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정족산성, 프랑스군을 물리치다

전등사에 남겨진 전쟁의 기록

2022-08-30     글. 김남수
사진 정승채

성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대비한 곳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전쟁이 정족산성과 전등사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전등사 대웅전 닫집 용머리와 기둥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근세 초 조선과 프랑스의 전쟁이 이곳 전등사에서 벌어졌고, 전쟁을 앞둔 조선 군인들은 자신의 이름이며 여러 글귀를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에 남겼다.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사옥을 빌미로 프랑스가 1866년 조선에 침공한 사건이다. 병인년에 서양 오랑캐(洋夷)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여러 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이 살해됐는데, 이것이 병인사옥이다. 프랑스 신부와 선교사 12명을 사로잡았고, 그중 9명이 살해됐다. 목숨을 구제한 리딜(Ridel) 신부가 청나라로 탈출하면서 알려졌다.

전등사 대웅전 닫집 용머리에 새겨진 글귀, 사진 유동영

그해 9월 18일(음력), 3척의 프랑스 군함이 강화 앞바다에 등장한다. 2척은 한강을 거슬러 정박했고, 9월 25일에는 난지도 앞까지 정찰하다가 퇴각한다. 정찰을 마친 프랑스 군대는 4척의 군함으로 10월 15일, 강화도 갑곶진으로 상륙해 강화성을 침공한다. 바다 건너 김포의 문수산을 점령해 한양과의 교통로도 차단한다.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가 10월 18일 김포에 도착한다. 양헌수는 주변 정찰 후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으로 들어가는 도하작전을 수립한다. 11월 7, 8일 이틀에 걸쳐 500여 명의 조선군이 바다를 건너 정족산성으로 들어간다. 이튿날 150여 명의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으로 몰려왔고, 정족산성 남문과 동문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이때 상황을 양헌수는 이렇게 기록한다. 

“적은 갑자기 포성을 듣고 마땅히 놀라 움직일 줄 알았는데 조금도 물러갈 뜻을 보이지 아니했다. 동료가 죽은 것을 보자 왼손으로 그 시체를 이끌고 가면서 오른손으로 총을 쏘아 대니, 절제의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우리가 쏜 총알은 불과 100여 보밖에 안 가는데, 적의 총 사정거리는 500보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총을 쏘는데 화승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총을 쏘았다. 쏘는 것도 신속했다. 한바탕 접전이 벌어졌다.

미시 초에 이르러 아군이 말하기를 ‘탄약이 다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일군(一軍)은 실색했으며, 나 또한 칼을 던지고 앉으니 정신이 혼몽하였다. 모두가 어쩔 줄 모르고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 적도 총 쏘기를 중지하고 퇴주하였다.” 
__ 양헌수, 『병인일기』 중

치열한 전투 후 프랑스군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했으며, 조선인 사망자는 4명 나왔다. 남문을 지키던 이춘일은 칼을 빼 프랑스군과 접전하다 피살됐고, 노인석과 조광보는 성에 다가서는 적에게 총을 쏘다가 전사했다.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11일 강화도 갑곶을 떠나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퇴각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많은 문서를 약탈했는데, 외규장각 문서가 대표적이다. 전등사 서적 역시 많이 약탈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을 눈앞에 둔 조선 병사들은 대웅전 곳곳에 이름을 남겼고, 정족산성 동문 안쪽에는 승리를 이끈 ‘양헌수 승전비’가 세워져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양헌수 승전비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