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습니다] 풀의 연대

2022-09-30     윤남진

어제 풀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모양도 모르고 색깔도 모르던 풀들이 살아 올라옵니다. 2년 전엔 엉겅퀴가 만발했습니다. 엉겅퀴는 꽃부터 뿌리까지 남길 것 없는 산약초라 뿌리부터 모두 뽑아 약재로 말렸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몰라도 다음 해엔 엉겅퀴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태가 지난 다음 엉겅퀴가 군락을 이루었습니다. 엉겅퀴 포자가 날려서 그리된 것은 아닙니다. 꽃이 피기 전에 엉겅퀴를 제거했으니까요. 그래도 엉겅퀴는 한 해를 건너서 다음 해에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그것도 군락으로 말입니다.

작년 가을에 오디나무 밑을 깔끔하게 예초기로 잘랐습니다. 그런데 올봄에 우수수 이름을 알 수 없는 덩굴풀들이 바닥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처음 보는 덩굴 식물입니다. 어른들의 의견을 들어 경사진 산에 음나무를 심었습니다. 생명력이 강한지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나무가 대세를 장악할 때까지 주변 잡목과 풀을 깎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의 1만m2에 달하는 비탈진 산을 타면서 풀을 쳐야 합니다. 

 

풀의 예의 혹은 블루오션 전략

풀들을 보면 서로 마주하는 규칙 혹은 예의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음나무가 자라나는 곳에는 가시가 달린 풀들이 솟아납니다. 칡넝쿨이 자라는 곳에는 며느리밑씻개가 곁을 두고 자랍니다. 지난해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비름나물이 올해는 정말 무성한 군락을 이루었습니다. 그 연유를 따지고 들어가 보니 들깨 모가 자라는 것을 닮아서 이때다 싶어 싹을 틔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유사한 모습을 띠고 싹을 틔우는 것도 있지만 기왕에 자리를 장악한 풀들의 틈새에 살 자리를 만드는 풀도 있습니다. 억새로 꽉 찬 숲에 엉겅퀴가 자랍니다. 억새의 관용일까요? 아니면 엉겅퀴가 경쟁에서 자기 위치를 확보한 승리일까요? 아마도 억새의 관용일 가능성이 큽니다. 풀은 독점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풀은 다양하게 존재해야 생존력이 높습니다. 풀을 매는 처지의 한 인간이라도 그렇습니다. 모든 풀을 싹쓸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큰 풀부터 잡고 보자, 그리고 작은 풀은 쓱쓱 긁어서 기만 죽이자 하는 태세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용을 써봐도 그래도 풀은 잡히지 않습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는 씨앗들이 무수하게 많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풀들이 가장 다루기 어렵습니다. 정말 얼굴도 모르는 풀들이 어느 봄날 솟아납니다. 한 3년 전부터는 못 보던 풀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풀들이 이 새로 솟아나려는 풀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정말 공교롭게도 풀들이 자라고 생장하는 서로의 자리는 기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올해는 들깨 모를 뿌린 탓에 들깨와 닮은 비름나물이 무성하게 나서 정말 실컷 뜯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들깨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군요. 

풀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세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비슷한 것끼리 서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칡넝쿨이 나려고 하면 다른 넝쿨 식물도 덩달아 나고, 잎이 비슷한 식물들이 함께 솟아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다음은 틈새 채우기입니다. 이른바 블루오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전략은 풀들에게는 서로 용인해 주는, 이른바 관용하는 그런 동료들 사이에 끼어야 하겠지요. 세 번째 제일 중요한 것은 숨죽이고 기다리기입니다. 풀은 그 시작이 씨앗입니다. 씨앗이 눈을 틔워야 풀이 됩니다. 씨앗의 생명이 풀의 생명입니다. 

 

생존이 아닌 이타행

풀의 생명을 사람의 삶에 비추어봅니다. 사람도 유유상종합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가까이 사귑니다. 사람도 경쟁의 상황에서 치열한 경쟁이 없는 빈 곳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웅지(雄志, 웅대한 뜻)를 품고 고난을 무던히 견뎌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는 풀들과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풀들은 관계를 기회나 계기로 고정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풀들이 상대방을 주체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대응하는 것은 유일하게 씨앗으로 땅속에 숨죽이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관계를 고정되지 않는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이렇게 저렇게 조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의 중심이, 관계의 이유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일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그 관계를 조직하는 장의 중심을 양심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양심을 넘어 보리심으로. 양심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양심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결판할 일입니다. 보리심은 방향성, 지향성이 뚜렷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공표된 방향입니다. 모두가 알고 서로 그리해 보자고 할 수 있는 그런 지향입니다. 보리심은 이를테면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이라는 말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을 삶에서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풀들이 서로 도반이 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이타행을 위해서 경쟁하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오늘 장맛비에 또다시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풀들은 끊임없이 자라날 것입니다. 

 

윤남진
동국대를 나와 1994년 종단개혁 바로 전 불교사회단체로 사회 첫발을 디뎠다. 개혁종단 순항 시기 조계종 종무원으로 일했고, 불교시민사회단체 창립 멤버로 10년간 몸담았다. 이후 산골로 내려와 조용히 소요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