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체크인, 템플스테이] 템플스테이 20년 좌담

나를 찾는 여행, 사찰을 변화시키다

2022-06-28     불광미디어
(왼쪽부터) 금강 스님, 주경 스님, 류지호 대표

참가자. 주경 스님, 금강 스님, 류지호 대표
정리. 김남수   
사진. 유동영 

 

대한민국의 2002년은 월드컵의 해로 기억된다. 사찰에서 스님들이 ‘붉은 악마’로 변신해 응원하는 모습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편으로 미래 불교를 변화시킬 일을 도모했으니, ‘템플스테이’가 그것이다. 초창기 템플스테이를 고민했던 세 명이 수덕사 산중에 앉아, 지난 20년을 돌아보고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류지호(이하 사회) :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템플스테이가 시작됐습니다. 20주년을 맞이해 템플스테이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모색해보는 대담입니다. 주경 스님은 2002년 당시 포교원 소임을 보았고, 2004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초창기 국장도 맡으셨습니다. 금강 스님은 해남 미황사 일선에서 꾸준하게 수련대회를 하셨습니다. 템플스테이가 진행되기까지의 과정을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주경 스님(이하 주경) : 2001년부터 “조계종에서 월드컵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하는 이야기가 나왔고, 구체화한 것이 템플스테이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의사 타진도 있었죠. ‘건강한 숙박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라고 하더군요, 러브호텔까지 숙박으로 고려했다고 하니깐요. 사찰에서 외국인들이 숙식하면서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템플스테이 이야기가 나왔죠. 
저는 종단 소임을 그만두고 잠시 공백이 있었는데, 조금 후에 결합하게 됐습니다. 2002년 1월에 포교원 산하에 템플스테이 사무국을 꾸리면서 일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당시 송광사 해인사로 대표되는 수련회가 있었고, 수백 명이 숙박하는 전통도 있었지만, 다른 개념이었죠. 처음에는 홈스테이와 수련의 개념을 적용해보자 했죠.
외국인들이 사찰에 머물려면 ‘숙박 시설과 화장실, 세면장 등의 편의시설과 음식에 대해서는 최소한 맞춰줘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이 제일 컸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찰에는 전통적인 재래식 화장실이었지, 양변기가 제대로 없었어요. 수도꼭지 아래에 세숫대야를 놓고 씻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제 기억에는 문화관광부에서 1억 정도 지원했었는데 그 돈을 가지고 33개 사찰에 시설지원비로 사용했죠. 

 

사회 : 월드컵 기간에 외국인들이 실제로 사찰에서 숙박했나요?

주경 : 많지 않았어요. 1,000명이 넘지는 않을 겁니다.

사회 : 일선 사찰 입장은 어땠습니까?

금강 스님(이하 금강) : 월드컵 기간에 외국인들 대상으로 하긴 했지만, 외국 기자와 대사관 직원을 대상으로 팸투어(Fam Tour)를 많이 했어요.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의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어요. 외국인 기자들이 템플스테이 팸투어를 하다 보니까 ‘이게 가장 한국적이다’라고 인식한 것이죠. 1,000년이 넘은 공간에서 지낸다고 하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었던 것 같고요. 동남아 지역과 비교해도 한국 사찰만의 내용이 있고, 훨씬 단정해 보였나 봅니다. 사찰음식을 먹고 자연과 함께하는 것도 좋아했죠. 외국인 기자들, 외국 대사관 직원들이 상당히 흥겨워했습니다. 
그즈음 수련회가 굉장히 활발했죠. 송광사부터 시작해서 해인사, 대흥사 사찰 수련회가 인기 있었습니다. 대흥사 ‘새벽 숲길’이라는 좀 편안한 프로그램이 있었고, 저는 2000년도부터 ‘어린이 한문학당’을 진행했죠. 어린이를 대상으로 했는데, 외국인 대상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봤죠. 
한국의 사찰은 수행 공간이기도 하지만, 역사와 문화가 있기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이제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미황사는 월드컵경기장으로부터 꽤 먼 곳이었지만 자신감이 있었죠. 

금강 스님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해남 미황사에서 ‘한문학당’과 사찰 수련회를 진행하며, 템플스테이의 기초를 다졌다.

 

사회 : 그즈음 주5일제가 시행됐습니다. 템플스테이가 대중화하는 데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습니까?

주경 : 좀 더 여유가 생기고, 가족 중심의 여가 문화가 생기면서 1박 2일이 2박 3일로 늘어나고, 일주일씩 있다가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주5일제가 시작되면서 템플스테이 발전에 좋은 영향을 미쳤죠. 

금강 : 또 하나 거들자면 IMF 외환위기가 지나고 난 뒤, 고도 성장사회에서 저성장 사회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이 실직했던 경험도 있고 해서 마음의 문제가 많이 대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 이전까지 사찰은 스님과 신도를 위한 공간으로 인식됐습니다. 일반인들은 입장료를 내고 잠시 관람하거나, 등산할 때 살짝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하룻밤 잠도 자보고 스님과 대화도 해보는 계기가 된 것이 템플스테이 아닐까 합니다. 개방성 측면에서는 굉장히 호응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 금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주경 : 일부에서는 ‘밥장사 아니냐?’, ‘이제 외국인들까지 받냐?’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고 말들이 많이 있기는 했죠. 오히려 문화관광부나 당시 한국방문의해 추진위원회에서 호응을 많이 해줬습니다. 도영심 추진위원장이 열정을 갖고 도와줬고, ‘월드컵이 끝나도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다’라는 조언도 많이 해줬습니다. 외부에서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금강 : 월드컵 이후로 확대하는 데 조심스러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970~1980대에 수학 여행객들이 사찰로 오면 밥 해먹이고 재워주고 하는 기억들이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그 기억이 너무 안 좋은 거예요. 스님들은 절이 집이잖아요? 수행 공간에서, 신도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종교도 다르고 나라도 다른 외부인들에게 자기 생활공간을 개방하는 거잖아요? 일정 정도 불교에 대한 소양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서 안 좋은 부분들이 더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죠. 외국 사찰들도 그런 곳은 없었으니까요. 

주경 스님은 템플스테이를 주관하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초창기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서산 부석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운영했다.

 

사회 : 초창기에 대외적으로 주목받은 파장이라 할까요? 2004년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발족했고, 몇 년 후에는 템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라는 별도 건물까지 구비했습니다. 템플스테이를 활성화하고 불교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하기까지 또 다른 과정이 있었습니다.

주경 : 월드컵이 끝나고 가장 큰 성과로 꼽는 것이 3가지인데요, 첫째가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 둘째가 ‘붉은 악마’, 셋째가 템플스테이라고 해요. 조계종단 내에서도 ‘잘했다’라는 평가가 있었죠. 정부나 일반 사회에서도 ‘이런 것을 왜 묻어두려 하냐?’ 하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운영해 본 사찰도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2003년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2004년 초에 규정을 만들어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출범했어요. 정부의 지원도 늘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 중심이었지만 내국인도 같이 받게 됐어요. 외국인을 따라 내국인이 들어온 거죠.

금강 : 미황사는 월드컵 이후에도 중단없이 365일 진행했습니다. 다른 사찰은 주로 주말에 진행했었죠? 외국인들이 국내 여행하면서 사찰 일정에 맞춰 방문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365일 열어 놓으면 한국에 와서 어느 때든 자기 스케줄에 맞춰 올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명 오기도 하고, 두 명도 받고 하다 보니 점점 입소문을 탔던 것 같습니다. 
365일 사람이 찾아오고, 사람을 재운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끼니마다 밥을 먹여야 해요. 외국인들은 하루 이틀 있지 않아요. 일주일 있는 사람도 있고, 한 달 있기도 해요. 그러면 음식이 똑같아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여행을 가도 잠자리 깨끗하고 음식 괜찮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요? 한국의 사찰이라고 하는 것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빼어난 경관입니다. 모든 사찰이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잘 챙겨서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 한 사찰에서도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중앙에서 운영사찰을 지정하고 심사하기도 했죠? 또 각종 통계를 작성하고 분석하는 일도 처음에는 쉽지 않았을 듯한데요. 시설이나 일정 수준의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한 일도 초기에 많았을 것 같은데.

주경 : 그렇죠. 템플스테이 로고를 정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죠. 로고도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인 회사에 맡겼습니다. 스님들 생각도 각양각색이었어요. 금강 스님처럼 템플스테이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스님들도, 운영에 헌신하는 스님들도 꽤 많았습니다. 
2004년에 스님들을 교육하다 이것만 갖고는 부족하다 싶어 일본 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송광사나 해인사하고 비교할 만한 그런 사찰들을 방문했죠. 절에서 자면서 염불도 참여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이나 사찰을 운영하는 방법들을 참고했죠. 이후에는 유럽으로도 연수를 갔다고 해요. 그렇게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템플스테이가 갖는 가치에 대해서 인식이 높아지면서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에 중앙에서는 각 사찰의 특수성은 인정하면서도 청결이나 숙소 등에서 최소한의 기본적인 지침을 마련했죠. 프로그램이나 교재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했어요.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들 적극적으로 임했죠.
템플스테이가 좋았던 게 뭐냐면, 참가자들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고, 공양과 프로그램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즐기도록 놓아줬던 거예요. 스님들의 생활공간에 일정 부분 동참하면서 자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을 좋아했던 듯합니다. 

금강 : 초창기에 매뉴얼에 맞춰 잘 운영하고 있는지 등을 세심히 살폈던 듯합니다. 현장 스님, 법인 스님 등 몇몇이 사업단과 함께 프로그램 질을 높이기 위해 템플스테이 사찰로 많이 갔습니다. 사찰에서 프로그램 요청이 있으면 스님들이 가서 프로그램을 같이 운영해주고, 또 ‘외국인 템플스테이를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 거기에 스님과 실무자가 내려가 종일 동참해 시범을 보여줬어요. 그런 것이 처음 시작할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사회 : 호응이 높아지면서 사찰의 편의시설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내부적으로 연구도 하고 용역도 주면서 예산이 늘어났던 것 같은데 어떻게 기억하세요?

주경 : 초기에는 ‘화장실을 왜 고쳐? 전통대로 살지’라고 주장하는 스님도 꽤 있었어요. ‘그냥 우리가 사는 건데 이것도 체험 아니냐’고. 초창기에는 템플스테이 참가해서 방문 열어보고는 도망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방에 화장실 없어요?’라고 묻는 것은 다반사였죠. 
그때 사찰에 화장실 있는 방이 어디 있었어요? 재래식 화장실이어서 아이들이나 어른들도 며칠씩 머물면서 화장실 
한 번 안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사람들만 사찰체험을 했는데, 보편화되면서 이런 요구들이 많아졌죠. 주목받는 프로그램인데 화장실 좋지 않지, 방에 들어가면 벌레 나오지, 곰팡이 있지, 벽지는 지저분하지. 사찰에서는 최선을 다했지만요.
폭이 넓어지고 참가자가 많아지면서 문화관광부나 정부에서도 ‘이거 지원이 없으면 어렵겠다’라고 한 거죠. 예산이 늘어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금강 : 미황사는 작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욕실과 화장실 있는 곳은 두 개밖에 없었어요. 1980~1990년대에는 큰 전각이라든지 성보, 불상을 모시는 불사가 많았죠. 템플스테이를 하면서는 화장실, 숙소 공간들이 많이 바뀌었죠. 내용에 의해 시설들이 바뀌는 계기가 됐죠.
예전에 스님들끼리 다닐 때도 객실이 형편없었어요. 절 밖 호텔에서 자기도 했으니까요. 템플스테이하면서 시설들이 업그레이드되고, 지금은 스님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편리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아지고 다들 윤택해졌죠.

 

사회 : ‘템플스테이 재방문율이 낮다’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초창기 때부터 큰 고민이었고, 지금은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고민 중의 하나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금강 : 템플스테이 중에서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욕망 충족이거든요. 안 해 본 걸 체험하는 거니까. 감동이 있지 않으면 지속성이 없죠. 
강의하러 다니면서 ‘한 번 체험하고 마는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 ‘지속적인 프로그램, 또는 약간 상위프로그램 이런 것이 있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체험보다 더 낮은 휴식형이 있더라고요. 예불도 안 하게 하는 것은 좀 문제인 것 같아요. 심지어는 그냥 숙소로만 쓰는 정도로 하는 곳도 있어요.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수행은 변화를 주거든요, 힘을 주고. 절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겠다 하는 거죠. 예전에는 수련회가 많았다가 템플스테이가 활성화되면서 수행과 관련된 것에는 관심이 떨어진 것 같아요.

주경 : 저도 금강 스님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휴식형이라 그래놓고 밥도 안 먹고, 와서 잠만 자다가 가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건 스트레스 지수를 낮춘다든지 하는 효과가 별로 없어요. 편하게 쉬었다 가는 건데, 그런 프로그램들은 사업단이라든지 사찰 차원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수련회 같은 강압적이고 물리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프로그램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요. 신도들도 1,080배 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고민이 필요하죠. 템플스테이를 통해 타 종교인이나 일반인들이 불교에 유입하는 계기가 됐지만, 수련회나 수행 프로그램으로 유입시키는 노력이 종단 차원에서 있어야 합니다. 포교원하고 별개로 가면서 템플스테이에서 배제돼 있는 부분도 고민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사회 : 중앙에서는 현장의 살아있는 고민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한데, 행정이 많아지고 사찰의 관심도 달라지다 보니 아쉬운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금강 : 재정 규모도 커지고 운영사찰이 많아지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을 늘릴 생각을 해야 하는데 관리적 성격이 커지고 있죠. 시설 신축이 중요해졌죠? 일상적 관리를 하고 거기에서 사고가 나면 안 되니까. 그런 곳에 초점이 있다 보니 프로그램이라든지 내용에 대한 관심이 많이 떨어져 있는 듯해요. 

주경 : 초기에는 스님들도, 담당자와 봉사자도 열정과 의욕이 있었고 사람들이 오가는 일에 보람이 컸었거든요. 지금은 사무적으로 변해 버린 측면이 있죠. 템플스테이 사업 등에 여러 가지 지원책이 생기고, 주지스님도 지도법사에게 맡기면서 관심이 적어지게 된 면도 있습니다. 초기의 열정과 의욕이 줄어들었어요.
주지스님들은 지도법사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실무자는 참여자의 불만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고.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그런 부분을 살리기 위한 교육이나 연수 프로그램도 적어지고. 시설이나 운영에 많은 지원을 해주지만, 그런 가운데 놓치는 것이 없나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네요.

금강 : 중앙에서 사찰에 늘 관심을 가져야 하거든요. 잘 되는 사찰은 지속가능하게 해주고, 어려운 사찰은 끌어 올려줘야 하고. 물론 어려운 일이죠. 주지스님이 바뀌더라도 프로그램이 지속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든지, 동요를 최소화하든지 하는 거죠.
시설 지원이 됐고, 끌어올려 놓았는데 지속이 안 되면 아쉽죠? 전략적으로도 좀 필요하거든요. 어떤 스님이 어디로 가면 그곳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도록 지원을 하거나 하게 만들고.

주경 : 템플스테이 전문위원 제도가 있습니다. 일 년에 서너 차례 회의하면서 사업단 운영이나 사찰의 형편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얘기를 했거든요. 어느날부터 중요 사찰과 전문위원들의 참여폭이 줄어들거나 없어졌죠. 어렵더라도 중요한 사찰이나 장점 있는 스님들의 의견을 들어서 미래를 준비했으면 해요. 템플스테이의 지향점 같은 부분들은 함께 고민했으면 합니다. 

불광미디어 류지호 대표(왼쪽)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초기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템플스테이 초석을 다졌던 세 명이 수덕사에 모여 회고와 방향을 논의했다. 

 

사회 : 관광기금에서 예산이 지원되다 보니 ‘템플스테이가 관광이냐’라는 지적도 있고, 내부적으로는 실적에 대한 고민도 많습니다. 사찰이 구경거리만은 아니잖아요? 수행·신행 공간으로서의 사찰과 관광상품으로서의 사찰과의 괴리감은 없습니까?

주경 : 극복 못 할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사회에서 볼 때는 관광적인 측면이 분명 있는 거고, 사회적 기준에 우리가 협력하고 지원하는 부분은 있어야죠. 다만 내부에서 그것을 관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고, 템플스테이 자체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공감하면 좋을 듯합니다. 

금강 : 이제 좀 자립했으면 좋겠어요.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훨씬 더 효율적이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을까요.

 

사회 : 조금은 직접적인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템플스테이 20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합니까?

주경 : 가능성이 가장 높고 유효하죠. 사찰은 기본적으로 스님의 수행처예요.템플스테이를 통해 사람들은 수행과 사찰 생활을 경험하는 계기가 됐거든요. 사실 이거 외에 다른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금강 : ‘앞으로도 지속가능하고, 오히려 얼마나 더 잘할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사회가 변화할수록 갈등은 심해집니다. 그렇기에 자연과 함께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마음 치유 쪽으로 문제를 풀어 간다면 지속가능하지 않을까요?

주경 :  불교적 관심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템플스테이밖에 없어요.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새롭게 유입되고, 불교의 사회적 접촉이 이뤄지는 공간이거든요.

 

사회 : 제일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스님과의 차담 시간으로 조사됐습니다. 일반인들은 스님과 대화하기 쉽지 않은데, 템플스테이에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인상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 의례적 체험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삶의 방향을 고민해주고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주경 : 자연스러운 것이 좋아요. 한 번 만나서 얼마나 인생을 바꾸겠어요?(웃음) 너무 큰 욕심이고요. 다만 불교가 폐쇄돼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창구를 가지고 있다’라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스님들이 개별적인 취향이나 성격보다는 기본적인 매너라든지 틀을 갖추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금강 : 그래서 템플스테이 지도자 교육이 필요하죠. 지속적인 투자 계획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계층별, 집단별 모임이 많았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대학생, 청년까지. 유치원도 운영했고 법회와 동아리가 많았지만 많이 사라졌죠. 그것이 개인 단위, 혹은 가족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템플스테이는 장점이 많아요. 그렇기에 조금은 전문적인 프로그램이 많아져야 하고, 지도하는 분들도 노력해야 합니다. 프로그램과 교육 지원이 더 세밀해져야 합니다.

 

사회 : 최근에 20~30대 여성들의 참여가 굉장히 높습니다. 한편에서는 신도들이 고령화되는 상황인데, 긍정적인 현상 같은데요. 지금까지의 불교와는 조금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죠? 그들을 대상으로 한 고민도 많아져야 할 텐데요.

주경 : 최소한 1년 정도 꾸준히 운영하면 참가자들의 고민을 느끼게 되거든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분들,  6년에서 10년 정도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의 내면적 갈등이 많더라고요. 우는 친구들도 있고,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갈등을 불교적인 방법으로 해소해 달라거나, 프로그램 마치고 개별적으로 상담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많아요.
저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해소가 되더라고요. 조금 더 세밀하게 고민을 들어 주는, ‘도움 줄 수 있는 기능적인 부분도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늘 있죠.

 

사회 : 템플스테이 발전을 위해 중앙 차원, 혹은 사찰 차원에서 함께 고민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주경 : 행정적으로 안정된 만큼 운영 면에서는 활력이 사라져가는 경향도 있거든요. 그리고 출가자들이 줄면서 스님들의 참여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피로감이 밀려오기도 하죠. 템플스테이 운영에 새로운 접근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인력에 대한 문제가 제일 커요. 지도법사나 실무자들의 교체가 굉장히 빈번한 걸로 알고 있어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자율성이나 책임감, 복지에 대한 부분도 고민해야죠. 그리고 20년 동안 축적된 많은 프로그램을 결집하고 재점검했으면 합니다. 템플스테이가 정부나 불교계에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20주년을 맞아 보상이나 칭찬의 기회도 있었으면 합니다. 

금강 : 각 사찰의 특성에 맞게 전문적인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합니다. 청년이면 청년, 여성이면 여성, 특화된 프로그램이 있어야 경쟁력도 있고 지속가능할 것입니다. 
템플스테이는 한국 사회에서 보물과 같은 것이죠. 사찰은 사람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는 제일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세상 사람들이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늘 열려있고,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사회 :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말씀 감사합니다. 템플스테이 발전에 도움 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템플스테이는 한국 사회에서   보물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