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골골[谷谷]마다 사찰

발심發心과 수행修行의 공간

2022-04-28     김동하
윤을곡 마애불좌상. 남산신성 성벽 밑 산비탈의 바위 중 하나인 삼신바위에 조각된 약사여래상. 
동남향 바위 면에 2체, 서남향 바위 면에 1체를 새겼다.

경주 남산은 최고봉의 이름 따 금오산(金鰲山) 또는 고위산(高位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남산 앞에 ‘신라 불교문화재의 보고’,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 ‘민중신앙의 산’ 등의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계곡 곳곳에 산재한 소규모 불적(불상・석탑 등)은 남산이 이러한 별칭을 얻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 때문에 생긴 막연한 기대와 경외심은 오히려 남산의 역사적 실재를 알아 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남산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무엇일까? 남산은 신라 사람에게 어떤 장소였고,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불적이 조성됐을까? 

남산 불적의 가장 큰 특징은 왕경 가까이 위치한 단일 산록에 불적이 다수 밀집·분포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계곡에 다수의 불적이 짧은 거리를 두고 각각 위치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어떤 불적의 경우는 도저히 사람이 거주하거나 생활하기 어려운 장소에도 입지한다. 실제 발굴로 확인된 삼릉계나 열암곡 불적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남산의 불적을 개개의 사찰로 이해하더라도 그곳에 많은 사람이 거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험한 산지 계곡이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규모 사역(寺役)을 형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주변 환경을 고려하면, 남산의 불적은 매우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속세와는 분리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예불목적으로만 조성했다면, 한 계곡에 이렇게 많은 불적이 입지할 필요는 없다. 즉 불자는 기왕에 만들어진 탑상(塔像)에 예불을 드리면 되지, 굳이 가까운 거리에 또 새로운 탑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리사 마애석불 측면. 앞을 향해 약 45도 경사로 비껴있는 바위 벽면에 감실을 파고 불상을 새겼다. 
보리사 마애석불 정면 모습으로 미소를 띠고 있다. 4월에는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이 미소를 볼 수 있다. 

 

조탑신앙, 공덕 쌓기 위한 수행

남산의 수많은 불적은 끊임없이 탑상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으로 생긴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사천왕사, 분황사와 같은 왕경 사찰을 발굴하면, 흙으로 만든 작은 탑[小塔]이 종종 출토된다. 발굴된 소탑 중에는 매우 정성스럽게 만든 탑도 있지만, 거칠고 투박한 모습을 한 탑도 적지 않다. 이러한 소탑은 조형성이나 예술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즉 공덕을 쌓기 위한 조탑 행위 자체가 핵심이므로, 그 모양이 다소 투박하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조탑신앙은 『조탑공덕경』이나 『무구정광대다리경』의 영향을 받아 실제 왕경 내 많은 탑을 조성하는 배경이 된다. 

한편 『삼국유사』 「양지사석」조 말미에는 향가 <풍요(風謠)>가 전해진다. <풍요>는 영묘사에 불상을 조성할 때 성안의 성인남녀가 진흙을 나르면서 불렀던 노래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불상을 만들기 위해 그 불사에 참여하는 것을 공덕을 닦는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조상 행위 역시도 공덕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남산에 조영된 수많은 불상과 불탑도 공덕을 쌓기 위한 스님들의 수행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남산의 수많은 탑상을 수행의 과정과 결과로 생각한다면, 산지나 계곡의 험한 환경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종교적 염원이나 깊은 불심은 최소한의 공간만 허락돼도 그 장소에 탑상을 조성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될 수 있다. 

남산은 ‘돌산’이다. 계곡 지척에는 수많은 화강암 괴석과 암벽이 노출돼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수행자가 저비용으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매우 적합한 장소다. 조탑(造塔), 조상(造像)을 위한 재료가 산천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종교적 염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더불어 산은 속세와 분리돼 있어 수행의 장소로서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장소다. 이러한 환경과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남산에 입지한 수많은 탑상 중 상당수는 수행자가 공덕을 쌓기 위한 수행과정의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산은 ‘돌산’이다. 
남산은 조탑(造塔), 조상(造像)을 위한 
재료가 산천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종교적 염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더불어 산은 속세와 분리돼 있어 수행의 
장소로서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장소다. 

 

남산 산림사원

일본학계에서는 수행과 법회를 위해 산속에 지은 불당을 ‘산림사원’이라 부른다. 산림사원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불교적 수행이고, 두 번째는 평지가람과의 유기적인 관계다. 즉 평지가람에서는 수학(修學)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산림사원에서는 깨달음을 위해 불교적 수행이 행해졌다. 평지가람에서의 수학과 산림사원에서의 수행이 각각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한 달의 절반은 깊은 산속에서 수행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본사에서 수학 증진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산림사원은 주로 스님의 수행처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산림사원은 기본적으로 당탑이 있고 회랑을 갖춘 사찰이 많다. 하지만 가스가야마(春日山)의 호산 이존석불, 지옥곡의 성인굴마애불, 나라시대 일부 산악 석불이나 마애불과 같은 유적 등은 그 입지나 주변 환경이 경주 남산의 불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러한 불상 역시 산림수행과 관련한 존상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경주 남산의 불적도 일본의 산림사원과 같은 스님의 수행과 관련한 장소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9년(587) 기사에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에 대한 세속의 외면과 깨달음을 향한 그들의 염원이 감지된다. 대세는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그는 명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神仙)이 되길 꿈꿨다. 함께할 친구를 구하다가 처음 담수(淡水)를 만났지만 끝까지 같이하지 못했다. 이후 그와 같은 뜻을 품은 구칠을 만나 바다를 향해 함께 떠났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두 사람이 처음 찾아간 곳이 바로 ‘남산의 절(南山之寺)’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의 품은 뜻을 서로 확인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서 수행의 직접적인 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를 비춰볼 때 이야기 속 ‘남산의 절’은 배움과 관련한 수학(修學)의 장소라기보다는 깨달음과 관련한 수행의 장소에 더 무게를 둘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남산과 관련한 여러 스님의 이야기가 전한다.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조에는 도중사에 거주했던 생의 스님이 어느 날 꿈에서 알려준 대로 남산에 올라가 석미륵상을 찾은 뒤 삼화령 위에 불상을 봉안하고 선덕여왕 13년(644) 그곳에 생의사라는 사찰을 만들었다. 여기서 생의 스님이 원래 왕경에 위치한 ‘도중사’의 스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생의사’라는 사명(寺名)에서 알 수 있듯 지극히 생의 스님을 위한, 생의 스님에 의한 사찰이다. 

이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로 이어진다. 이야기 속 충담 스님은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미륵삼존불)에게 차를 공양하러 다닌다.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것 역시 하나의 수행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서 충담 스님은 왕경 사찰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스님의 본사(本寺)는 왕경의 사찰이었고, 남산에는 특정 시기(삼짇날과 중양절)에 올라가 수행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에서 평지사원과 남산 불적의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수행의 과정과 결과로 생각한다면, 산지나 계곡의 험한 환경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종교적 염원이나 깊은 불심은 최소한의 공간만 허락돼도 그 장소에 불상을 조성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남산과 관련한 스님의 모습도 흥미롭다. 앞서 살펴본 충담 스님의 이야기 속 스님은 납의를 입고 앵통(혹은 삼태기)을 들고 남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다. 또한 『삼국유사』 「경흥우성」조에 기록된 남산에 기거하는 거사는 경흥법사의 사치스러움에 비해 행색이 남루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진신수공」조에 나오는 남산 비파암으로 떠난 비구(석가진신) 역시 망덕사 낙성회에 참석한 효소왕과 비교해 외양이 남루한 모습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 거사가 행색이 남루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 광주리를 이고 와서 하마대 위에서 쉬고 있었는데 광주리 안을 보니 마른 생선이 있었다. (경흥법사의) 시종이 그를 꾸짖어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이냐”하자 중이 “그 살아 있는 고기를 양 넓적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과 삼시의 마른 생선을 등에 지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하고 일어나 가버렸다. (중략) 남산 문수사의 문 밖에 이르자 광주리를 버리고 사라졌다. (중략) 경흥은 그것을 듣고 한탄하여 “대성(大聖)이 와서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하였구나”하고 죽을 때까지 다시 말을 타지 않았다.  
_ 『삼국유사』 「경흥우성」조

세 이야기 모두 설화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확인되는 남산과 관련한 스님의 모습은 하나같이 모두 남루한 모습이다. 스님들은 마치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는 당시 남산 불적이 가지는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생각한다. 

高嶽峨岩 智人所居 碧松深谷 行者所捿
험한 산 높은 바위는 지혜로운 사람이 살 곳이요, 
푸른 소나무 깊은 골짜기는 수행하는 이가 머물 곳이다.
__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중에서

남산은 곧 스님의 공간이면서, 수행의 공간이었다. 당시 스님은 험한 산지 계곡에서 공덕을 쌓기 위해 조탑과 조상을 통한 수행을 감행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불적은 스님이 명산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산림수행의 장소로 이용됐다.  

 

사진. 유동영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문화재 전문위원. 신라의 왕경 사찰 및 불교 문화재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