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습니다] 친족의 그늘은 서늘하다

2022-05-27     윤남진

설이 다가오고 있던 즈음이었다. 단양에 사는 큰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번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마을과도 좀 떨어진 외딴 산중에 틀어박혀 지내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읍내에 볼일 보러 가는 경우 외엔 어디 나다니지 않게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여기 남쪽 산골에서 자동차로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저 북쪽 두메산골까지 운전해서 갈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성큼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일모레 70을 앞둔 큰누님의 당부여서 거절할 수도 없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때마침 아내가 좀 긴 휴가를 받았고, 고등학생 막내도 방학 중이어서 콧바람 쐴 겸 하룻밤 다녀오기로 했다.

 

친족 찾아 굽이굽이 

고속도로를 나와 굽이굽이 영월과 인접해 있는 단양 어상천 큰누님 댁에 도착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큰누님은 와서 만두나 만들어 먹자더니 벌써 만두를 다 빚어 놓고 있었고, 매형은 청와대 만찬주로 진상됐다는 막걸리를 양조장에 직접 가서 한 말들이 초롱으로 받아놓고 계셨다. 막 상을 차려 만둣국을 먹으려고 하는데, 인천에 사는 막내 누님에게 전화가 왔다. 큰누님이 받으셔서 장남 식구들이 도착했다고 안부를 전하니 ‘인천에도 다녀가지’ 하며 막내 매형이 섭섭해한단다. 다음에 시간을 한번 내본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영 마음이 찜찜했다. 

“인천에 가야 할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큰누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가는 길에 원주에 둘째 누님도 보고 가라 한다. 원주는 단양서 한 시간이면 족하니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 인천 가는 중간에 음성 동생 집도 들르고 어머니 납골묘원에도 다녀서 가는 게 좋겠다고. 설상가상 일정이 늘어서 3박 4일에 운전코스로 충청, 강원, 인천을 다녀서 전라남도로 오는 장거리 여행이 됐다.

사실 큰누님의 청을 딱 잘라 거절하기는 힘들다. 기억에는 없지만, 누차 들어온 이야기로는 큰누님이 나를 업어서 키웠다고 한다. 어머님이 어찌해서 오랫동안 몸져눕게 되어서 맡아 키우는 일이 큰누님 몫이었다는 것이고, 아버님이 50에 나를 장남으로 보셨으니 그 연세에 딸들만 줄줄이 있는 집안이 어찌했을까 짐작되고 남음이 있다. 

큰누님은 어떤 때는 식당에서, 또 어떤 때는 시골 농부로 일하셨다. 그도 시원찮을라치면 내가 서울로 직장을 다닐 때는 겨울 농한기 동안 우리 집에 올라와 식당 일을 다니며 하루 벌이를 했다. 그때 식당일을 마치면 차로 바래다주러 갔다가 오곤 했는데, 입술이 부르튼 모습이 안돼서 언짢은 말을 하면 괜찮다는 한마디뿐이었다. 

그럴 때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란 시가 생각났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이번에도 그때 그 생각이 피어났다. 누님은 먼 길을 돌아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을 그 길을 돌아와, 그렇게 홀로 거울을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반겨주는 누나·매형·동생 부부

다음날 우리는 단양 고수동굴과 도담삼봉을 관광하고 난 뒤 다음을 기약하면서 원주 둘째 누님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니 둘째 누님은 막내에게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며 콜택시를 불러 횟집으로 데려갔다. 둘째 누님은 식당 주방 일을 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다. 둘째 누님은 어려서부터 어린 장남을 둔 딸 부잣집에서 장남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내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하고 좀 왈가닥이었다. 지금도 그 면면이 그대로 시원시원하고 걸진 입담에서 배어 나온다. 내가 옥살이를 하고, 동생은 군대에 있던 시절, 부모님을 대신 모시며 동생들 수발까지 했으니 장남 역할을 한 게 맞는 말이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김치며 오이소박이며, 능이버섯 등등과 옷가지, 양말 등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것을 모두 받아 싣고 음성 동생 집으로 향했다. 

음성 동생은 농업대학을 나와 일찌감치 농민회를 통해 농사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살아생전에 평생 일등 농사꾼이었던 아버님은 아들의 일을 돕기도 하면서 동생 집에 계셨었다. 동생 집으로 명절 때 뵈러 가면 ‘너는 동생 모내기하고 추수할 때 꼭 와서 돕고, 그리고 너는 형에게 식량을 대주어라’ 하셨다. 서울 살 때는 꼭 지키려 애썼는데 이제 나도 시골 산중으로 내려오고 보니 그 말씀을 어기게 됐다. 점심이 되자 쌀가마니와 된장, 간장 등을 싣고 조카가 좋아한다는 칼국수 집에서 요기하고 인천 막내 누님 집으로 향했다. 

막내 누님은 늦게 둔 장남 최우선 집안 풍조의 애달픈 희생양이라고나 할까? 내가 아주 어려서 아버님은 사과를 깎아서 아들만 주고 딸들은 주지 않으셨단다. 그럴 때 막내 누님은 곁에 있다가 사과 껍질을 얻어먹었는데 그때 아버님에게, ‘사과 좀 두껍게 깎아요’ 했다는 말로 골리는 얘기가 내 마음에 늘 무거운 빚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막내 누님은 내가 있어 모두 대학에 보낼 형편이 못 된다고 하여 대학도 포기해야 했다. 막내 누님댁도 저녁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막내 매형은 우리 막내 아이를 위해 쇼핑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시내 상가로 가서 트레이닝복 한 벌과 신발, 모자까지 한상차림을 안겨줬다. 다음날 누님은 ‘내년 내 환갑에 온 식구 초대할게’라는 말을 하고 출근했다. 

 

신분 같았던 장남 노릇

돌아와 마당에 나와 별을 보며 서 있자니 부처님 말씀이 간절히 떠올랐다. 부처님 생전에 코살라국은 석가족과 원한이 있었고, 석가족을 멸하고자 원정길에 나섰다. 부처님은 그 길에서 가지만 앙상한 죽은 나무 밑에, 인도의 뜨거운 태양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앉아계셨다. 코살라국의 왕이 이 장면을 보고 왜 죽은 나무 밑에 앉아계시냐고 묻자 부처님은, “친족의 그늘은 시원하다”라며 당신 종족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청하셨다. 부처님은 친족을 한낮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가려주는 그늘 같은 존재에 비유하신 것이다. 친족이 없는 이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허덕이면서 홀로 신고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로부터 장남 대접과 함께 장남 노릇에 대한 버거운 주문을 동시에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결혼을 결심하기 전까지 집안의 장남 노릇을 하지 못했다. 출가를 생각했다가 내 딴에는 부모님께 손자를 보게 해드리는 것이 장남 노릇으로 할 수 있는, 당시로써는 최고이자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 결정을 했다. 결혼 후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고 처리하는 등 제법 장남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년 전 어머님까지 부모님을 모두 보내고 고아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스스로 외톨이처럼 지내니 더욱 그러했다. 이번에 부모님 없이 형제자매들을 모두 만나고 나니, 그동안 시원하고 넓은 그늘에서 지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장남 노릇은 하나의 신분이었으면서 또 직업이었던 의무감에 가득한 것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게 된다. 

시인 정호승은 어느 시에서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라며,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어느 가족사이든 그늘이 왜 없으랴. 이제부터 그 그늘들을 지우려 하지 말고 더욱 사랑하고 보듬어서 스스로 큰 나무 그늘의 넓은 잎 달린 가지 하나라도 되어보아야겠다. 

 

윤남진
동국대를 나와 1994년 종단개혁 바로 전 불교사회단체로 사회 첫발을 디뎠다. 개혁종단 순항 시기 조계종 종무원으로 일했고, 불교시민사회단체 창립 멤버로 10년간 몸담았다. 이후 산골로 내려와 조용히 소요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