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지우다-구스타프 클림트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2022-04-11     보일 스님
삶의 다양한 경계를 응시하고 본질을 물었던 예술가, 구스타프 클림트

깊은 산중, 이름 없는 암자에서 노스님과 동자승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스님은 주장자를 짚고 경내를 포행하다가, 도량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동자승을 발견한다. 노스님은 동자승 곁으로 다가가서는 주장자를 땅바닥에 대고 동자승 주위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리고는 동자승에게 말한다. “네가 동그라미 안에 머물러 있어도 30대를 때릴 것이요. 동그라미 밖으로 나와도 30대를 때릴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고?” 이 말은 들은 동자승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동그라미를 발로 지워가기 시작했다. 이내 동자승을 동그랗게 에워쌌던 그 선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이제 동자승은 동그라미 안에도 밖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클림트와 그의 연인 에밀리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어딘가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그 기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분별한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렇게 자를 대고 선 그은 듯이 반듯하고, 두부처럼 쉽게 잘리는가.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호하고 흐린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발 딛고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 그 누구보다 삶의 다양한 경계를 응시하면서, 그 본질을 되물었던 예술가가 있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이다. 클림트의 이미지는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입었음 직한 헐렁한 가운, 부스스한 머리칼, 날카로운 눈빛과 고집 세 보이는 입 모양이 연상된다. 이와 대조적인 분위기로는 고양이를 안고서 환하게 웃는 그의 미소, 아터 호수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 정도이다. 이 몇 장의 사진을 제외하고 클림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제한적이다. 그 흔한 인터뷰 기사도 없다시피 하고, 편지 대부분은 그의 연인 에밀리에 의해 소각되었으며, 단지 몇 통의 엽서가 남아있을 뿐이다. 심지어 유명 화가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화상마저도 없다(자신을 수탉으로 장난스레 그린 간단한 캐리커처는 남아 있다). 

하긴 클림트는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작품을 보면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작품 외에 특별한 흔적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작품에 대한 작자의 구체적 해설이 없으니,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과 해석의 여지는 더욱 넓어진다. 마치 선불교 전통에서 스승이 제자를 위해 공안집을 태워 없애 버리듯, 작품에 대한 과도하고 친절한 해설은 없느니만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 빈 분리파

 

클림트의 동그라미

우리에게 클림트는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던 천재 화가로 손꼽힌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예술적 시도가 일어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빈에서 활동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변화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클림트를 이해하려면 우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7년 전 빈 대학에서 열린 세계불교학회(IABS)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 오스트리아에 간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클림트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아는 것이라곤 <키스>를 그린 화가라는 정도였다. 

빈에 도착해서 2주가량 머물면서, 빈이라는 도시가 클림트로 시작해서 클림트로 끝나는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빈 도심지를 원형으로 감싸는 도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ssen)를 따라서 빈 대학, 부르크 극장, 빈 미술사 박물관, 레오폴드 미술관, 벨베데레 미술관, 제체시온, 빈 응용미술관 등 어느 곳이든 클림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거나, 그와 연관된 에피소드를 품은 장소들이라는 점이다. 빈은 한 마디로 클림트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다고 클림트만이 빈을 빛나게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천년에 걸쳐 국가를 초월한 수도”라는 말에 어울리게 빈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모차르트와 베토벤, 아돌프 로스, 오토 바그너 등의 수많은 천재적인 예술가와 지성을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클림트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 빈 한 가운데에서 기존 아카데미 풍의 미술을 거부하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클림트는 빈이라는 물리적 공간 속 전통과 혁신의 경계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클림트에게 빈의 링슈트라세는 동자승을 에워싼 동그라미와 같았다.         

“사랑은 가장 가치 있는 
행복이며 영원한 꿈이다.”

 

<키스(The Kiss)>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클림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혹은 이미지는 단연코 <키스>(1908)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벨베데레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연간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린다. 이 그림은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내용 이전에 일단 그림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이 작품은 클림트 특유의 열정에 금빛이 더해져서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낸다. 클림트가 본격적으로 금을 이용한 작품활동을 벌인 이른바 ‘황금시대’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클림트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을 비롯해 <베토벤 프리즈>(1902), <유디트>(1901), <물뱀>(1904~1907) 등을 완성한다. 

<키스>에 등장하는 여인의 표정만으로는 사랑인지 욕망인지 섣불리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절벽 위에 피어난 꽃들과 내리는 황금색 꽃비를 통해 클림트가 최고의 순간을 표현하려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누구나 이 그림을 보면 잠시 잠깐이라도 멍하거나 숨이 멎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히 성적 관능미를 묘사해서도 아니고 금빛 장식이 압도적인 황홀감을 주어서도 아니다. 그림 속 연인의 키스, 그 순간 자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여인은 남성의 품에 안긴 채, 발목을 낭떠러지에 걸치고 있다. 여인은 발끝으로 경사면을 더듬으면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려는 애절함마저 느껴진다.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며 서 있는 듯하다. 연인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겠지만, 동시에 위태로움도 공존한다. 사랑의 환희와 욕망의 불안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클림트는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긴장과 불안을 놓치지 않고 읽어낸다. 기쁘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할 수도 없고 불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주는 삶의 기쁨을 놓치고 싶지도 않다. 이 순간 이 연인에게 삶은 어떤 의미일까. 

클림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랑일까, 욕망일까. 적어도 클림트에게는 이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는 이미 없다. 클림트는 숭고한 사랑과 관능적인 욕망 사이를 외줄 타기하듯 절묘하게 오가다 그 외줄마저 스스로 끊어버린 듯하다. 이제 더는 사랑과 욕망은 따로 있지 않다. 클림트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을 그림 속에 표현하면서도 그 시선을 욕망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키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사랑과 욕망은 한 뿌리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구분이 명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명확하다 한들 “그래서 뭐”하고 반문하는 듯하다. 

<죽음과 삶(Death and Life)>

“사랑 그 자체가 쓰린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도 
 고통이라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작품에서 상반된 개념을 아우르는 클림트의 천재성은 <죽음과 삶>(1916)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클림트는 이 작품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가 어디인가’라는 그 물음에 대답한다. 오른쪽으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들이 틈새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각자 희로애락 속에서 나름의 감정에 빠져있다. 전체적으로는 큰 아치를 그리면서 원형으로 회전하는 모양새다. 모두 다 눈을 감고 있고, 단잠에 빠져있다. 그 왼편으로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해골이 몽둥이를 움켜쥐고 서 있다. 해골 속의 퀭한 눈 사이로 ‘누구를 데려갈까’ 하면서 살피고 있다. 심지어는 이죽거리며 웃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단잠에 빠진 인간들을 비웃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동양적인 저승사자의 시커먼 의상과는 다르다. 나름 청록색과 보랏빛의 가운을 걸치고 있다. 몽둥이의 색깔마저 인간계를 장식하는 꽃무늬들과 같은 계열의 색이다. 해골은 인간의 회전하는 삶을 내내 지켜보고 있다. 이 회전하는 이미지는 죽음에 있어서 선형적인 시간이 무의미함을 나타낸다. 달리 말해 늙어야만 죽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없이 나이를 불문하고 심지어 어린아이마저도 죽음은 예외일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잘 드러난다. 

이 그림을 세상에 내놓은 지 2년 뒤 클림트는 세상을 떠난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예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항상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관능적인 몸짓은 옆으로 밀려나 있다. 인생 만년의 클림트에게 죽음과 삶은 극단적으로 대비되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으로 묘사된다. 우리에게 죽음과 삶은 분리된 경계이지만, 클림트의 눈에 비친 죽음과 삶은 공존하는 듯하다. 

2,500여 년 전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 한 호흡 사이라고 대답한 붓다의 가르침과 묘하게 겹쳐지는 대목이다. 들이마신 숨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삶 속에 있다. 죽음의 공포와 삶의 기쁨은 서로를 밀어내는 듯하지만, 서로를 부둥켜안고 의지한다.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는 따로 있지 않다. 어쩌면 클림트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 경계를 지워버림으로써 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사이에서 

클림트는 마치 노스님이 낸 문제를 해소(解消)해 버린 동자승처럼 죽음과 삶, 사랑과 욕망, 전통과 혁신 등 모호한 경계를 아예 지워버린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듯, 사랑과 욕망 또한 그러하다. 어쩌면 애초에 그 구분선은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우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와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사이에 서 있다. 클림트는 죽음만을 부각해 삶의 생기를 잃어버리게 하지도 않고, 반대로 삶의 욕망만을 희구함으로써 죽음을 외면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발 더 내디디면서 그 경계가 원래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자,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자. 클림트가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들에게 삶은 무슨 의미인가?” 하고 말이다. 우리가 대답할 차례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