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소확행#] 다다익선多茶益善

“비워야 채우니, 차 한 잔 하고 가시게”

2022-05-03     최호승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 뒤엔 너른 야생차밭이 있다. 가는 길에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을 보시라. 

5월이다. 햇차의 계절이다. 

양력 4월 20일 곡우(穀雨)엔 모든 곡물이 잠을 깬다는 말이 있다. 이 곡우를 전후로 차나무 최초 재배지로 알려진 하동과 쌍계사 차밭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차밭을 일구는 손길이 바빠진다. 벚꽃 필 때쯤 차나무가 파릇한 새순을 틔우고, 일손은 찻잎을 따고 덖기 때문이다. 특히 곡우 전 수확한 찻잎으로 만든 차는 상품(上品)으로 일컫는다. 차 상품에 ‘雨前(우전)’이라고 쓰여있다면, 가장 어린 새순으로 만든 차라는 뜻이다. 

본격적인 차의 계절이다. 싱그러운 초록빛 찻잎을 눈으로 음미하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가슴을 데울 도량이 우리를 기다린다. 응송 박영희 스님에게 ‘다도전게(茶道傳偈)’를 받아 초의 스님이 정립한 우리 전통 차 ‘초의차’ 이론과 제다법을 이어받은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이자 한국전통문화대학 겸임교수에게 자문받았다. 

다성 초의 스님이 머물렀던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 호젓하게 차 한 잔도 좋겠다.

 

차나무는 어디에서 먼저 자랐나

하동 쌍계사는 차나무를 심어 처음으로 재배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삼국사기』 흥덕왕조에 828년(흥덕왕 3)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의 씨앗을 가져와 왕의 명으로 지리산 일원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그 후 선사 진감 스님이 차나무를 번식시켜 본격적으로 차가 보급되었단다. 고려시대에는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하동 화개에 차 맛을 보러 갔다가 백성들이 차 공납으로 고통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고. 스님과 교유(交遊)해온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도 쌍계사의 만허 스님에게 직접 차를 얻어 마시기도 했단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지기 시작한 차나무를 1975년 고산 스님이 쌍계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복원, 시배지 차나무 종자를 다시 화개면 일원에 심어 오늘에 이르렀단다. 그만큼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데, 절 입구 근처에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 ‘해동다성진감선사추앙비’, ‘차시배지(茶始培地)’ 기념비가 있다. 

해마다 하동에서는 ‘하동세계茶엑스포’가 열리는데, 올해는 4월 23일부터 5월 22일까지다. 제1경 차시배지부터 2경 명원다원, 3경 고려·관아다원, 4경 도심다원, 5경 쌍계야생다원, 6경 한밭제다, 7경 매암다원, 8경 정금차밭, 9경 혜림농원, 10경 청석골에서 재배하는 차나무 풍경이 일품이다. 

김대렴이 지리산 일원에 심었다는 차나무는 시배지 논쟁이 있긴 하다. 쌍계사인가? 화엄사인가? 화엄사에는 4사자 3층석탑 앞에 차를 공양 올리는 ‘석등헌다상’이 있다, 쌍계사는 수백 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다. 사실 따지는 일보다 차 한 잔 마시는 게 이롭고, 지리산을 들렀다면 화엄사를 거르면 낭패다. 화엄사와 구층암 주변에는 드넓은 야생차밭이 있다. 구층암 뒤로 오르면 구층암을 내려다보고 있다. 암주 덕제 스님이 18년째 관리하고 곡우가 되면 찻잎을 따고 직접 덖는다. 스님은 오는 손님 마다하지 않고 차를 내려준다. 차 향기가 사방으로 흘러나간다는 다향사류(茶香四流)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세월 흐름 따라 굽이굽이 늙어가는 모과나무 기둥도 있다. 

곡우 전에도 일손이 바쁘다. 어린 새순을 거둬 우전차를 만든다.

 

차와 우정이 교유하던 도량

동백으로 이름난 강진 백련사 차도 빼놓을 수 없다. 백련사는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머물던 다산초당과 지척이었고, 아암혜장(兒巖惠藏, 1772~1811) 스님과 하루가 다르게 서로를 찾았다. 삼경에도 서로를 찾았고,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둔 스님의 마음까지 다산은 헤아렸다. 서로를 찾아가는 길목, 백련암에서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오솔길에 야생 차나무가 가지런히 자라고 있다. 

혜장 스님은 대흥사에 있던 초의(草衣, 1786~1866) 스님과 다산의 교유를 주선했다. 초의 스님은 혜장 스님을 통해 1809년 다산초당에서 다산을 만났고, 혜장 스님이 입적한 뒤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고 한다.

물론 차도 나눴다. 초의 스님은 대흥사 일지암에서 열반했는데, 이 도량이 복원되면서 차의 성지가 됐다. 스님은 다도의 중흥조이자 선다일미(禪茶一味, 선과 다도의 경지가 같은 맛)를 체득한 다성으로 불린다. 순조의 부마이자 최고 실세 홍현주가 스님에게 “차를 알고 싶다”라고 간곡히 청해서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茶書), ‘차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동다송』(1837년 편찬)을 썼다. 

이왕 강진 들러 해남까지 왔다면, 나주도 가봄 직하다. 불회사가 있어서다.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의 마라난타 스님이 영광 불갑사, 나주 불회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동백도 유명한 불회사는 대웅전까지 이어지는 편백나무는 물론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비자나무와 차나무 숲, 아름다운 석장승, 대웅전에 있는 종이로 만든 불상이 이름났다. 차나무가 옛 모습 그대로 비자나무 아래에서 이슬 머금고 자라나고 있고, 자연 그대로의 찻잎으로 만드는 불회사 전통차 비로다(榧露茶)를 마시는 일도 잊지 마시길….

순천도 빠질 수 없다. 순천에는 천년고찰 두 곳이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암사와 삼보사찰 중 승보종찰인 송광사다. 조계산 동쪽과 서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도량이다. 백매와 홍매를 찾아 상춘객들이 찾는 도량이 선암사이지만, 이곳 역시 수령이 몇백 년 넘는 차나무 군락이 있다. 야생차로는 선암사의 차를 최고로 친다는 이도 있다. ‘구수하고 깊은 맛’이라고 하는데 삼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음지에서 자라 찻잎이 연하고 운무와 습한 기후가 만들어낸 맛이라고. 선암사에서는 승선교와 뒷간을 꼭 들르시라. 

암주 덕제 스님은 지리산 일원 구층암 야생차밭을 18년째 관리하고 있다.

 

예도 차가 있다오

순천에서 송광사와 선암사에 이어 금둔사까지 한꺼번에 찾는다면 일석삼조다. 설중매로 유명한 금둔사이지만, 차나무도 인연이 깊다. 조실스님이 직접 야생차밭을 가꾸며 한국 전통 차의 맥을 고집스럽게 이어오고 있다. 금둔사 3층석탑 1층 몸돌에 새겨진 공양상도 눈여겨볼 일이다. 부처님에게 차를 공양하는 공양상이 돋을새김으로 몰록 도드라져있다. 

꽃무릇, 보은염, 동백이라는 키워드에 도솔암 마애불로 이름난 고창 선운사도 야생차밭이 유명하다. 최근에는 이 녹차밭을 관리하고 운영해 LF그룹과 함께 문화관광산업을 추진 중이다. 동백이 늦게 피는 고운사에 개화 시기에 찾는다면 녹차밭도 보고, 도솔암 마애불도 친견할 수 있다. 비자나무숲과 야생차밭을 품고, 마조도일 스님의 법맥을 잇는 구산선문 제일가람 장흥 보림사, 김동리가 「등신불」을 쓴 도량이자 효당 최범술, 만해 한용운 스님이 독립운동단체 만당을 이끌며 차 부흥 운동을 하고 독립선언서 초안을 집필한 경남 사천 다솔사도 있다.

차나무와 차, 도량이 어우러지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예부터 차를 즐겨 마시며 수행하던 스님들의 법향마저 코끝을 간지럽힌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했던가. 차가 많아서, 거기에 도량이 있어서, 좋다. 다다익선(多茶益善)이다.  

수확한 찻잎을 덖는 과정을 거쳐야만 차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