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한거都心閑居] 기도의 진정한 성취란

기도의 진정한 성취란 무엇인가?

2022-04-08     석두 스님

양력 달은 지금 2월을 가리키지만, 음력을 중시하는 절집의 가풍(家風)으로 인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새해의 초입이다. 이즈음 전국의 모든 절간은 3일 또는 7일 동안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바로 정초기도(正初祈禱)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영하의 매서운 추위를 몰고 다니는 동장군(冬將軍)도 불자들의 뜨거운 새해맞이 소망기도 앞에서는 주춤한다. 본인이 거주하고 있는 사찰인 강남 봉은사는 그 열기가 더 뜨거운 듯하다.

올해는 새해 벽두부터 서설(瑞雪)이 내려서 절에 오는 길이 번거로웠음에도, 법에서 규정하는 제한 인원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법당 밖에서 새벽예불을 드리는 불자들도 보였다. 그 간절한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부처님의 정법(正法) 가르침을 설파해야 하는 승(僧)의 입장에서는 방편(方便)이 불법(佛法)의 주류(主流)가 된 듯하여 잠깐 갈등의 순간이 오곤 한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라는 그레셤의 통화 법칙(가치가 낮은 게 높은 것을 몰아냄)이 떠오르는 것은 혼자만의 망상일까?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부처님은 더할 수 없는 평안함에 사로잡혔다. 오직 깨끗한 기쁨만이 가득 차올라 49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은 자로서의 완전한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을 누리는 부처님에게 많은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깨달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부처님은 초전법륜(初展法輪)과 전법선언(傳法宣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고요하여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 모든 행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근원이 모두 사라진 경지, 갈애가 다한 경지, 탐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경지, 그리고 열반의 도리를 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 『율장』 「대품」 중에서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 역시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법을 전하려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겨 길을 떠나라. 마을에서 마을로,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 조리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 원만하고 완전하며 청정한 행동을 보여주라. 세상에서 때가 덜 묻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법을 듣지 못하면 퇴보하겠지만 들으면 분명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법을 전하러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로 갈 것이다.” 
- 전법선언문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의 법은 미묘하여 중생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그 법은 탐착과 갈애의 소멸을 통해서만이 얻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절집은 개인적 욕망과 갈애의 성취를 부추기고 편승하면서 그것들의 부산물인 단물에 심취해 있지는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전법선언에서 말씀하시는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은 각자의 욕망의 성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과정에서만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도겐(道元, 1200~1253) 스님의 말씀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일본 조동종 종조인 도겐 스님은 26세에 송나라에 유학하여 천동산 경덕사에 주석하셨던 여정화상(如淨和尙)의 법맥을 이어 일본에 선(禪)을 소개한 선사(禪師)이다.

“불도(佛道)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만법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만법에 증명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심(身心) 및 타인의 신심을 탈락(脫落)하는 것이다.“ 
- 『정법안장』 중에서

자기를 잊는 것은, 갈애는 있으나 갈애의 그림자는 없는 경지. 붓다의 교법대로 말하면 업은 있으나 업을 받는 자는 없다는 즉, 다시 말해서 세계를 경험하지만 경험의 주체자는 없는 경지. 몸과 마음이 있으나, 그 몸과 마음의 흔적이 없는 경지인 것이다. 최근에 열반에 든 베트남의 세계적인 명상가인 틱낫한 스님의 열반송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이 몸이 나를 갇힐 수 없다. 나는 경계가 없는 생명이다. 나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저 넓은 바다와 하늘, 수많은 우주는 다 의식에 의해 나타난다. 나는 시초부터 자유, 그 자체였다. 생사는 오가는 출입문일 뿐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숨바꼭질의 놀이일 뿐이다. (…하략…)”

중생들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더 얻기 위해서 나를 채우려 한다. 잃는 것이 얻는 것임을 모른다.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임을 모른다. 놓아 주는 게 잡는 것임을 모른다. 소아(小我)를 버림으로써 대아(大我)를 얻는 도리를 모른다. 바람이 깃발을 흔드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님을 모른다. 근원적 자리에 도사리고 있는 마음이 지금 흔들리고 있음을 모른다. 바람과 깃발은 현상(現像)이지 본질(本質)이 아니다. 본질은 마음이다. 

다음 게송은 『금강경』을 해석하신 다섯 스님 중의 한 분인 야보 도천(冶父道川, 생몰연대 미상) 스님의 게송이다.

“정원의 꽃들은 웃고 있는데 그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며(圓中花笑聲未聽)
숲속에서 새들은 울고 있는데 그 눈물이 보이지 않는구나!(林中鳥涕淚鸞觀)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지만 먼지 하나 일지 않고(竹影掃階塵不動)
달빛이 연못 바닥 깊숙이 들어가나 물엔 흔적이 없구나!(月拓淡低水無痕)”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 꿈과 같고 이슬과 같은 허망한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계단을 쓸어내지만, 작은 먼지 하나조차 쓸어내지 못한다는 사실. 중생들은 왜 모르는가 야보 스님은 묻는다. 그렇게 야보 스님은 우리에게 준엄하게 이 게송을 통하여 미몽(迷夢)에서 깨어나라 하신다.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