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사찰을 건립하다

절박한 신앙의 공간, 강도江都의 사찰

2022-08-30     강호선
강화 선원사지

강도, 개경의 불교를 계승하다

1232년(고종 19) 음력 2월 고려 조정은 본격적으로 천도를 논의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몽골군이 개경성 밖에 진을 치고 흥왕사를 공격했고, 광주, 충주, 청주 등 남쪽으로 몽골군이 진격하며 전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 속에 도읍을 옮길 것인가 아니면 개성을 지킬 것인가를 두고 조정에서는 격렬한 논의가 이어졌고 음력 6월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결정했다. 

강화천도는 몽골과 계속 싸우겠다는 정책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당시 최고 권력자이던 최우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조정 내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진행됐다. 바로 다음 달인 음력 7월 6일 장대 같은 장맛비 속에 개경을 떠난 고종은 다음 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개경으로 환도하던 1270년(원종 11)까지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였다. 강화천도기 고려 사람들은 강화도를 강도(江都)라고 불렀고, 개경은 구도(舊都)라고 했다. 

강화도에는 도성에 필요한 여러 시설이 만들어졌다. 우선 궁궐과 성곽이 들어섰고, 관청과 절, 종묘도 지었다. 개경에서 들어온 관료들을 비롯한 피난민들도 각자의 살 집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강도는 떠나온 도읍 개경을 모델로 한 곳이었다. “구정(毬庭)과 궁전, 사사(寺社) 등의 이름은 모두 송도(松都, 개경)의 것을 따랐다. 팔관회, 연등회, 행향도량(行香道場)은 하나같이 옛 법식을 따랐다”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강도에는 개경과 같은 절이 세워졌고, 개경에서의 국가적인 불교의례도 그대로 개최하고자 했다. 강도를 운영하는 데 있어 실제 지형의 차이, 전시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개경의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에는 개경에서의 경험이 깊이 반영됐다. 강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은 개경을 잇고 있으며 왕정의 수도로서의 권위도 온전히 계승하고 있음을 표방했고, 이러한 모습은 사찰과 불교의례에서도 잘 드러났다.

『고려사』 권23 고종 21년 2월 14일 계미. “구정과 궁전, 사사 등의 이름은 모두 송도의 것을 따랐다”는 부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강도에 지은 여러 절

고려 조정은 천도 직후 궁궐과 성곽 등 주요 시설을 건설했다. 그중에는 봉은사가 포함돼 있었다. 개경의 봉은사는 태조진전이 있어 고려 조정과 왕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절이었다. 진전(眞殿)이란 선대 국왕이나 왕비의 초상화나 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며, 진전을 둔 절을 진전사원이라 한다. 고려에서는 광종이 아버지 태조 왕건의 진전사원으로 봉은사를 창건한 이래 국왕과 왕비의 진전사원을 운영했다. 특히 봉은사의 태조진전은 고려 국왕의 정통성 및 태조신앙과 관련해 각별한 의미가 있는 국가적인 성소였다.

매년 음력 2월 14~15일 이틀간 열리던 상원연등회는 고려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이틀간 개최되는 상원연등회에서 국왕이 봉은사 태조진전에 행차해 태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순서는 의식의 하이라이트였다. 고려의 상원연등회는 태조의 유훈인 훈요(訓要)에 따라 거행되는 국가의례로 태조를 기리며 국왕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의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강화도 천도 후 봉은사 건설은 다른 어떤 절보다도 우선될 수밖에 없었다. 

1234년(고종 21) 음력 2월 14일 강도로 천도한 이후 처음으로 상원연등회를 개최하면서 고종이 봉은사 태조진전으로 행차했다. 천도 이후 국왕의 첫 사찰 행차였다. 『고려사』에서는 강도에서의 봉은사 창건에 대해 이미 세상을 떠난, 차척(車倜)이라는 관료의 집을 봉은사로 삼고 왕이 행차할 수 있도록 민가를 철거해 길을 넓혔다고 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법왕사를 짓고 음력 11월 14일 중동팔관회일에 법왕사로 행차했다.  

환도 초기 고려의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인 상원연등회와 중동팔관회의 의례절차에서 꼭 필요한 절인 봉은사와 법왕사가 조성된 이래 현성사, 왕륜사, 묘통사, 복령사, 건성사, 외제석원, 묘지사, 흥국사, 자운사 등이 세워졌다. 모두 개경에 있던 절이었다. 다만 개경에 있던 주요 사찰을 전부 옮겨올 수는 없었던 상황에서, 일부 사찰만 선택됐고 절을 짓는 데도 오랜 기간이 걸렸다. 전쟁이라는 고종대의 현실이 반영돼 강도에는 개경에서 고종이 자주 행차하던 사찰, 전쟁과 관련된 불교의례가 열리던 절이 주로 조성됐다. 그래서 현화사나 국청사 같은 종파를 대표하는 사찰이나 역대 국왕의 진전사원 혹은 태조가 지은 절이라 할지라도 강도에 옮겨 짓지 않았다.

강화도 혈구사를 중창한 것도 강도 시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대 풍수가였던 백승현(白勝賢)의 주장에 따라 왕업을 연장하기 위해 원래부터 강화도에 있던 절인 혈구사를 크게 중창하고 밀교도량인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을 열었다. 이처럼 강도에 운영된 절은 국가와 왕실을 위한 도량으로 무엇보다도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불교의례를 개최하던 절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강도 사찰의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국왕을 능가하는 당대 최고 권력인 최씨 무인정권의 압도적인 위세를 보여주는 사찰이 강도에서 창건된 것도 주목된다. 개경에서 고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사찰을 강도로 옮겨왔듯이, 1249년(고종 36) 최우는 자신의 아버지 최충헌이 개경에서 중수했던 원찰 창복사를 강도에 다시 세웠다. 또한 이보다 앞서 1246년(고종 33)에는 자신의 원찰로 선원사를 새로 지었다. 이 두 사찰은 최씨 집안의 원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왕실 사원에 준하는 규모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최우가 죽자 창복사에는 최충헌의 진영을, 선원사에는 최우의 진영을 뒀는데 이때의 행사가 태조의 어진을 옮기는 것과 같았다고 할 정도로 이 두 절은 왕실의 진전사원을 능가했다. 또한 선원사는 수선사의 별원처럼 운영돼 강화천도기 최씨정권과 수선사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절로 강도의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금동탄생불, 고려시대, 전체높이25.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천 강화에서 출토된 가늘고 긴 신체가 특징인 고려시대 탄생불이다.

 

“계책이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 다만 기도할 뿐”

대몽항쟁기 고려 문인 최자(崔滋)가 강도의 번성함을 노래한 「삼도부」에는 강도의 불교신앙도 잘 나타나 있다. 불상을 만들고 경전을 간행하며, 곳곳에 많은 절이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데, 주목할 것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법회가 계속 열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몇 해 전 국난으로 군신이 더욱 거듭하여 간절하게 발원하며 여러 종파를 모아 하루건너 법회를 여니 염불하고 창신하는 소리 높아 산악이 진동하고, 정수리에 향불 올리고 소지공양하는 연기 흩어져 해와 달이 빛을 잃네. 정성과 고행이 이리 지극하니 보응과 가피가 헤아릴 수 없으리

국난의 상황에서 정성을 기울이면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바로 강도에서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이유이기도 했다. 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불보살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과 온 정성을 다해 대장경을 판각하면 완악한 오랑캐가 물러날 것이라는 믿음은,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대장경을 간행하는 국가적인 불사를 가능케 했던 원동력이었다. “계책이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니 다만 불우(사찰)와 신사에 기도할 뿐”이라는 1257년(고종 44) 고려 조정의 절박함은 대장경 간행뿐만 아니라 불교의례를 통해 몽골을 물리치고자 했던 신앙으로 표출됐다. 

강도로 옮겨 지은 사찰 대부분이 문두루도량(현성사), 마리지천도량(묘통사)을 비롯해 신중도량, 나한재(보제사), 제석도량(건성사), 담선법회(보제사) 등 전쟁기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법회들이 주로 열린 곳이었던 점은 대장경 간행과 함께 강화천도기 강도의 불교신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강도 시기 혈구사를 중창한 목적인 국운의 연장, 즉 연기는 결국 몽골과의 전쟁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기를 기원한 것이었다. 

밀교와 관련된 불교의례가 증가하고 강도 시기 이전에는 개최된 적이 없던 밀교의례가 열렸던 것도 불보살과 신중들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호국신앙의 발로였다. 이처럼 강도에서 운영된 사찰의 중요한 역할은 개경에서처럼 수도를 장엄하는 것이었으며, “우리나라는 태조 이래로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존해 왔으며 그 내밀한 보호로 나라를 연장해 왔다”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호법이 전제된 호국불교의 모습이 강도에서의 불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고려시대, 해인사 소장 
『1872년 지방지도』의 「강화부전도」. 조선 후기의 강화도 지도로 전등사, 적련사, 청련사, 백련사, 혈구사 등 조선 후기 사찰이 표시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강도 시기 주요 사찰은 어디에 있을까

강도에서 운영된 사찰은 한때 고려 국가불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몽골과의 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호국도량이었고, 국가와 왕실의 권위 및 정통성과 관련된 곳이기도 했으며, 실질적 권력자인 최씨가문의 권세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혈구사처럼 원래부터 강화도에 있던 절이나, 혹은 선원사처럼 천도 이후 처음으로 창건한 절은 조정이 개경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여전히 그 이름을 유지하며 강화도에 남아 있었다. 1290년(충렬왕 16) 카단[哈丹]이 이끄는 원의 반란군을 피해 충렬왕이 강화도로 피난해 선원사에 머물렀고, 여말선초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던 곳도 선원사였다. 그러나 봉은사나 흥국사처럼 원래 개경에 있던 절은 환도와 함께 개경에서 다시 절을 운영했고, 강화도에 남은 공간은 이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조선시대 지도나 지리지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강화도에 여러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강화도에는 전등사와 같은 오랜 연혁을 가진 전통사찰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본 강도 시절 강화도에 세워졌던 주요 사찰들은 조선시대의 자료에서조차도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고지도 등을 통해 조선시대 강도에 있었음이 확인되는 절은 고려시대 자료에서는 찾기 어렵다. 현재 고려시대의 주요 사찰이 있던 절터라고 알려진 곳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선원사지처럼 이미 발굴조사를 거쳐 사적으로 지정된 곳조차도 그 위치를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곳이 아닌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忠烈祠) 부근을 선원사지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점면 봉천산의 고려시대 절터를 봉은사지로 추정하고 있지만, 봉은사의 위상과 상원연등회를 생각해보면 궁궐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비해 법왕사는 고려시대의 문헌자료로 그 위치를 대략 추정할 수 있는데, 견자산 자락인 강화중학교 근처로 추정하고 있다. 향후 발굴조사를 통한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돼 사찰이 도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고려시대, 강도에 만들어진 사찰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면 강도 시기 불교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강호선
성신여대 사학과 부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고려말 나옹혜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조선 전기 불교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고려시대 국가의례로서의 불교의례 설행과 그 정치적 의미」, 「13세기 강도(江都) 및 개경(開京)의 사찰 운영」, 「고려불교사에서의 구산선문 개념 검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