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자비의 화신 빚어 불멸을 살다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2022-06-10     보일 스님
“예술은 아내, 자식은 작품”이라며 예술혼을 불태운 미켈란젤로

 

피에타 

한 여인이 꼬마 아이를 안고 실성한 듯 앉아 있다.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은 멍하니 하늘을 응시한다. 그 여인은 그 아이의 엄마인 듯하다. 엄마의 품속에서 꼬마 아이는 고개와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눈을 감고 있다. 딸아이의 죽음이 믿기지 않은 듯 망연자실한 모습 그대로이다. 사람이 극한의 슬픔에 빠지면 눈물조차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바로 그 순간이 그랬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공에 항전을 시작하던 초기, 러시아 공군의 폭격에 마리우폴에 살던 여섯 살 꼬마, 소녀는 숨을 거두었다. 이 소녀는 집 근처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이의 부모는 의식을 잃은 아이를 안고 근처 병원으로 달려갔고,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필사적이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렇게 핑크 유니콘 파자마를 입고 있던 소녀는 엄마 품에 안긴 채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 소녀의 엄마는 소리 없는 통곡을 할 뿐이었다. 그 어떤 슬픔도 이보다 더하진 않을 것이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도 끔찍한 폭력이지만, 한 발짝 더 들여다보면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동시에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은 또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우린 지금 증오와 폭력만이 살아갈 이유가 되는 야만의 현장, 한복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서양 속담에 ‘흔히 참호 속에서 무신론자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신이나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막상 폭탄이 쏟아지는 아비규환 속에서는 무언가 의지할 만한 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고통과 번뇌 속에서 자비와 연민을 배워간다. 그 꼬마 소녀의 죽음은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에서 보게 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너무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 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순간 묘하게도 <피에타>가 겹쳐지듯 연상됐다. 더 이상의 비통함이 없을 정도로 극한의 슬픔이 몰려올 때, <피에타>의 처절하면서도 자비로운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 <피에타>

 

미켈란젤로를 만나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바로 이 불멸의 예술 작품 <피에타>를 남긴 예술가이다. 무엇이 미켈란젤로에게 이토록 슬프고 아름다운 피에타를 세상에 내놓게 했을까? 내가 미켈란젤로를 처음 만난 것은 9,000km 가까이 날아서 간 바티칸 시티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였다. 

5년 전이었다. 해인사 승가대학의 학감 소임을 맡으면서 서서히 몸과 마음이 소진되고 있었다. 무슨 역마살이라도 발동한 것인지 그때는 그저 잠시만이라도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동안거를 해제하자마자 바랑을 꾸려 이탈리아로 향했다. 두루마기 승복 입고 버젓이 이웃 종교의 대문을 드나드는 뻔뻔스러움도 당당함으로 위장했지만, 적잖게 주변 시선을 끌었다. 

며칠을 머물면서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성 베드로 성당에 갔다가 <피에타>와 마주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때만 해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매번 헷갈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피에타 성상 앞에 선 순간 오직 이 조각상이 주는 에너지 앞에서 매료당하고 말았다. 예수를 무릎에 올려놓은 성모 마리아의 옷자락에 생긴 주름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생생했다. 대리석으로 깎아 묘사한 것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힘없이 늘어뜨린 예수의 팔 근육은 섬세하다 못해 모세혈관마저 다 비치는 듯했다. 특히 예수의 등을 오른손으로 받쳐 든 성모 마리아의 손가락에 움푹 눌린 겨드랑이 부위를 묘사한 것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극한의 고통과 함께 따뜻한 자비가 함께 느껴졌다. <피에타>를 보고 있노라면, 미켈란젤로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혼자서 짊어지겠다는 서원이라도 세운 듯한 생각이 들었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위해 셀 수 없이 망치로 내리치고, 톱으로 베고, 끌로 다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얼굴과 전신에 흰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말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번아웃 증후군과도 같은 상태에서 헤매다가 그 <피에타>를 통해 미켈란젤로를 만날 수 있었다. <피에타>를 실물로 처음 본 순간, 그것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피에타>가 미켈란젤로를 소개하는 듯했다. ‘자, 여기 평생 오직 자비의 화신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살다 간 한 남자가 있습니다’라고 말이다. 

사실 <피에타>는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그 조각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이탈리아어 ‘피에타(Pietà)’는 동정, 연민,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이다. 후에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예술 주제를 일컫는 말로 불리게 됐다. 그 <피에타>가 미켈란젤로에 의해 세상에 처음 선보여졌을 때, 수많은 논란에 휩싸인다. 성모가 너무 젊어 보인다는 둥, 신체 비율상 주인공이 예수가 아닌 성모가 되어 버렸다는 둥 말이 많았다. 이 시선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대답이 매우 흥미롭다. 

“이 조각은 신에게 바치는 것이니, 
인간의 시선으로 평가하지 말라.” 

놀랍게도 실제로 위에서 촬영한 피에타를 보면 예수의 신체 비율이 압도적인 비중으로 드러난다. 

50대 무렵으로 묘사되어야 했을 성모는 20대의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영원한 신성을 상징하는 성모를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견해를 비롯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피에타> 조각상의 성모 마리아는 마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수인처럼 손바닥을 펴서 하늘을 향한다. 이제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뜻에 맡긴다는 모습처럼 보인다. 슬픔과 비탄마저도 다 내려놓은 손짓이다. 그래서일까. <피에타> 앞에 서 있으면, 마치 고해성사하러 온 신자처럼, 지난날 겪었던 슬픔과 고통을 떠올리고 자연스레 그 감정과 화해를 시도하게 된다.

인류사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조각가 혹은 화가, 미켈란젤로

“형상은 처음부터 돌 속에 있다.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냈을 뿐.”

 1475년,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부근의 작은 마을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병약했기에 유모의 손에 맡겨졌다. 그의 나이 6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마침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어서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멩이를 장난감 삼아 놀면서 자랐다.

“내게 조금이라도 조각에 천품이 있다면 그것은 자네 고향인 아렛조의 맑은 공기와 그곳 유모의 젖으로부터 조각에 쓰이는 망치와 끌을 빨아먹은 덕일세.”
 __  제자 바사리에게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은 그 자신이었고 그의 삶 자체이자 기도이자 수행이었다. 인류사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1508~1512) 작업을 교황으로부터 의뢰받았을 때조차 모욕으로 받아들인 그였다.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는 이유에서였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설하듯 인생은 막히는 곳에서 오히려 통한다. 자신이 조각가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구에 크게 반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또한 인류 최고 회화로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미켈란젤로가 처음 그린 회화가 그 정도였다니 천재라는 단어마저도 싫증 날 정도이다. 미켈란젤로는 평생을 조각과 회화,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는 오직 예술만을 화두 삼아 고통스럽고 외롭게 삶을 살아낸 것이다.      

“이미 내게는 나를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드는 너무 과분한 아내가 있다. 
그녀는 바로 나의 예술이요, 
나의 자식은 나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18일, 89세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도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책임자로 일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소망대로 비밀리에 로마에서 피렌체로 운구됐다. 현재는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작곡가 로시니 등이 묻혀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 안치됐다. 미켈란젤로에게 예술은 삶을 지탱하는 기도이자 수행 그 자체였다. 마치 비구의 일생처럼 평생 독신으로 외롭게 살다가 오롯이 예술혼을 불태웠다. 불꽃 같은 삶을 열정으로 완전히 소진해 버린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렇게 그의 불은 꺼졌다. 

“내 인생 여정은 모두 끝났으니/(…중략…) 내 탐미로운 생각 중에 다가오는 것은 한때는 즐거웠으나 또 다른 때는 허망한 것 / 죽음을 향해 내가 나아가니 한때는 확실했으나, 지금은 두려운 것 / 내 작품과 조각은 모두 헛된 것일 뿐/ 거룩한 사랑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 우리를 안아 주시는 십자가에서 벌린 그분의 팔에 비한다면.” 
 __  미켈란젤로가 1554년에 쓴 시, 소네트 283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피에타,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한 의미로 와 닿는 요즘이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전쟁의 참화 속에 있는 사람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나 그것은 고통 그 자체이다. 고통과 슬픔, 비탄, 절망…. 사람들은 꼭 전쟁을 겪지 않더라도 나름 각자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수많은 언어적 위로와 물질적 위안보다도 한 인간의 혼이 담긴 예술 작품이 전해주는 묵직한 울림에 공명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말과 생각을 넘어선다는 뜻이 그런 것이리라. 

그해 늦겨울, <피에타> 성상 앞에 서서 느꼈던 감동은 다름 아닌 ‘자비심’이었다. 그저 ‘다 괜찮다. 다 괜찮다’하고 귓가에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왠지 모를 서러움에 울먹이다가 ‘그래 다 괜찮아질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를 수도 없이 되뇌었다. <피에타> 앞에서 자비를 느끼고 미켈란젤로를 알게 됐다. 그렇게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미켈란젤로가 빚어낸 자비 앞에서 위로받거나 위안을 느낀다. 그렇게 세상은 미켈란젤로에게 줄어들지 않는 빚을 지게 된다. 

<피에타>는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미켈란젤로의 기도문이다.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슬픔과 참혹함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염원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 숨을 거둔 꼬마 소녀를 안고 있는 엄마이기도 하고,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이기도 하다. 그것이 성모 마리아면 어떻고, 관세음보살이면 어쩌랴. 바로 지금이라도 전쟁의 고통이 멈추고 자비롭게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