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아, 돌아오다-렘브란트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2022-07-08     보일 스님
렘브란트가 자신의 그림 속 그 탕아로부터 자기 모습을 본 <돌아온 탕아>(1668)

한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로 늙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는 듯한 자세로 있다. 무릎 꿇은 아들의 뒷모습에서 다 낡아 헤진 그의 신발이 눈에 띈다. 그의 오른쪽 신발 뒤꿈치는 아예 닳아서 온데간데없고, 왼쪽 신발은 벗겨진 채였다.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 그대로였다. 큰 체구의 아버지는 초라하고 힘들어 보이는 아들을 자비롭게 안아 준다. 아버지는 “아들아, 이제야 돌아왔구나’ 하는 듯하고, 아들은 가만히 아버지의 품에 기댈 뿐이다. 이 아들은 가출하기 전에 아버지께 자신 몫의 유산을 요구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불효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게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게 된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은 아들은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서 온갖 향락을 즐기다 만신창이가 된 아들은 비로소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부자의 상봉을 지켜보는 가운데, 잔뜩 못마땅한 형의 표정이 아버지와 탕아의 표정과는 대조를 이룬다. 평생 아버지를 곁에서 모셨건만, 자신은 받아보지 못한 환대와 사랑에 질투심이 묻어난다. 아버지는 아들이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한 눈빛이다. 탕아의 얼굴은 이제 밝고 평화롭다. 욕망에 휘둘렸던 과거의 번뇌가 더는 없다. 이제 고향에 다다른 것이다. 그 고향은 신(神)일 수도 있고 실제 가출했던 집일 수도 있다. 혹은 본래 마음자리이기도 하다. 

이미 노쇠한 아버지는 단순히 아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쇠한 그의 팔을 뻗어 아들의 등을 꼭 누르고 있다. 다시는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마치 새가 보금자리에서 알을 품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이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성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치유의 느낌을 받는다. 욕망에서 평정으로, 증오에서 화해로, 어둠에서 빛으로 변하기를 염원하는 인간의 마음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기독교의 「누가복음」(15:11~32) 과 불교의 『법화경』 「신해품」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내용이다. 기원을 달리하는 두 종교가 어떻게 해서 유사한 이 에피소드에 주목하게 됐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렘브란트에 의해, <돌아온 탕아>(1668)라는 작품으로 다시 재현된다. 인생 말년에 렘브란트는 그의 삶 전체를 이 작품에 투사한다. 어쩌면 렘브란트는 자신의 그림 속 그 탕아로부터 자기 모습을 본 듯하다.

렘브란트의 젊은 시절 <자화상>(1630)

 

렘브란트의 생애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은 1606년 당시 네덜란드 제2의 도시 레이던에서 태어났다. 방앗간 집, 아홉 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였다. 아버지는 개신교도였지만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아마 렘브란트의 성서에 관한 해박하고 수준 높은 이해는 부모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가장 번영을 구가했다. 17세기 이른바 ‘네덜란드의 황금시대’가 렘브란트에 의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화가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었고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많이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렘브란트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목받는데,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로 젊은 나이에 이미 엄청난 명성을 얻는다. 그로 인해 렘브란트는 오만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쳤다. 사치스러웠고, 수집광이었으며, 낭비벽도 심했다. 렘브란트는 전성기를 맞이했을 무렵, 귀족인 사스키아와 결혼한다. 그는 사스키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그래서인지 그의 초상화에는 사스키아가 자주 등장한다. 

첫 번째 부인인 사스키아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 후, 렘브란트는 어린 아들 티투스의 보육을 위해 들인 보모 핸드리케와 사랑에 빠진다. 사스키아는 렘브란트가 재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유산을 남겼기 때문에 둘은 합법적인 결혼을 할 수 없었지만, 핸드리케는 평생 렘브란트 곁을 지킨다. 그러나 당시 개신교회의 금욕적 분위기는 둘의 관계를 용납하지 않았고, 렘브란트는 교회로부터 공식적 비난까지 받게 된다. 

딸이 태어나면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지게 됐다. 사랑했던 두 여인을 자신보다 먼저 보냈고,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파산한다. 렘브란트는 비참하고, 외롭고, 초라한 모습이 되어서야 비로소 참회하는 마음으로 말년까지 작업에 몰두하다 죽음을 맞게 된다. 

 

‘테네브리즘’의 대표적 작품 <야간순찰>(1642)

테네브리즘 혹은 렘브란트 라이팅

렘브란트의 수많은 작품을 관통하는 예술 기법이 있다면 그것은 ‘테네브리즘(Tenebrism)’일 것이다. ‘테네브리즘’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채에 강한 명암대조를 통해 빛이 점증적으로 밝아지거나 소멸해가는 장면을 묘사하는 기법이다. 마치 연극 무대의 조명처럼 극적 효과를 내게 된다. 이 기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야간순찰>과 <돌아온 탕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634), <유대인 신부>(1665~1669경) 등이 있다. 렘브란트의 두 번째 스승이었던 피터르 라스트만(Peter Lastman)이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테네브리즘’의 창시자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렘브란트의 능숙함이 이해된다. 렘브란트는 이 기법으로 화가가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지, 감상자는 어디에 주목해야 할지를 가리킨다. 

‘테네브리즘’의 대표적 작품인 <야간순찰>(1642)은 인물 모두가 살아 숨 쉬는 듯 각자 분주한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르네상스 스타일의 정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렘브란트 바로크’라고 불리는 스타일로, 동적이면서 극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또한 20대에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보여준다. 시체를 보는 강의 참가자들 각각의 표정을 생생히 표현한다. 호기심 어린 시선, 생각에 잠긴 얼굴, 외면하는 얼굴, 살짝 두려워하는 얼굴 등 수강생들의 얼굴을 놀라운 관찰력으로 포착하고 있다.

젊음 나이에 명성을 가져다준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

 

렘브란트의 노년 모습이 담긴 <자화상>(1661)

자화상

렘브란트는 그의 일생을 자화상으로 요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순히 여느 화가들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는 생생한 내면 묘사는 보는 이에게 몰입감을 더해준다. 그만큼 그의 자화상은 누가 봐도 깊이가 느껴지고 차원이 다르다. 평면인데도 부피와 질감이 느껴진다. 일말의 허위나 위선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냉소적일 정도로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색채를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욕망과 회한 그리고 평화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외부적인 경제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의 정신적 성숙과 표현의   
  힘은 날로 더해지는 것 같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절하기보다 회화적으로 
  소생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오.”
  __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편지’ 중에서

렘브란트는 <야경>의 실패 이후, 자화상에 몰두한다. 특히 그의 나의 63세 때 그린 자화상은 세파에 찌든 늙은이 모습으로 과감하고 솔직하게 담아낸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과 대비시켜보면 인생의 무상함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무렵 <돌아온 탕아>가 탄생한다. 물론 30년 전에도 같은 주제인 <탕아>를 그렸지만 비교해보면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오히려 이 시기에 예술가로서 더욱 성장한다. 이때부터 렘브란트는 남을 풍자하거나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상태를 색채로 옮기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렘브란트는 절망과 시련, 가난 속에서 오히려 그의 예술의 깊이를 더해간다. 비로소 자신만의 예술이 나오기 시작한다. 렘브란트는 더 팔리지도 않는 그림이었지만, 오직 예술혼을 불태우며 작업을 이어갔다. 

 

“당신은 이제 진정 돌아온 겁니까?”

아들마저 먼저 보내고 난 <자화상> 속 렘브란트의 노년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초라하고 수척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표정에는 인생의 회한이 묻어난다. 어쩌면 렘브란트의 말년 자화상에 드러난 그의 인생 자체가 덧없음을 표현하는 ‘바니타스(vanitas)’ 혹은 격렬하게 명암이 대비되는 ‘테네브리즘’이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탐욕과 증오, 어리석음으로 가득 점철된 삶을 살기도 하지만 또한 어느 순간 그 번뇌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인생은 렘브란트가 그러했듯이 방황하는 탕아의 여정일 수도 있다. 

렘브란트는 그 자신이 되어야 할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탕아가 그간의 모든 욕망과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찾아가듯이,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마음속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이다. 어쩌면 <돌아온 탕아>야말로 렘브란트 인생을 함축한 그의 마지막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말년의 자화상 속 렘브란트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제 진정 돌아온 겁니까?”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