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인간 존재

번뇌에서 건지는 깨달음 1

2007-09-17     관리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는 살인 증거를 없애기 위해 집안에 화장시설을 만들어 놓고 사체를 태웠다. 몇 년 뒤에 이 지존파 범죄자들을 본받은 막가파가 생겼다.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산 사람을 땅에 묻는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부인이나 아버 지를 죽여서 토막을 내고, 다시 그 사체를 가방에 담아서 버리는 사건도 많았었다.
우리가 모르는 악도 많고 여기에 적을 수 없는 악도 많다. 사람이 생각하고 저지를 수 있는 악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온 악보다도 무량억천만 배나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에게는 무서운 악만 있지 않다. 놀라운 정반대의 선도 있다. 물에 빠진 남을 구하기위해 죽은 사람도 많고, 교통사고 직전의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 을 버린 사람도 많다. 죽어 가는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한 쪽콩팥이나 눈을 기증하는 사 람도 있고, 일생동안 굶주리며 모아온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바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아들을 운전 중에 치어 죽인 가해자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당국에 석방을 탄원한 사람도 있 다.
나는 여기서 극단적인 약과 선의 예들을 열거했지만, 어지간히 약하고 어지간히 선한 그 중 간의 예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도 작자의 속을 돌아보면 악도 보이 고 선도 보인다. 악해야겠다고 적정해도 선해지는 수가 있는가 하면, 선해지겠다고 다짐해도 악해지는 수가 있다. 어떤 때는 느닷없이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선이 떠오르는가 하면, 다 른 때는 남이 알아차릴까 상상만 해도 부끄러운 악이 떠오르기도 한다.
유일신을 가르치는 서양 종교에서는, 최초의 조물주를 설정해 놓고, 그 조물주는 선으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은 그 조물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창조론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왜 선한 조물주가 악을 만들었느냐. 악이 환이나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냐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 만약 악이 허망한 것이라면 세상의 악에 대해서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만약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선으로부터 악이 생겼다는 말이냐.
만약 악이 선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면, 그 선은 완전한 선이 아니고 본래부터 악을 포함한 선이 아니겠느냐. 만약 악이 조물주의 의사와 관계없이 생겼다면,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했다 는 말은 거짓이 아니냐."
창조신론에 대해서 악을 설명하라고 묻는다면, 이와 같은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 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계속 파고 들어간다면, 창조신혼은 마침내 화를 내면서 '무조건 믿어 야 한다."는 말로 질문을 끝내려고 할 것이다.
중국의 스승들 가운데는 사람의 심성이 본래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악하다 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성선설(性善說)이나 성악설(性惡說)은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가정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꼬치꼬치 이것저것 따질 것은 못되지만, 그래도 의문이 생긴다. 사람의본성이 선하다면 어디에서 악이 생겼으며, 본래 악하다면 선이 어디에 서 생겼느냐는 것이다. 선에서 악이 나왔다면, 그 선은 완전한 선이 아니고, 악에서 선이 나왔다면 그 악은 역시 완전한 악이 아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사람의 본성에 대한 반쪽 설명도 못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선과 악을 어떻게 설명할까. 부처님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들고 나와 서 말장난하기를 싫어한다. 말장난은 말 그대로 희론(戱論)이다. 희론은 중생을 해탈로 이끌 어 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만동자가 우주에 대해서 물었을 때 대답을 거부하고 침 묵했듯이, 부처님은 우리의 물음을 상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길은 있다. 선에서 악이 생겼느냐 아니면 악에서 선이 생겼느냐 하는 식의 형이상학 적인 질문을 할 때는 대답하지 않겠지만, 고해에 허덕이는 중생은 어떤 선악의 상태에 있으 며, 어떻게 해야 그 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부처님은 우리의 존재 실태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 줄 것이다.
간략히 불교의 입장을 설명한다면, 선과 악, 참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등은 서로 갈라놓 고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대적인 것들이 다 들어 있다. 선악(善惡).진위(眞僞).미추(美醜) 등 없는 것이 없다.
윤회의 길에는 사람이 미혹과 악업과 고통을 짓거나 겪게 되고, 해탈의 길에는 지혜(智慧)와 수행(修行)과 법신(法身)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서 윤회의 길도 될 수 있고 해탈의 길도 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부처의 10계가 다 들어있다.
지옥에 있는 사람도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부처도 지옥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단지 지옥에 있는 이는 부처의 마음을 놀리고 지옥의 마음만을 쓸 뿐이며, 부처에 있는 이는 지 옥의 마음을 쉬게 하고 부처의 마음만을 쓸 뿐이다. 부처와 지옥의 차이는 어느 쪽의 마음 을 쓰느냐의 문제이지, 지옥과 부처 둘 중의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불교 집안에서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사람의 마음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선과 악, 더러운 것과 깨 끗한 것을 대립시키는 의미에서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불도를 닦으면 부처와 같 이 청정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깨끗하다는 것이다.
악을 우리의 본성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부처의 세계가 아닌 중생의 세계, 즉 현실 세계는 선보다는 악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선만을 귀히 여기고 악을 부정한다면, 부처의 세계만 중히 여기고 우리가 살고 있는세계는 쓸데없는 것을 취급하는 것이 된다. 만약 우리가 악이 더 많은 이 세계를 부정 한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고 부처가 될 것이며, 부처가 된 다음에는 어떤 중생을 구제하려고 할 것인가.
악의 세계를 쓸모 없는 것으로 친다면, 그 안의 중생들이 죽든지 살든지, 지옥에 빠지든지 부처가 되든지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말이다. 한 단계 더 높이 마음을 돌려서 생각해 보면, 선과 악은 좋아하거나 싫어해 야 할 것이 아니라, 깨우쳐야 할 것일 뿐이다. 선이나 악이 우리 마음 강운데 있기는 하지 만, 실체가 없다. 악의 뿌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단지 '잘못 길들여진 습관' 일 뿐이다. 미혹의 업이라는 말이다. 앞을 못 보는 장님이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불 쌍히 여길지언정 미워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악에 대한 미움은 상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 이나 선택을 중심을 계산해 보는 데서 나오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일 뿐이다.
악을 쉬자. 불쌍히 여기자. 선을 행하자. 그러나 인간 존재 그 자체인 악을 절대로 미워하지 는 말자.

*석지명 스님은 동진 출가하여 범어사 강원과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 플대학 종교학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청계사 주지로 계시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