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한거都心閑居] 파격! 또 다른 자유

2022-08-08     석두 스님

요즘 모기가 많아 밤잠을 설친다.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승(僧)으로 살면서 가장 곤란한 질문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 모기나 파리의 생멸(生滅)에 대한 직설적 질문이다. 물론 은근슬쩍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양심에 찔리곤 한다. 살생계의 무거움이 명확하게 계율에 적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굳이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어찌 그 많은 계율을 다 지키며 살 수 있단 말인가? 부처님께서도 산과 강을 건너면 당신이 제정한 계율도 변할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소승의 소심한 변명은 아래 선시(禪詩) 앞에서는 더욱 부끄럽다.

“垢也塵也是何物(구야진야시하물)
元來見來更無骨(원래견래갱무골)
雖爲喰人十分肥(수위식인십분비)
瘦僧一捻歿生涯(수승일념몰생애)

이것이 때인가 티끌인가 과연 무엇인가
한 번 보고 또 봐도 하찮은 미물일세.
사람 피 빨아먹고 통통하게 살이 쪘어도
비쩍 마른 중의 손톱에 생을 마감하네.”

살생에 대한 일말의 죄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담담하게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비난이 두려워서 피하려 하지도 않는다. 혹자는 수행자의 계율의식이 너무 뻔뻔하고 가볍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파격(破格)! 법의 성품(性品)을 본 자는 범인(凡人)의 의식을 넘어선 자이다. 

도덕, 윤리, 계율에 갇힌 자는 그 이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도덕적인 군자(君子)는 될 수 있지만, 인천(人天)의 스승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금은보화로 장식한 울타리가 좋아 보일지라도 울타리는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위 선시 ‘조(蚤) 벼룩’의 작자인 잇큐 소준(一休宗純, 1394~1481) 스님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에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선승이자, 자유로운 구도자였다. 그는 천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정치적인 이유로 6살의 나이에 입산(入山)한다. 1415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선사인 카소 소돈(華曳宗曇, 1352~1428)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법을 이었다. 몇 년 뒤 수행 중에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홀연 깨달음을 얻은 잇큐는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잇큐 선사는 기행으로 유명했지만, 혀끝으로 화두를 말하고 진리를 속이며 권력 있는 정치인에게 굽신거리는 타락한 불교를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 그렇게 불교계의 쇄신과 선종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늘 목검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하루는 한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이 목검은 사람을 죽일 수도 없고, 하물며 사람을 살릴 수도 없다”라고 답했는데, 이는 허식과 위선에 빠진 당시 선종에 대한 비판이었다. 선종(禪宗)을 목검에 비유해 목검으로 사람을 살리지도 죽이지도 못한다고 한 것이다. 거침없이 자유로운 삶 속에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잇큐 선사의 행적은 ‘선즉풍류(禪卽風流), 풍류즉선(風流卽禪) - 선은 곧 풍류이며, 풍류 역시 하나의 선 - 이었다.

“十年花下理芳盟(십년화하리방맹)
一段風流無限情(일단풍류무한정)
惜別枕頭兒女膝(석별침두아여슬)
夜深雲雨約三生(야심운우약삼생)

십 년 동안 꽃 아래서 아름다운 약속 잘 지켰지.
한 가닥 풍류는 무한한 정이라
그녀의 무릎 베고 이별을 아쉬워할새
깊은 밤 운우 속 삼생을 기약하네.”

잇큐 선사는 노년에 맹인 여인 삼녀(森女)를 만나 사랑에 대한 정서를 찬미하고, 종교적인 감정을 여인과의 육감적인 사랑에 빗대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위의 ‘난세시(亂世詩)’는 흥미롭게도 임종(臨終)을 앞두고 남긴 시이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석별의 정이 담겨있다. 종교적인 감정과 육감적인 사랑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시의 세계를 보여준다. 거침이 없다. 수행승에게 금기(禁忌)인 여인에 대한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 정도면 범인의 눈높이에는 여지없이 파계승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유보하시라. 다음 시를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잇큐 선사가 말했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그 속엔 벚꽃이 없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꽃이 피어나는가?
극락과 지옥에 대한 앎도, 기억도 없네
태어나기 이전의 우리가 되어야 하리.
비, 우박, 눈 그리고 얼음 제각기 
떨어져 내리지만
떨어지면 똑같은 계곡의 물.
밤새 부처의 길 구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 찾아 들어갈 수 없으리.
고국이 어디냐고
고향이 어디냐고 묻거든
본래무위(本來無爲)의 사람이라 대답하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사람 거기에 서 있네
언뜻 한 번 보기만 해도 우리는 사랑에 빠지네.
태어나기 이전의 ‘나’가
본래무위의 사람!
본래면목의 사람의 사람이 ‘나’니,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바로 ‘그’이니!
어디서 그를 다시 찾으려 하는가?
그는 언뜻 한 번만 보기만 해도
사랑에 빠지네.”
- 잇큐의 『광운집(狂雲集)』에서

잇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시이다. 대개 우리는 언어에 걸리고 언어에 치인다. 벚나무에는 벚꽃이 없다. 시절인연이 도래해야 꽃이 핀다. 언어를 넘어 인연을 볼 수 있는 자만이 꽃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다. 조바심은 금물이다. 사랑하는 이도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내 안에 존재한다.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다. 끝으로 화두(話頭)로도 유명한 다음 시는 더 파격이다. 

“老婆心爲賊過梯(노파심위적과제)
淸淨沙門與女妻(청정사문여여처)
今夜美人若約我(금야미인약약아)
枯楊春老更生稊(고양춘로갱생제)

노파심에서 도적에게 사다리를 건네주고
청정한 스님에게 젊은 여자를 주었네.
오늘 밤 미인이 내 품에 안긴다면
말라 죽은 고목나무에 새싹이 나리.”
- 파자소암(婆子燒庵)에 대한 잇큐 선사의 게송

마음공부는 경계(境界) 없는 경계의 공부이다. 암자에 있는 수행자는 여자라는 경계에 걸려 있어서, 노파의 시험에서 떨어졌다. 수행처도 불타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다. 분별심(分別心)! 슬프게도 작금의 수행승 중에서는 낙방자가 더 나올 것 같은 것은 소승만의 기우(杞憂)일까?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