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부처를 그리다

‘석가출산도’와 ‘묘길상’

2022-05-26     손태호

석가모니 부처님을 그리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일러 모든 부처님이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가. 모든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 부처님의 지혜)을 열어주어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이려고,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깨닫게 하려고,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도에 들어가게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__ 『법화경』

18세기 조선 궁중 화원 단원 김홍도는 풍속, 인물, 산수, 초상, 영모, 화조 등 거의 모든 주제의 그림을 두루 잘 그렸다. 그래서 정조(재위 1776~1800)의 신임이 매우 두터워 정조가 1790년 아버지 사도세자 묘 화성 융릉 옆에 원찰인 용주사를 세울 때 불화 제작을 김홍도에게 주관하게 했다. 그렇게 불교와 직접 인연을 맺은 김홍도는 이후 불교 주제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비록 크기가 작고 제발(題跋, 발문)이 있는 경우도 드물지만 오묘한 불교적 이해가 바탕이 된 작품들이라 의미가 적지 않은 작품들이다. 

김홍도의 불교회화는 관음보살과 달마, 고승과 산사 등을 그린 작품들이 많지만 직접 부처님을 묘사한 작품도 있다. 그중에서 <석가출산도(釋迦出山圖)>는 김홍도의 감상용 불교회화 중 석가모니 부처님을 직접 묘사한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궁중 화원 전체로도 단 한 점밖에 없어 그 의미가 매우 큰 그림이다.  

<석가출산도>, 18세기, 지본담채, 69.6×133.5cm, 일본고려미술관

아직 수행자인 석가모니께서 얇은 대의 한 장을 걸치고 맨발로 설산을 내려온다. 곱슬곱슬한 나발과 중간에 보이는 민 머리가 마치 중앙계주를 연상케 한다. 얼굴은 매우 피곤해 보이며 깎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해 그동안의 고생을 짐작게 한다. 구불거리는 납의(衲衣)의 선은 김홍도가 불보살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한 선이다. 

대의 끝자락이 펄럭이고 있어 마른 육체가 더욱 애잔해 보인다. 뒤에는 커다란 달이자 두광이 마치 앞으로의 성불을 예견하듯 비취고 있다. 이런 ‘달이자 두광, 두광이자 달’ 이중적 표현은 <남해관음>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법이다. 이 작품의 관지(款識)는 ‘金弘道謹寫(김홍도근사)’라고 자신을 많이 낮추고 있어 특별히 윗사람과 관련된 그림으로 추정되는데 평소 존경하던 스님을 위해 그린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은 중생을 위한 ‘일대사인연’으로 오셨다고 한다. 즉, 부처님이 되어 중생에게서 무명의 어둠을 걷어주시기 위해 수많은 과거세의 인연 공덕을 모아 우리 곁에 오신 것이다. 그렇게 많은 과거의 복덕을 쌓은 부처님도 깨달음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식의 수행을 시도하며 진정한 깨달음의 길을 찾기까지는 고뇌와 고난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출가 초기에는 선정 수행의 대가를 찾아가 명상을 중심으로 한 수행을 했으나 선정만으로 자신의 근본 의문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후 고행림(苦行林)에서 육체적 고행을 통해 정신적 희열을 얻는 수행을 시작한다. 이 수행은 인간 욕심의 근원인 육체의 즐거움을 없애기 위해 6년 동안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험난한 고행이었다. 부처님은 그 시절을 ‘낡은 수레가 허물어지듯 내 몸도 그렇게 허물어져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 엉덩이는 낙타 다리 같았고, 손으로 배를 누르면 등뼈가 닿았다. 몸이 이처럼 쇠약해진 것은 다 내가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태자는 6년간의 극한 고행을 통해서도 생사윤회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선정과 고행이라는 양극단이 아닌 중도를 통해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강에서 목욕한 후 수자타 처녀의 우유죽을 공양받아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힘을 얻은 후 성도처인 보리수나무에서 최후 선정에 몰입한다.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행을 멈추고 산에서 세속으로 내려오는 사건은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이정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을 회화로 묘사한 작품이 바로 <석가출산도>이다. 김홍도가 석가모니의 위대한 발걸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쉽게 그릴 수 없는 작품이다. 

김홍도는 석가모니 설산출산(雪山出山)의 장면을 우리나라 불화에서는 접할 수 없었기에 아마도 참고한 다른 회화 작품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본으로 추측되는 작품이 바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화가 양해(梁楷)의 <출산석가도(出山釋迦圖)>이다.

양해, <출산석가도>, 13세기, 견본채색, 52×117.6cm,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이 작품을 보면 배경을 제외하면 자세, 끝자락 날리는 가사 표현 등이 매우 흡사하다. 덥수룩한 수염과 보발의 모습도 똑같다. 

중국 산동 출신의 양해는 남송대의 화원 화가로 술을 매우 좋아하고, 인물, 산수, 도석을 잘 그려 우리나라에도 작품이 알려진 화가였다. 김홍도는 이런 중국의 불교회화를 참고해 조선의 미감에 맞게 배경을 생략하고 넓은 여백을 활용해 감상자가 인물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인물화로 탄생시켰다. 

 

<묘길상>과 <묘길상> 

김홍도는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정조의 명으로 용주사 불화를 제작한 이후 불교에 관심이 높아져 대구 남지장사 중창 불사에 시주자로 참여했고 연풍 현감 근무 시기에는 주변 상암사에 자신의 녹봉을 털어 시주하기도 했다. 그런 정성의 가피로 48세에 첫아들을 얻자 더욱 불교를 신봉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1796년에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변상도 제작에 참여할 만큼 불교에 깊이 심취한다. 이렇게 깊어진 불심으로 그려낸 작품이 바로 <묘길상>(그림 1)이란 작품이다. 

그림 1. <묘길상>, 지본담채, 18.2×23.6cm, 간송미술관 소장 

법기보살의 도량인 금강산 마하연 위쪽에 있는 20m 높이의 거대한 마애불인 ‘묘길상’은 예부터 이름난 명승지다. ‘묘길상’은 문수사리의 의역으로 문수보살을 일컫는 이름이다. 묘길상의 의복과 생김새로 볼 때 보살이 아니라 불상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묘길상’으로 불려 김홍도 당시에도 그렇게 불렸다. 

그림 속의 묘길상은 넉넉하고 편안한 상호, 부드러운 대의 등 실제 마애불보다 더 자애롭게 표현됐으나 삼도(三道, 불상의 목에 가로 새긴 세 개의 주름)의 표현, 설법인의 수인 등 불교 도상에도 충실히 따랐다. 또 주변의 나무, 감실, 사각 석등 등 실제 현장과도 똑같다. 묘길상 앞에는 고깔을 쓴 두 분의 스님이 허리를 숙이며 참배를 하고 있다. 이렇게 불상에 예를 올리는 표현은 조선시대 금강산 묘길상을 묘사한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이렇게 예를 올리는 스님의 등장으로 이 작품은 단순한 명승을 소개하는 그림이 아닌 바위 속에서 나투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종교적 의미가 강한 그림이 됐다. 김홍도는 그런 의미를 더 강조하고자 오른쪽 소나무 가지도 허리를 숙이는 승려와 호응하며 긴 가지를 밑으로 숙이며 내리고 있어 참배의 의미를 더욱 강조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고개를 숙이는 스님의 얼굴에는 환희심이 넘쳤을 것이다. 그런 스님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자비의 미소를 머금고 계시다. 작품 전체에 부처님과 제자 사이에 따뜻함이 느껴져 뭉클해진다. 이런 불교적 감흥은 김홍도가 불교에 심취하기 전에 그린 다른 <묘길상>(그림 2)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림 2. <묘길상>, 지본담채, 43.3×28.4cm, 간송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1788년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 사경 여행을 다녀온 후 그린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산수화로 명승지 경관 묘사에 충실한 그림이다. 묘길상 앞에는 시동을 거느리고 마애불을 감상하고 있는 선비가 아마 김홍도 자신일 것이다. 

당시 선비나 유학자들에게 불교 유적지는 유람의 공간이나 명소의 의미 또는 숙박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김홍도의 스승이자 여러 점의 불교 명승지를 작품으로 남긴 표암 강세황조차도 ‘금강산의 봉우리, 골짜기 이름이 모두 불교 명칭이나 속담에서 나온 것이니 비루하여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을 정도로 불교 유적지는 그저 경치 좋은 관광 명소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불교 유적지가 묘사된 실경산수화들 대부분은 경관을 보여주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이 <묘길상>도 마애불의 모습이 실제 조각보다 더 자연스럽고 나무도 꼼꼼하게 묘사됐지만 앞서 소개한 <묘길상>과 달리 종교적 감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평범한 산수화일 뿐이다. 불상의 상호도 자비의 미소는 사라지고 딱딱한 무표정으로 묘사됐다. 이처럼 김홍도는 똑같은 장소를 그렸음에도 전혀 다른 두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묘길상 마애불과 돌등>, 『북한의 전통사찰』 ⑩강원도, p297,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제공.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 2,600여 년 전 이 땅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또 수행자인 태자가 성불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런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진다. 우리는 세상살이가 힘들거나 괴로울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을 때, 부처님께 엎드려 묻곤 한다. 만약 나침반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욕심의 바다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가여운 중생을 위해 일대사인연으로 우리 곁에 오셨다. 법당의 불상과 불화로, 마애불과 탑으로, 경전과 진언으로, 김홍도의 그림으로도 오셨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부처님을 만나는 소중한 인연이 있으니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삼불암>, 《해동명산도첩》 중에서, 30.5×2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삼불암 전경>, 『북한의 전통사찰』⑩강원도, p277,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제공
금강산과 관동 지방의 명승지를 먹으로 그린 《해동명산도》 초본첩은 그림의 소재, 내용, 구도, 필치까지 현재 김홍도 작품으로 전해지는 60매의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과 매우 유사하다. 김홍도 이후 19세기에 그려진 금강산, 관동지방의 그림들은 김홍도의 60폭 금강산 그림을 거의 그대로 모사한 경우가 많다. 삼불암은 장안사에서 표훈사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마애불이다. 현재, 과거, 미래의 구원을 상징하는 석가, 아미타, 미륵의 3부처 입상이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안휘준·민길홍, 『조선시대 인물화』, 학고재, 2009
장진성, 『단원 김홍도』, 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송문화』 NO68 단원, 2005

 

손태호 
동국대 미술학 박사. (사)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현대적 응용함으로써 대중과 함께하는 미술사 연구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조선 및 근대 한국회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저술과 강연을 하고 있다. 문화예술전문 ㈜인더스투어를 운영하며 국내외 불교유적답사 및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를 세우는 옛 그림』(2012),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2017), 『조선불상의 탄생』(202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