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가 된 별님, 북두칠성] 조선 사람들 별을 관측하다

군주의 하늘, 예제禮制의 하늘, 백성의 하늘

2022-07-26     유현주

他鄕逢七夕 把酒且長歌 天上佳期至 人間樂事多
타향에서 칠석을 만나 술잔 들고 긴 소리로 노래하누나.
하늘 위 아름다운 기일이 옴에 인간 세상 즐거운 일 많기도 하네.
_ 「칠석연구십이운(七夕聯句十二韻)」, 김성일, 『학봉선생문집』 권2

마지막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본 때가 언제인가. 밤하늘은 언젠가부터 잊혀진 존재가 됐다. 인간에게 하늘이 좀 더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다. 어제와 오늘의 하늘이 다름을 알고 그 속에서 시간을 헤아리며 인간 세상 너머의 무엇인가를 그리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얼마 전 이야기다. 그때 별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제왕학으로서의 동아시아 천문전통

‘천문(天文)’은 하늘에 새겨진 무늬인 일월성신과 천체 현상에 대한 이야기다. 동아시아 전통시대에서 하늘을 살펴 그 뜻을 받들고 별들의 운행을 헤아려 시간 규범을 반포하는 일은 천명(天命)을 부여받은 천자(天子)의 일이었다. 즉 동양의 천문학은 제왕학의 으뜸으로 군주의 의무이자 천자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관점의 동아시아 천문전통에서는 독자적인 별과 별자리 체계를 구축했다. 또한 별의 관측을 바탕으로 시간 규범을 세우는 역법(曆法) 분야를 개발했으며, 천상(天象)을 해석하는 상서재이학(祥瑞災異學)이 발달했다. 

삼원(三垣) 이십팔수(二十八宿)는 동양천문을 대표하는 별자리 형식이다. ‘원(垣)’은 담장이라는 의미로, 삼원은 하늘에서 별들이 모여 있는 세 곳의 구역인 자미원(紫微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을 일컫는 말이다. 자미원은 황궁(皇宮)의 상징으로 천제(天帝) 별인 북극성과 황후·후궁·태자와 이들을 호위하는 신하 별들이 위치한 곳이다. 태미원은 정부(政府)를 의미해 그곳의 별들은 제후·삼공과 같은 고위 관직명으로 불렸다. 천시원은 제후들의 도시라는 뜻으로 별들의 이름도 각 지방 제후나 국명으로 붙여졌다. 

하늘의 적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28개의 별자리를 이십팔수라고 하는데 동서남북의 네 방위마다 일곱 별자리가 배정됐다. 중국의 진한시대에는 이들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동방칠수의 청룡, 북방칠수의 현무, 서방칠수의 백호, 남방칠수의 주작 개념이 등장해 2,000년 이상 동아시아의 방위 수호신으로 견고한 위상을 유지했다. 

이 별들과 별자리의 운행을 살펴 시간 규범을 세우는 역법은 동양천문의 핵심이 된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해와 달, 오행성의 운행을 관측해 좀 더 정밀한 시간체계를 얻기 위해 왕조시대 동안 국가 차원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전통시대 천문 해석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분야는 천문재이학(天文災異學)이다. 전근대시대에서는 자연 현상, 특히 천체의 변화를 하늘이 인간 사회의 선악과 과오를 견책하는 증거로 이해했다. 성군(聖君)의 시대에는 하늘이 상서로운 일로 화답하고, 군주가 나쁜 정치를 베풀 때는 재이(災異, 괴이한 재앙)로써 이를 나무란다는 것이다. 특히 해와 달이 사라지는 일식·월식과 느닷없는 혜성의 출몰을 하늘의 직접적인 메시지로 여겨서 이에 대한 정확한 예보는 역사시대 내내 국가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사진 1. 『천상열차분야지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 1395년(태조 4)에 제작된 석각 천문도로 우리나라 하늘 전체에서 관측되는 1,467개의 별이 기록돼 있다. 이 유물은 석각으로 제작됐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거의 그대로 목판에 양각해 먹으로 찍은 것이다. 
사진 2. 『천상열차분야지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숙종대에 만들어진 천문도를 탁본한 것이다. 태조대에 만들어진 석각 천문도의 연대가 오래돼 오차가 생기자 숙종대에 새롭게 관측해 오차를 교정한 뒤 신법 천문도를 만들었다.

우리 하늘의 기록 『천상열차분야지도』

우리의 천문전통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로 『천상열차분야지도』(사진 1, 2)를 들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1395년(태조 4)에 제작된 석각 천문도로 우리나라 하늘 전체에서 관측되는 1,467개의 별이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1247년 제작된 중국의 『소주천문도(蘇州天文圖)』(사진 3) 역시 동양의 대표적 석각 천문도로 거론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의 천문도와 여러 차이점이 있다. 기록된 별의 수도 더 많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별의 밝기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새겨 놓았다는 점으로 관측·제작의 정밀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천문도의 유래, 세차운동(회전축이 변하는 운동)으로 이동한 별의 위치, 우리 고유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현존하는 석각본 유물로는 태조본(국보)과 숙종본(보물)이 있으며 여러 탁본과 필사본이 전해진다. 검은 하늘에 반짝이는 노란 별들과 푸른 은하수가 표현된 채색 탁본들은 정교한 과학 유물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우리 하늘의 기록이다. 

사진 3. 중국의 『소주천문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1247년 제작된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 천문도.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라고도 불린다. 1,440개의 별과 중국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가 모두 새겨져 있다.

조선 사람들은 하늘을 어떻게 관측했을까?

전통시대 천문관측 상황은 조선의 각종 천문의기(천체 관측기기)와 유적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세종대 이후로 궁궐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했다. 간의대는 상단부가 넓은 탑과 같은 형식의 관측대로서, 그 상단과 주변에 간의·규표와 같은 관측기구들을 설치해 천문관측을 수행했다. 간의(簡儀)는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천문관측 기구다. 간의를 제작하기 전에는 혼천의(渾天儀)(사진 4)를 사용했는데, ‘혼천’은 둥근 하늘이라는 뜻이다.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천체 위치 측정기구로 이를 통해 시간과 절기(날짜)를 측정할 수 있다.

사진 4. 혼천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혼천의, 〈동궐도〉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혼천의의 기능이 많아지고 구조가 복잡해지자, 그중 핵심 기능만을 취해 반복되는 일상적 관측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든 기구가 ‘간의’(사진 5)다. 세종시대에는 거극도(去極度, 하늘의 북극으로부터 천체까지의 각도)와 입수도(入宿度, 28수 기준별로부터 적도를 따라 동쪽 방향 천체까지의 각)를 측정해 천체의 위치를 파악했다. 

사진 5. 복원한 간의, 사진 궁능유적본부 세종대왕유적관리소
간의는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천문 관측기기로서 1432년(세종 14)에 만들어졌다. 사진은 여주 영릉(세종왕릉)에 있는 1997년 문헌을 바탕으로 복원한 간의. 

먼저 간의의 밑받침을 남북 방향에 맞춰 설치하고, 홈에 물을 채워 수평을 잡는다. 간의의 둥근 부품 중 정극환을 조정해 북극 방향을 맞춘 후 규형·사유환·계형 등의 부품을 남북과 동서로 움직여 천체를 조준하고, 부품에 표시된 눈금을 읽어 거극도와 입수도를 측정한다. 이와 같은 천체 관측은 민간에서도 이뤄졌다. 우암 송시열의 혼천의가 그 대표적인 유물이다. 

창경궁 관천대(보물), 사진 문화재청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다. 현재 서울에는 창경궁 안에 있는 관천대와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종로 계동에 있는 관천대 2개가 남아 있다.
창경궁 관천대, 〈동궐도〉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 1688년(숙종 14)에 만들어진 관천대(觀天臺)다. 석대 위에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했다고 한다.

국가차원의 천문학 관련 기구는 관상감(觀象監)이었다. 관상감의 주요 업무는 천문·기상 관측과 역서(曆書)를 발간하는 일, 각종 의례와 관련한 시간·기상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서운관지(書雲觀志)』(1818)에는 관상감의 활동과 관련한 구체적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그 가운데 「번규(番規)」 편에서 직원들의 근무 규정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관상감에는 천문학 분야 3명, 명과학 1명, 지리학 1명의 관원이 상시 근무했다. 이 중 관측과 관련한 천문·명(命)과학은 24시간 근무하는데 시간을 나눠 돌아가며 관측했다. 지리학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했고, 모든 인원은 사흘이 지나면 교대했다. 

관측한 내용은 규정된 양식에 따라 「풍운기(風雲記)」라는 보고서로 작성했다. 이를 살펴보면 오전·오후와 밤사이(1경~5경) 7개의 시간 구간[更]마다 관측 사항을 적고, 햇무리와 같은 특정 기상현상은 그림으로 그려 넣었으며 담당자의 서명을 병기해 그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다. 

『서운관지』에는 긴급하게 보고해야 할 천문 현상을 규정해 뒀는데 해와 달과 관련한 이상 현상, 지진, 혜성 등의 현상은 관측되자마자 즉시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특히 객성(客星, 일시적으로 새로 관측되는 별), 혜성(彗星), 패성(孛星, 꼬리가 분명치 않거나 없는 혜성), 치우기(蚩尤旗, 깃발이 나부끼듯 꼬리가 구부러진 혜성) 등의 특이한 천체 현상이 관측되면 관상감은 그야말로 비상이 걸린다. 

천문학의 당상관 이하 모든 관원이 모여 관측 사항에 대해 토론한 후, 책임자인 영사(領事, 주요 관서의 정1품 관직)와 제조(提調, 조선시대 잡무 및 기술계통의 관직)에게 알리며 임금의 허가를 받아 전담팀을 구성해 성변(星變, 별의 변화)이 사라질 때까지 특별근무체제에 들어간다. 해당 천체 현상이 소멸할 즈음에도 처음처럼 천문학 분야 모든 관리가 출동해 회의를 하고 소멸한 것을 확인한 후 임금에게 보고하고 일상체제로 돌아간다. 선조 때 천강(天江, 뱀주인자리의 일부)에 객성의 출현을 관측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1904년 10월부터 장장 7개월 동안 기록된 이 초신성은 서양에서는 케플러 초신성으로 알려져 있다.  

 

군주의 하늘, 백성의 하늘

하늘의 별을 읽고자 했던 것은 군주와 위정자만이 아니었다. 백성의 하늘 역시 무진하게 펼쳐졌다. 우리 옛사람들이 가장 주목했던 별은 무엇일까? 아마도 북두칠성과 그에 대응하는 남두육성, 그리고 노인성일 것이다.

북두칠성은 북극성 부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별자리로 국자 모양을 하여 두(斗)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남쪽 하늘에는 여섯 개의 별로 이루어진 남두육성이 떠오른다. 위진시대 신선도교의 천문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수신기(搜神記)』 권3에는 “남두가 생을 주관하고, 북두가 죽음을 주관한다(南斗注生, 北斗注死)”는 기록이 나온다. 북두칠성이 사후 세계를, 남두육성이 현세의 연수(延壽)를 담당한다는 성수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사진 6. 북두칠성이 그려진 북한 강서구역 덕흥리벽화분 북쪽 천장,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원

 

사진 7. 남두육성이 그려진 북한 강서구역 덕흥리벽화분 남쪽 천장,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원

이처럼 남북의 하늘을 대표하는 별자리로 남두와 북두가 짝을 이룬다는 관념은 삶과 죽음, 남자와 여자와 같이 대칭을 이루는 대상과 연결되곤 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직녀 그림으로 유명한 덕흥리 고분의 북쪽 천장에는 북두칠성(사진 6)이, 남쪽에는 남두육성(사진 7)이 그려져 있다. 또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8~9세기 무렵 석관의 뚜껑에는 나란히 누운 부부의 머리 위로 달과 해, 남두와 북두가 이들을 비추는 듯이 조각돼 있다.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납석제 남녀합장상(석조부부조각장식관)(사진 8)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두육성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북두칠성의 인기는 점차 높아져 조선 후기에 이르면 각종 칠성민속이 성행하게 된다. 

사진 8. 납석제 남녀합장상(蠟石製 男女合葬像), 8~9세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통일신라시대 사리함 뚜껑 부분에 새겨진 조각으로 남녀 머리맡에 있는 동그라미는 각각 해와 달을 의미한다. 왼쪽에는 북두칠성이, 오른쪽에는 남두육성이 새겨져 있다. 

칠성과 함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또 다른 별은 노인성(남극노인성)이다. 고려 왕실에서도 노인성에 대한 제사의례를 설행할 정도로 중요시했다. 추분 무렵의 아침과 춘분 무렵의 저녁에 떠오르는 노인성은 무척 밝은 별이지만 적도 이남에 위치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남해안이나 제주도 등지에서나 관측할 수 있다. 일상적인 관측이 어려웠기에 별이 나타나면 매우 경사스럽게 여기고, 별을 보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 이 별을 인격화해 그린 민화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민화에서 노인성은 장수를 담당하는 별답게 머리가 우뚝 솟은 할아버지 모습으로 그려진다. 

<극채남극노인도>,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소장

우리의 역사 속에는 여러 개의 하늘이 보인다. 천체의 법칙을 헤아려 시간 규범을 세우려 했던 군주의 하늘과, 우주적 질서(cosmology)를 의례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예제(禮制)의 하늘, 그리고 인간의 삶과 그 너머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백성의 하늘도 제각기 찬란히 빛을 냈다. 별처럼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이야기와 희망을 밤하늘에 써 내려갔다. 오늘 밤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보며 나의 하늘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유현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려사』 「예지(禮志)」 가례(嘉禮)를 통해 본 고려시대 국속(國俗)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암각화와 바위신앙, 의례상징과 민속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