 ‘모든 대장경을 여기에 보관했느냐?’라는 문제는 남죠. 저는 ‘대장경 판각은 강화 이외의 여러 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고려가 개경으로 다시 환도한 이후, 강화도 사찰은 어떻게 됐나요?

개경에 있던 절들은 모두 개경으로 돌아갔지요. 하지만 본디 강화에 있던 절과 강화에서 창건된 절들은 계속 유지됐습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강화 북쪽뿐 아니라 마니산 근처에도 여러 사찰이 있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해인사 백련암에 계셨던 성철 스님 서고에 김시습의 ‘십현담요해 언해본’이 있고, 전등사에는 조선 전기 간행된 ‘묘법연화경 목판본’이 있습니다. 모두 정수사에서 간행된 거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강화도 사찰에서 이뤄진 고려시대 인쇄 시스템이 계승되고 있었던 거죠. 

고려시대 불교사를 전공한 김형우 소장은 대학 시절 강화도 답사를 수시로 다녔다고. 동국대 사학과 재학 시절, 동국대에서 강화도 학술조사를 시작하면서 사학과 답사는 무조건 강화도로 다녀야 했다. 덕분에 선원사를 무수히 다녔고, 이후 선원사 발굴조사를 할 때 조사원으로 함께했다. 안양대 강화캠퍼스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얼마 전 정년퇴직했다. 지금도 육지를 이어주는 강화도 다리를 건너올 때면, 대학 시절의 설렘이 있다고.

연구소에 가면 20여 년 동안 수집한 강화와 관련된 자료가 보관돼 있다. 책과 논문은 물론, 지도, 유물 조각, 심지어 강화를 소재로 노래한 LP판도 있다. 강좌와 책 읽기 모임도 수시로 개최된다. 강화를 연구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곳이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