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재에 생명을 불어넣자

풍경소리

2007-09-17     관리자

금연 정축년은 불교가 공식적으로 우리 나라에 전래된 지 1천 6백 25년째가 되는 해이다.
그 사이 불교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를 거치는 근 천 년 동안 국교의 자리 를 지키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고 조선왕조 5백년 동안에 비록 박해를 받 았었다 해도 신앙의 구심점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천육백여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신심있는 불제자들의 발원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들이 세워지고 그 절들을 중심으로 예배 대상인 불보살상과 나한상, 신중상 등 여러 성상(聖像)들이 조각 이나 그림으로 조성 봉안되어 왔다.
뿐만아니라 교조 석가세존의 영골사리(靈骨舍利)를 모셔다가 절마다 탑을 세우고 국사나 왕 사로 일국의 존경을 한 몸에 모으던 고승대덕들의 사리를 나누어 인연 있는 곳마다 부도(浮屠)를 해 세우며 그 행적을 밝히는 탑비(塔碑)를 새겨 놓기도 하였었다. 어디 그뿐이랴! 절을 세울 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성상을 새겨 예배 공양할 만한 신령스 런 곳이라면 문득 깊은 산 바위 벽에도 불보살상을 새겨 내고, 오가는 길손들의 안녕을 지 키기 위해서는 큰길이나 후미진 길가에 불보살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으며, 땅기운의 부 족을 메우기 위해서는 동구 밖이나 마을 가운데에도 탑을 세워 예배 공양하였었다.
그러니 우리 국토 어디를 가나 성보가 없는 곳이 없었고 그런 성보들은 그 고장 사람들의 예배 공양 대상이 되어 각 고장의 자랑거리로 지켜져 왔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륙과 바다로 부터 가끔씩 몰아닥치는 거대한 외적의 침입을 받아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성보의 힘을 빌려 이를 퇴치하려는 간절한 신앙심이 한데 뭉쳐 이를 물리쳐 내곤 하였었는데 오히려 이런 사실이 외적들에게 알려짐으로써 전 세계를 석권하던 몽고족의 침입에서 부터는 성보의 파괴가 저 들의 일차 목표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황룡사 구층탑과 부인사 팔만대장경판이 불살라 지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의 성보들이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여기서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더욱더 견고한 신앙심으로 더 훌륭 한 성보를 조성해 내어 그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내려 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해 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의 조성이었다. 그런 굳건한 신앙심을 온 국민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말발굽 아래 짓밟아 세계 대제국을 이룩하였던 원(元) 제국 시대에도 고려는 국토를 잃지 않았고 왕통(王統)도 끊기지 않았었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열등한 저들을 불교문화로 역정복하기 시작하였으니 감지(甘紙) 나 상지(橡紙)에 금자(金字)나 은자(銀字)로 불경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과 불화(佛畵)제작 이나 불보살상 및 성상의 조성을 고려인들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도맡아 해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끝내 고려탑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 각 탑 양식을 혼합한 경천사(敬天寺) 13층 탑과 같은 새로운 양식의 탑을 조성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면서 억불 정책을 강행해 나가게 되자 천년의 영 화를 누려 온 불교 사찰들은 일부 산중의 명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도시와 마을에 있던 수많은 사찰들이 폐사가 되어 국가 소유로 넘어가게 되니 그곳에 봉안 되었던 성보들은 그대로 방치되거나 명맥을 유지한 산중사찰로 옮겨지는 일대 수난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섬나라 일본의 거국적인 대침략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임진왜란이다. 화란을 통해 서양의 신식병기인 총포를 받아들여 전국을 통일한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 대륙 진출 을 외치며 침입해 들어 온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유림(儒林)과 승군(僧軍)의 활발한 의병활동과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해전으 로 침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소득 없는 침략에 대한 분풀이로 다시 한 번 힘을 기울여 침입 해 들어오게 되니 이것이 정유재란이였다. 이 때 이들은 이순신 장군을 조정과 이간시켜 수 군통제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한 뒤였으므로 조선의 수군을 제압하여 서남해 로 침입해 들어오니 경상.전라. 충청의 하삼도가 모두 이들의 침략에 더럽혀 지게 되었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의 재기용에 따른 해전의 승리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으로 저들 의 재침은 평택 평야에서 저지되지만 이 때 저들의 발길이 스쳐간 지역에서는 우리문화유 산, 그 중에서도 불교문화유산들이 혹독한 피해를 입게 된다.
동래 범어사, 양산통도사, 경주 불국사, 기림사, 분황사, 대구 동화사, 김천직지사, 순천 송광 사, 선암사, 구례 화엄사, 천은사, 전주 금산사, 귀신사, 공주 갑사, 신원사 등의 대찰들이 모 두 이때 불살라졌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가 합심하여 대소사찰들을 복원해 내면서 훌륭한 성보들을 다시 조성 봉안해 놓는데 특히 조선 고유색을 한껏 발휘하면서 후기 문화절정기를 자랑하던 진경시대(眞景時代,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120년간)에는 단정하고 전아한 특색을 보이는 조선 고유색 짙은 성상들이 많이 만들어 진 다.
그런데 명치유신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갑자기 부강해진 일본이 서구 열강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우리를 다시 침략해 들어오니 5백년 왕통을 지켜 오면서 노쇠할 대로 노회해진 조선왕조는 저들에 의해 멸망당하여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와중에 우리 불 교문화재는 다시 한 번 파괴고 약탈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는데 경천사 13층탑이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되돌아 왔다든지 석굴암 감실 안에 안치되었던 성상 2구가 일본으로 반출된 뒤 행방이 묘연해 진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문화재 보호정책이라는 미명아래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불교문화재들 을 총독부 박물관으로 몰수해 들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으니 총독부 박물관과 그것이 들어 서 있던 경복궁 뜰 안에 성보문화재들이 집중적으로 옮겨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몇 백년 혹은 천수백 년 동안 예배 대상으로 공경, 공양되어 오던 성보문화재들은 일조에 생명을 잃고 한낱 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전락하여 세속인들의 완상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광복 후 반백 년이 지나서 다행히 '문화유산의 해'를 맞게 되었으니 우리 불제자들은 마땅히 이런 생명 잃은 성보문화재들에게 다시 숨결을 불어넣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성보를 성보의 자리로 모셔 예배 공양하는 것이 우리 불제자들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의무이 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