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가 된 별님, 북두칠성] 불화로 살펴본 칠성신앙

점성에서 불교의 신앙으로

2022-07-26     정진희

깊은 밤 북쪽 하늘에 국자 모양의 7개 별을 일러 북두칠성이라 한다. 우리는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고, 칠성판(七星板, 시신 밑에 까는 북두칠성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나무판) 위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칠성님께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인간의 길흉화복과 생명줄까지 모두 칠성님이 주관한다고 믿었기에 절집에서는 일곱 별을 그려 칠성각에 모셨다. 

불화의 명칭은 화면에 그려진 중심이 되는 존격에 따라 정해진다. 따라서 북극성을 인격화한 치성광여래를 본존으로 모신 칠성도의 학술 명칭은 ‘치성광여래도(熾盛光如來圖)’라고 해야 옳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그 기도에 응하는 대상은 북두칠성이기에 이 불화는 ‘칠성도(七星圖)’라고 불려왔다. 

흔히 절집 칠성신앙이 도교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도불 신앙이 혼습된 조선 후기 이후의 사정이다. 신앙의 변화에 따라 그림의 구성요소가 더해지고 빠지는 특징을 보이는 칠성도를 통해 세월에 따라 변화한 사찰의 칠성신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치성광여래, 구요신앙과 북극성 신앙의 결합

현존하는 칠성도의 제작 시기는 대부분 19세기 중후반 이후로 편중돼 있다. 극히 짧은 기간이지만 현존하는 불화의 총 수량에 있어서는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아 칠성신앙에 관한 대중적 호응을 실감할 수 있다. 수룡당 기전(繡龍堂 琪銓)이 그린 <해인사 길상암 치성광여래회도>(그림 1)는 우리가 알고 있는 칠성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림 1. <해인사 길상암 치성광여래회도>, 1874, 견본채색, 해인사 길상암 소장

그림의 중앙 수미단 위 연화대좌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치성광여래는 ‘금륜불정치성광여래’라는 이름에 걸맞게 금륜(金輪)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다. 단상의 좌우로는 일월(日月) 표식이 관에 그려진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여래와 보살 좌우로는 화면 위에서부터 칠성여래와 수성노인을 비롯해 동서남북 각각 일곱 별자리를 나타내는 28수가 있다. 그 아래의 삼태성, 자미대제, 칠원성군 등 그림에 그려진 모든 이들은 별을 인격화해 나타낸 형상들이다. 칠성도에 이렇게 많은 성신이 등장하는 까닭은 길고 긴 세월 동안 변화한 절집의 성수(星宿)신앙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칠성 불화의 뿌리는 그림에서 가장 높은 존격으로 자리한 치성광여래라는 부처에서 찾을 수 있다.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나타내는 부처로 서양의 점성신앙과 중국의 북극성 신앙이 만나 생겨난 부처님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탄생해 그리스에서 다시 인도로 전파되면서 아홉 개의 별로 인간사를 풀이하는 구요(九曜)신앙으로 발전한다. ‘구요(九曜)’는 일·월·화·수·목·금·토성과 더불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별인 ‘나후(羅睺)’와 ‘계도(計都)’를 합친 아홉 행성을 말한다.

우리에게 구요는 생소한 별이지만 고려의 왕건은 아홉 별을 모신 전각인 구요당(九曜堂)을 924년 창건해 독립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을 만큼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별들이었다. 흔히 우리가 쓰는 ‘직성이 풀린다’라는 말은 황도12궁 별자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본명(本命, 타고난 명)을 주재하는 이 아홉 별[九曜]에 기도를 올려 악운을 길운으로 풀어냈던 직성(直星) 신앙에서 유래한다. 북두칠성이 12간지(干支)에 따라 인간의 운명을 다스린다는 북두본명(北斗本命) 신앙도 구요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구요는 밀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으로 들어온다. 이때 지역적인 특성을 반영해 북극성과 결합한 치성광여래 신앙으로 변모한다. 밤하늘의 황제 북극성을 의미하는 치성광여래를 모시고 진행되는 밀교 의례였던 ‘치성광법식’은 원래는 중국 황제의 본명소재(本命消災, 재앙을 없애고 복덕을 성취함)를 위한 의례였지만 점차 대중에게도 전파돼 다가올 악운을 길운으로 바꿀 수 있는 예방의식으로 자리 잡아 갔다. 

돈황에서 발견된 897년 그려진 <치성광여래와 오성도>(그림 2)는 치성광여래와 별을 주제로 그린 불화로 인도에서 전래된 구요와 북극성 신앙이 혼합하는 과정을 잘 나타낸다. 그림 속 치성광여래가 구요(아홉 별)가 아닌 금·목·수·화·토성을 나타내는 다섯 인물과 함께 있는 까닭은 중국인들에게 오행(五行)을 의미하는 다섯 별이 낯선 구요보다 더 친숙하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치성광여래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는 모습은 국자처럼 생긴 북두칠성을 북극성이 마차처럼 타고 천공을 순회하는 것으로 여겼던 전통사상에 기인한다.

그림 2. <치성광여래와 오성도>, 897, 견본채색, 영국박물관 소장

 

치성광여래도의 ‘소재보살’과 ‘식재보살’

9세기 중반 한반도로 전해진 치성광여래 신앙은 민중들이 호응했던 북두칠성 신앙과 합해져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불화를 탄생시켰다. 고려에서 치성광여래 신앙은 재난을 예방하는 법회인 소재도량(消災道場)으로 전승됐다. 후대에 평가하기를 소재도량은 조그마한 일이 생겨도 도량을 개설할 만큼 팔관회, 연등회 다음으로 호응이 높았던 불교 도량이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치성광여래 강림도>(그림 3)는 고려의 치성광여래 신앙을 나타낸 유일한 불화다. 화면 상부에는 도상의 기원이 서양 점성신앙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12궁 별자리가 있다. 화면에 소를 타고 강림하는 치성광여래 주위에는 재해를 소멸하고 고난에서 구원하는 소재(消災)보살과 식재(息災)보살이 함께하고 이를 중심으로 구요를 비롯한 28수, 남두육성 등을 나타내는 인격화된 성수신이 있다. 

그림 3. <치성광여래 강림도>, 13세기 말~14세기 초, 견본채색,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소재보살과 식재보살은 우리나라 치성광여래 도상에서만 볼 수 있는 협시보살이다. 신앙이 약사신앙과 유사한 성격을 띠게 되면서 ‘일광편조(日光遍照)소재보살’, ‘월광편조(月光遍照)식재보살’이라는 명칭으로 조선 후기에 바뀐다. 

그림 4. 북두칠성과 보필성, <치성광여래 강림도> 부분

고려 치성광여래도는 북두칠성이 그려진 가장 오래된 불화다. 비슷한 시기 중국과 일본 치성광여래도상에 보이지 않는 북두칠성이 고려의 불화에 등장하는 까닭은 북두칠성을 향한 우리 민족의 애정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향 우측 위로 구름을 타고 강림하는 소형의 인물 9인(그림 4)은 보필성(輔弼星)과 함께 있는 북두칠성을 나타낸 것이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안료가 박락돼 스님과 같은 머리 형태지만 “태일전에서 칠성과 제숙(諸宿)을 제사 지내는데, 그 상은 모두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 모양이었다”라고 한 성현(成俔, 1439~1504)의 말처럼 조선 전기까지 칠성은 머리카락이 긴 형상들로 나타난다. 화면에서 칠성은 치성광여래와 구요 등과 함께하는 중심 무리에 들지 못하고 그 뒤를 따르는 작은 집단으로 그려졌다. 이는 고려의 치성광여래 신앙에서 칠성은 구요보다 그 비중이 작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천재지변이나 국가 차원의 재앙 소재에 목적을 둔 고려의 소재도량은 나라의 지원을 받으면서 개설됐지만,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그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때문에 불교 교단에서는 신앙의 목적을 개인의 연수(延壽)와 기복에 뒀는데, 이는 대중에게 친숙한 북두칠성이 주재하는 운명이었다. 목숨 줄과 관련 있는 칠성신앙은 병든 몸을 낫게 하는 약사신앙과 비슷해서 북쪽 하늘 일곱 성신은 약사칠불과 동일한 불성(佛性)을 나타내는 칠성여래로 화현했다. 

 

북두칠성을 여래화한 칠성여래

우리에게 칠성은 공경대부(公卿大夫, 높은 벼슬에 있는 관인) 모습에 홀(笏)을 든 칠원성군으로 익숙하지만 조선 전기 사찰의 칠성은 부처님처럼 그려낸 칠성여래(七星如來)였다. 신앙 변화에 걸맞게 새로운 도상으로 그려낸 불화가 일본 보주원(寶珠院)에 소장된 <치성광여래회도>(그림 5)다. 16세기 중반 그려진 이 그림은 하늘에서 우마차를 타고 강림하는 모습이 아닌 28수를 비롯한 성중을 모아놓고 설법하는 치성광여래를 그렸다. 화면 중앙에 자리한 치성광여래 삼존 위쪽에 일렬로 그려진 일곱 분의 부처는 북두칠성을 여래화해 나타낸 칠성여래다. 

그림 5. <치성광여래회도>, 16세기, 마본채색, 일본 보주원 소장

신앙을 그림으로 풀이한 불화에서 각각의 형상 크기는 신앙에서 갖는 무게와 비례한다. 구요와 12궁이 사라진 그림에서 비중 있게 그려진 칠성여래의 존재는 당시 절집의 칠성신앙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문건(1494~1567)은 『묵재일기(默齋日記)』에서 ‘아들에게 액이 들어 재물을 갖춰 사찰에서 별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이것을 세속에서는 칠성제(七星祭)라고 한다’고 했다. 이는 절에서 하는 칠성기도가 액을 막아주는 소재신앙으로 일반화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의례집에 수록된 칠성여래와 머리를 풀어 헤친 피발(披髮)형 칠성이 조합을 이룬 칠성 각부도(各部圖, 각 폭에 나누어 그린 그림) 형태의 변상도 역시 당시 신앙에서 칠성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불교 의례에서 기도하는 대상은 상단(上壇)의 불보살인 것에 반해 「북두칠성공양문」(1534)에서 치성광여래 삼존은 증명단(證明壇) 역할로 한정됐고 그 아래 존격에 해당하는 북두칠성이 의례의 중심이 됐다. 북두칠성이 신앙의 전면으로 대두하면서 의례에 소청되는 성신에 28수와 삼태육성은 있지만 구요와 함께 서양의 점성신앙을 의미했던 12궁은 사라진다. 

그림 6. 『불설북두칠성연명경』, 1580, 은진 쌍계사 판본
첫 장에는 좌상의 치성광여래와 입상의 협시보살 2위가 그려져 있고, 그 뒤부터는 각 장에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칠성여래와 그 아래 머리를 풀어 헤친 피발형 칠성이 홀을 가지고 서 있다. 

1580년 은진 쌍계사에서 개판된 『북두칠성연명경』(그림 6) 변상의 첫 장은 구름을 배경으로 그려진 좌상의 치성광여래와 입상의 협시보살 2위로 구성됐다. 그다음 장에는 흔들리는 보개(寶蓋) 아래 6각형 단상 위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칠성여래와 그 아래 홀을 가지고 서 있는 모습의 칠성이 있다. 화면 우측 방제는 칠성여래와 피발형 칠성의 존명을 나타낸 것으로 제1 탐랑성(貪狼星) 동방최승세계운의통증여래불(東方最勝世界運意通證如來佛), 제2 거문성(巨門星) 동방묘법세계광음자우여래불(東方妙法世界光音自右如來佛), 제3 녹존성(祿存星) 동방원만세계금색성취여래불(東方圓滿世界金色成就如來佛), 제4 문곡성(文曲星) 동방무우세계최승길상여래불(東方無憂世界最勝鮚祥如來佛), 제5 염정성(廉貞星) 동방정주세계광달지변여래불(東方定住世界光達智辯如來佛), 제6 무곡성(武曲星) 동방법의세계광해유희여래불(東方法意世界光海遊戱如來佛), 제7 파군성(頗軍星) 동방유리세계약사유리광여래불(東方琉璃世界藥師琉璃光如來佛)이다. 

그림 7. <칠성각부도>, 1739, 태안사 치성광여래도 부분, 소재미상

의겸의 제자였던 긍척이 그린 곡성 태안사 성기암 <칠성각부도>(1739)(그림 7)는 칠성여래와 피발형 칠성이 짝지어 그려진 경전의 변상도를 기초한 채색불화다. 치성광여래 삼존과 제요성수를 그린 중간 화폭 1점과 북두칠성 7존을 나눠 그린 화폭 3점으로 구성된 이 그림에서 도교의 칠성을 의미하는 칠원성군은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여러 화폭에 나눠 칠성여래와 칠성을 그린 이 불화는 본명에 따라 소재기도를 했던 칠성신앙의 전통을 보여주는 실증적인 사례다. 운명을 주재하는 칠성에 기도해 소재구복을 기원하는 북두본명 신앙에서 제1 북두에는 쥐띠, 제2 북두에는 소와 돼지띠, 제3 북두에는 호랑이와 개띠, 제4 북두에는 토끼와 닭띠, 제5 북두에는 용과 원숭이띠, 제6 북두에는 뱀과 양띠, 제7 북두에는 말띠가 속해 있다. 따라서 불화는 목적에 맞게 각각 해당하는 칠성에게 기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화면을 나눈 각부도 형태를 갖추게 됐고 이는 불화의 제작에 시주한 사람들의 생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01년 부산의 기장으로 유배 갔던 심노숭(1762~1837)은 풍습에 따라 정초에 절에 가 칠성에게 기도했다. 그가 찾아간 장안사의 칠성전에는 치성광여래와 칠성을 나눠 그린 족자가 걸려 있었고 각각의 화폭 앞에는 공양구와 더불어 칠성을 조각상으로 만든 조상이 있었다. 

전남 백양사 칠성전에 모신 칠성상은 불화와 조상이 함께 있던 조선 후기 칠성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 전각의 규모가 축소되는 공간적인 제약과 함께 본명신앙보다는 호법 신중적 성격이 부각되면서 각부로 그려진 작품의 수는 대폭 줄어들고 한 폭에 모든 성신이 다 그려지는 여래회도 형태의 그림이 대다수를 이룬다.

 

자미대제·칠원성군·수노인의 등장

칠성도에 그려지는 자미대제와 칠원성군은 도교의 칠성신앙을 대변한다. 도교식 초제를 올렸던 소격서(昭格署)가 혁파되면서 도교의 성수신앙은 민간으로 전파됐다. 맹인 도사였던 도류승(道流僧)은 부적과 주술, 독경 등을 통해 민가에서 안택기도, 소재기도 등을 행했는데 이는 대중적으로 높은 호응을 얻게 된다. 관련해 사찰의 칠성신앙에도 도교의 자미대제와 칠원성군이 등장하는 동기가 돼 칠성여래와 함께 칠성도에  그려졌다. 

그림 8. 향림사 <치성광여래회도>, 1873,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73년 취선이 그린 향림사 <치성광여래회도>(그림 8)에는 치성광여래 바로 아래 도교에서 북극성을 의미하는 자미대제가 일광·월광보살과 함께 삼존을 이루는 모습이다. 화면 하부 칠원성군은 홀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졌고, 그 위 치성광여래 삼존 좌우로 칠성여래와 동자형 칠성, 7선녀가 나뉘어 있다. 칠성이 각기 모습을 달리한 이유는 동서남북에 모두 칠성이 있다는 신앙이 반영된 것이다. 화면에는 자미대제와 칠원성군을 비롯해 도교적 모티프인 복숭아 가지 문양이 화면 가장자리 여백에 빈틈없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당시 사찰에 짙게 밴 도교적 색채를 나타낸다.

그림 9. 수성노인, <옥수동 미타사 칠성각 치성광여래회도> 부분, 1897, 면본채색, 옥수동 미타사 칠성각

19세기 서울과 경기지역 사찰의 칠성각은 도교의 성수초제를 지내는 장소로 인식될 만큼 심각해 교단에서도 그 사정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았다. 이때의 사정을 보여주는 모티프가 행복과 장수를 주관하는 수성노인(壽星老人)(그림 9)이다.

그림 10. 수성노인, 도선암본 『연생경』 삽도, 1864, 삼각산 도선암 판각,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64년 삼각산(북한산) 도선암에서 김좌근의 시주로 칠성기도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연생경』(그림 10)은 칠성의 대중적 인기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음사(淫祀)로 치부됐던 칠성을 세도가들도 신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경전은 사찰에서 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도교의 칠성을 다루고 있다. 변상도에도 치성광여래는 사라지고 그를 대신해 도교 칠성경의 설주(設主)인 노자를 가리키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자리했다. 노자는 수성노인의 현신이기에 그림에서 정수리가 솟아 있는 노인은 곧 태상노군을 의미한다.   

우리가 절집에서 보는 치성광여래도는 서역 점성에서 시작된 신앙의 길고 긴 여정을 모두 보듬어 안은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사찰에서 칠성을 모신 전각은 칠성전 이외에도 고려의 소재도량에 영향을 받은 소재전, 북극성신을 모신 곳인 북진전(北辰殿), 금륜불정치성광여래를 봉안한 전각이라는 의미인 금륜불전, 독성과 산신이 함께 자리한 삼성각 등으로 불린다. 전각의 이름이 이처럼 다양한 까닭은 앞서 살펴본 유구한 역사 속 도상의 변화처럼 점성에서 기복으로 변화한 신앙의 성격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전통을 가진 칠성에게 올리는 칠월 칠석날 기도의 의미는 칠성님을 모신 전각 주련에 쓰인 문구를 되새기는 것으로 대신하며 글을 마친다.  

영험한 신통력과 드넓은 지혜가 거울처럼 밝아(靈通廣大慧鑑明)
허공중에 머물며 미치지 않는 곳 없네(住在空中映無方)
푸른 하늘에 늘어서서 인간 세상을 비추니(羅列碧天臨刹土)
사람을 살피어 수명을 늘려주시네(周天人世壽算長)

 

정진희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이다.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동국대 미술사학과 석박사를 졸업했고, 논문으로 「한국 치성광여래 신앙과 도상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 『치성광여래 신앙과 도상으로 살펴본 한반도 점성신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