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전등사 회주 장윤 스님

“강화에서 나는 호박고구마와 떡국 먹어보셨어요?”

2022-08-30     김남수

전등사는 정족산성이다. 산성 안에 사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등사 자체가 산성이다. 여느 사찰이면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진입하지만, 전등사는 성문이 일주문을 대신한다. 그만큼 강화도 내에 벌어진 전쟁의 역사가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1966년, 열댓 살 넘은 스님 두 명이 깜깜한 밤에 전등사를 방문한다. 절에 부탁해 허기진 배를 주먹밥 하나로 버텼다. 아침 공양이 시작되기 전 대웅전 앞마당을 빗자루로 쓸며, 주지 스님으로부터 용돈을 얻었다. 그 돈으로 마지막 순례지였던 보문사를 참배하고 서울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장윤 스님의 전등사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시 인연이 맺어진 것은 1980년 10.27 법난 직후다. 노스님이었던 서운 스님과 함께 신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당시 동화사 재무 소임을 맡으며 노스님을 시봉할 때였다. 신군부는 동화사를 샅샅이 뒤졌으나 특별히 나올 게 없었다. 

서운 스님이 먼저 나갈 때 “나는 장윤 스님 없으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가요”하여, 조사실을 벗어났다. 서운 스님은 동화사를 떠나 전등사로 향했고, 장윤 스님은 1985년 11월부터 전등사 주지 소임을 맡기 시작했다. 그 후 40년 조금 모자란 시간을 전등사와 함께했다. 

“1980~1990년대만 하더라도 수학여행에, 소풍하러 오는 학생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일이었어요. 화장실 청소하고, 먹고 남은 도시락 치우는 게 일이었죠. 당시는 상수도가 개설되지 않았을 때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성문을 닫아 버렸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강화군수가 배수구로 들어와 싹싹 빌면서 상하수도가 해결됐습니다.”

그런 시절이었다. 한창일 때는 연인원 100만 명이 전등사를 찾았다. 요즘 강화도는 가볍게 오갈 수 있는 곳이 됐고 볼거리도 많지만, 그 시절 강화도를 찾는 사람은 무조건 전등사를 방문했다.

 

핫한 템플스테이와 현대미술

전등사는 템플스테이로 핫(hot)한 곳이 됐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공양간이다. 절에서 직접 재배한 농작물로 조리한다. 바다가 보이는 벽면을 유리로 마감해, 저녁이면 떨어지는 석양을 보면서 공양할 수 있는 사찰 공양간의 ‘성지’가 됐다. 

“전등사 템플스테이에서는 한 끼 발우공양과 아침에 대웅전 앞마당을 빗자루로 청소하는 프로그램을 꼭 진행합니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죠. 이분들이 앞으로 얼마나 자주 사찰을 방문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험은 평생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스님이 자랑하는 곳이 따로 있다. 바로 ‘전등각’과 ‘무설전’. 전등각(傳燈閣)은 한옥 다섯 채를 조성해, 조금은 여유로운 템플스테이와 사찰음식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각각 별채로 구성됐고, 진입로도 조그만 오솔길로 각각이다. 건물 평수도 제법 된다. 건물에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 눈에 띈다.

“요즈음은 가족 단위로, 혹은 개인 단위로 많이 여행하죠? 인천을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이나 가족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정족산성 동문 중턱에 위치해, 강화 앞바다는 물론이고 날 좋으면 북한산도 보여요.”

무설전(無說殿)은 불교미술의 현재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법당이라는 ‘오마주’는 있지만, 모든 것이 새롭다. 흰빛의 불상은 화려하지 않지만, 후불탱화와 더불어 또 다른 ‘아우라’를 낸다. 후불탱화는 전통적인 탱화 양식을 벗어나 프레스코(Fresco) 기법으로 조성했다. 프레스코 기법은 마르지 않은 회벽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실크로드에 산재한 석굴 사원,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등이 이 기법으로 조성돼 현대까지 남아 있다. 무설전 조성에는 이름난 작가와 장인들이 참여했다.  무설전에는 현대미술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다. 명칭은 노스님의 법명을 가져온 ‘서운갤러리’. 매년 신인 청년 작가 2명을 발굴해 전시하고, 현대미술전을 통해 우리 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전등사가 작품을 구매하는데, 지금까지 200점이 넘는다. 스님의 표현 그대로 전하면 “웬만한 국공립 미술관보다 많을걸요?”란다.

전등사 앞마당을 열심히 빗질한 인연인지, 주지로 부임해 전등사를 가꾸었다. 어린 시절 대웅전 앞마당을 쓸던 스님도 함께 왔다. 요사채가 두 개밖에 없어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공양할 공간도 없던 시절이다. 산 중턱에 있고, 성곽으로 둘러싸여 비만 오면 난리가 났다. 제일 시급했던 것이 배수로 설치. 대웅전, 대조루, 약사전, 명부전 빼고는 모든 것이 변했다. 

현재는 전등사 주지 소임을 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있다. 그래도 “미술전시관 하나는 있어야지?”라고 의중을 넌지시 보인다.

전통 한옥으로 조성된 전등각에서 사찰음식 체험을 할 수 있다. 다섯 채의 한옥에 진입로를 각각 뒀다.  

 

강화의 뿌리, 전등사

매년 봄이 되면 강화도 어르신들은 바빠진다.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화도 공설운동장에 모여 ‘게이트볼대회’를 진행한다. 강화군의 각 읍면과 동네별로 나뉜 120개 팀이 강화 게이트볼의 진정한 승자를 가린다. 

“장관이죠. 어르신들이 아침부터 약주를 드시며 하루 내내 들썩들썩합니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된 교동 어르신들이 강화 게이트볼의 강자입니다. 강화 전체가 섬이지만, 교동은 또 다른 섬이죠. 옛적에는 도박이 심한 동네였다고 해요. 게이트볼장이 생기면서 문화가 바뀌었다고 하죠?”

전등사가 식사나 교통편 등 모든 비용을 제공하면서 진행하는 행사가 ‘게이트볼대회’와 ‘이주민 축제’다. 이주민 축제는 강화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권 이주민까지 함께한다.

매년 10월 초에는 2주에 걸쳐 ‘삼랑성 역사문화축제’도 개최한다. 각종 전시, 어린이·청소년들을 위한 글짓기·그림대회, 호국영령 추모 영산대재 등을 개최하지만, 압권은 전등사 대웅전 마당에서 펼쳐지는 ‘음악회’로 코로나19 이전에는 8,000여 명이 참여했다고. 

“근대 강화도는 기독교가 들어 온 입구입니다. 교회 관련 유적도 남아 있죠. 아무래도 성공회, 감리교 등 기독교 세가 강해요. 하지만 전등사는 강화도의 뿌리에 해당하죠. 영농법인을 조성하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전등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죠. 게이트볼대회나 음악회를 할 때면 강화 전체가 들썩들썩합니다.”

스님은 조계종단에서의 역할이 컸다. 마지막으로 요즘은 어떤지 근황을 물었다.

“젊은 나이부터 중앙에서 활동했는데, 이제는 근방에 가지도 않습니다. 허허. 강화는 호박고구마가 이름났죠? 또 해풍에 견디는 채소, 강화도 쌀이 유명하죠. 우리 불광미디어 류지호 대표님하고 오랜만에 보니 좋네요. 강화도 쌀로 만든 떡국 먹어보지 않았죠? 한번 드시고 가세요.” 

“강화도는 근대 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였지만, 전등사는 강화도의 뿌리입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