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염불하는 스님들

만년의 김홍도, 삶을 달관하다

2022-05-26     조정육
<삼공불환도>(보물), 1801, 견본수묵담채, 418.4×133.7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김홍도가 57세에 그린 8폭 병풍 그림으로 풍속화와 산수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전원의 즐거움을 삼공(三公)의 높은 벼슬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다. 강을 앞에 두고 산자락에 위치한 기와집과 논밭, 손님치레 중인 주인장, 심부름하는 여인, 일하는 농부, 낚시꾼 등을 곳곳에 그려 전원생활의 한가로움과 정취를 표현했다. 

김홍도의 나이 56세 때였다.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승하했다. 갑작스러운 변고였다. 어람용 그림을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특별대우를 받았던 김홍도에게 정조의 승하는 매우 충격이었다.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김홍도의 삶은 급속도로 피폐해졌다. 그에게 주어졌던 특혜는 일시에 사라졌다. 그는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화원 생활을 계속했다. 60세가 되던 1804년에는 제자급 후배 화원인 박유성과 함께 규장각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국왕의 직속에 둔 화원)으로 뽑혔다. 그런가 하면 회갑이 되던 1805년에는 성적순에 따라 녹봉직을 받는 취재시험에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러나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한 기간도 잠시였다. 오래전부터 앓았던 천식과 병환 때문에 차비대령화원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과부가 된 딸마저 병으로 위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외아들의 훈장댁에 보낼 월사금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회갑을 맞은 그해 겨울에 전라도 감영으로 내려갔다. 전라도에는 평소 안면이 있던 심상규(沈象奎)가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심상규가 지인에게 쓴 편지에는 김홍도가 “굶주리고 아픈 상태로 취식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면서 “지금 한낱 애석한 호한으로 어렵고 딱하기가 이와 같으니 동국의 타고난 재주로 가당치도 않다”고 탄식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805년 12월 1일에 그린 그의 절필 작 <추성부도(秋聲賦圖)>에는 당시 김홍도의 심정이 절절히 묘사돼 있다. 이 시기에 스님을 그린 그림에도 만년에 그가 겪었던 비애와 쓸쓸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인생 후반기에 겪은 비애

김홍도는 20대에 ‘사능’을, 40대와 50대 중반에 ‘단원’을 호로 썼는데 50대 후반부터는 ‘단구(丹丘)’ 또는 ‘단구(丹邱)’를 주로 썼다. ‘단구’는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의 심정이 반영된 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단원 늙은이’라는 뜻의 ‘단로(檀老)’도 사용했다. <좌수도해(坐睡渡海)>에서는 ‘단구(丹丘)’를, <습득(拾得)>에서는 ‘단구(丹邱)’를 썼고, <노승염송(老僧念誦)>과 <염불서승(念佛西昇)>에서는 모두 ‘단로’라고 적었다. ‘단구’와 ‘단로’가 적힌 그림은 거의 1800년 이후에 제작됐을 것이다. 정조의 승하 이후 김홍도가 겪었을 심정 변화는 어떠했을까.

<좌수도해>, 지본담채, 38.4×26.6cm, 간송미술관 소장

먼저 ‘단원’이라는 호가 적힌 <절로도해(折蘆渡海)>와 ‘단구(丹丘)라고 적힌 <좌수도해>를 비교해보자. 두 작품은 모두 달마대사가 갈댓잎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절로도해>는 도석인물화의 전통적인 소재로 김명국(金明國), 심사정(沈師正)의 작품이 현존한다. <좌수도해>는 파도 위에서 어린 사미승을 잠자는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심사정의 작품이 선구적이다. 

단원 시절에 그린 <절로도해>는 배경이 생략된 채 갈댓잎을 밟고 있는 달마대사를 그렸다. 인물을 묘사한 선은 그의 후기 도석인물화의 특징처럼 구불구불하게 그렸고, 갈댓잎은 세세하게 표현해 대조를 이룬다. 달마대사의 얼굴과 가사에는 연한 채색을 넣었으며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모습도 조선 사람처럼 현실감 있게 그렸다. 반면 <좌수도해>에서는 어린 사미승이 심하게 파도치는 물결 위에서 몇 가닥의 갈댓잎을 의지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인물을 묘사한 선과 갈대 등은 간략한 필치로 그렸으며 푸른빛의 파도가 이곳이 깊은 바다임을 암시한다. 어린아이가 깊은 바다를 건너면서 고단한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절로도해>, 지본담채, 58.3×105.5cm, 간송미술관 소장

<절로도해>와 <좌수도해>는 같은 주제를 그렸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전자가 단원 시절의 여유와 기백이 담겨 있다면 후자에서는 마음을 비운 듯한 허허로움이 담겨 있다. 이것은 그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달마대사를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린 작품은 조선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으로 심사정, 김홍도, 이수민(李壽民) 등이 이 주제를 그려 흥미롭다. 

<좌수도해>에서 느낄 수 있는 텅 빈 듯한 허허로움은 ‘단구(丹邱)’를 적은 <습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습득은 한산(寒山)과 함께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서 풍간선사의 제자로 살았던 인물이다. 한산은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습득은 풍간선사가 산길을 걷던 중 길옆에서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주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름이 ‘습득’이다. 

<습득>, 견본담채, 15.2×21.5cm, 간송미술관 소장

<습득>에서 인물은 옆모습을 하고 쭈그리고 앉았는데 바닥에 놓인 지팡이가 가로로 놓여 있다. 인물의 모습은 옆얼굴과 다리 일부만이 드러나 있고 대부분은 검은 먹색으로 칠해져 있다. 보현보살의 화신이면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던 습득을 그리면서 김홍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림 상단에는 ‘오소선법(吳少仙法) 단구(丹邱)’라고 적었다. 오소선은 명대 절파화가로 도석인물화를 잘 그린 오위(吳偉)의 별호(別號)이다. 따라서 <습득>은 김홍도가 오위의 화법을 따라 그렸다는 뜻이다. 생략적인 필치에서 평생 누더기로 살았던 습득의 인물상이 농축돼 있다.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마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김홍도가 마지막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은 <노승염송>과 <염불서승>이다. 두 작품 모두 ‘단로’라고 적혀 있다. 정면이 아닌 옆면과 뒷면을 그린 것이 공통점이다. <노승염송>은 매우 단순한 구도로 스님과 동자를 배경 없이 그렸다. 스님은 두 손을 맞잡고 약간 고개를 숙인 모습이 예배를 드리는 듯하며 동자는 석장을 들고 옆에 서 있다. 인물은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되 구불구불한 선과 먹의 농담 변화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상단에는 ‘단로’라는 관서 옆에 ‘입으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끝없이 염불하네(口誦恒阿沙復沙)’라는 글을 적었다. 김홍도가 만년에 염불에 주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가 붕어(崩御)한 후 삶의 무상함과 신산스러움을 뼈저리게 느낀 김홍도가 세속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을 모두 내려놓고 초탈한 심정에서 붓을 든 작품이다. 

<노승염송>, 지본담채, 19.7×57.5cm, 간송미술관 소장

<노승염송>이 염불을 생활화한 정토행자의 모습을 그렸다면 <염불서승>은 죽음을 앞둔 김홍도가 자신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마지막으로 부처님 전에 올린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뒷모습을 한 스님은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머리에는 두광이 달처럼 환하게 빛난다. 연꽃대좌 밑으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스님은 지금 극락정토가 있는 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 극락정토는 아미타부처님이 세운 청정하고 안락한 세계다. 그곳에는 다섯 가지 흐린 것, 오탁(五濁)이 없고 생로병사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이 없고 오직 즐거움만이 상존한다. 

우리 중생들에게 극락정토는 ‘필경 돌아가야 할 본래 고향’이다. 본래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극락세계를 동경하고 흠모하며 그곳에 이르기 위한 간절한 서원을 세우고 한량없는 선근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염불이다. 김홍도가 그린 「염불서승」에는 그의 말년의 염원이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김홍도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한 선근과 복덕으로 염불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염불서승>은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마다 오직 나무아미타불(步步聲聲念念唯在南無阿彌陀佛)’을 외우며 극락왕생을 발원한 숭고함과 초탈함이 담겨 있다. 

<염불서승>, 모시에 수묵담채, 28.7×20.8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노년의 고통 속에서 진정한 불자가 됐다. 그가 30대에 그린 <탁발>, <서원아집도> 속의 스님과 말년에 그린 <노승염송>, <염불서승>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예술가에게 그림 재주는 단순히 사물을 보고 베끼는 능력이 아니다. 김홍도는 노년에 겪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주저앉고 좌절하는 대신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끝없이 염불’하면서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김홍도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 삶에서 겪게 되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김홍도는 한국미술 5,000년을 통틀어 최고 가는 작가라고 평가받는다. 그를 불세출(不世出)의 화가로 평가하는 이유도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김홍도 같은 작가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그림을 잘 그렸다. 그런데 만약 그에게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 후 겪어야 했던 병고와 생활고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단원 시절에 그린 <절로도해>와 같이 ‘잘 그린 그림’은 그렸을지언정 <염불서승>이나 <노승염불>같이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해주는 작품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습득>같이 선기(禪氣) 가득한 명작의 세계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전성기에 그렸던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에서 화업을 마쳤을 것이다. 

따라서 김홍도가 만년에 겪었던 불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당사자에게는 한없이 힘든 고통이었겠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에게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처지가 행복하고 편안하면 부처님의 가피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가피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문제투성이인 고통에서 삶의 무상함과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혹시 김홍도의 불행에 버금가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용기와 힘을 내야 한다. 고통이 축복이 되는 것은 김홍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참고문헌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조선화원대전』, 삼성미술관 리움, 2011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문학박사로 동양화에 관련된 글과 강의를 한다. 『시절인연 시절그림』,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옛 그림, 불교에 빠지다』 외 20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