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임진왜란 이후 승군의 역할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쌓다

2022-03-29     박현욱
북한산성 전경. 산성 안에는 행궁이 있어 비상시 임금의 대피처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을 통해 한양도성과 연결된다. 사진 유동영
남한산성. 임진왜란이 끝난 후 벽암각성 스님을 비롯한 승군이 중심이 되어 성을 증축했다. 곧이어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했으나 끝내 항복한 곳이다. 남쪽에서 오는 외적으로부터 한양을 보호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로 개국 이래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불교를 아예 부정할 수는 없었으며, 승려가 일정 금액을 국가에 내고 도첩(度牒)을 받으면 국역을 면제해줬다. 

조선이 승려에 주목한 계기는 임진왜란 중 자발적으로 봉기한 승군들이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분위기를 반전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1594년(선조 27)에는 가야산의 용기산성(龍起山城), 지리산의 귀성산성(龜城山城), 합천의 이숭산성(李崇山城) 등에 대한 축성과 보수를 위해 대규모의 승군을 투입했는데, 이때 산성 내부에 승영사찰(僧營寺刹)을 새롭게 건립하고 승군을 주둔시켜 장기 전투에 대비했다. 조정이 승군에게 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맡긴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장기화되자, 총섭의 통솔 아래에서 엄격한 기율(紀律, 행위의 표준이 될 만한 질서)로 움직이는 승군을 활용해 짧은 기간 안에 산성에 대한 축성 및 보수를 완료하고 더불어 장기적으로 산성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즉, ‘도총섭 → 총섭→ 승장 → 승병’으로 이어지는 승군의 지휘체계를 이용해 승군 조발에 대한 효율성을 높이고, 승군의 노동력을 국가가 적절히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처럼 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위해 승군을 동원하고 사찰을 건축해 승영(僧營)에 주둔시키는 승군제도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일관되게 추진됐으며, 그 대표적인 축성과 운영 사례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다. 

월정사 밀부와 주머니
월정사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가 세워졌다. 밀부(密符)는 1800년(정조 24)에 월정사 주지에게 내려진 것이다. 밀부는 위급한 상황이 도래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게 하는 명부로 가죽 주머니에 넣고 허리에 찰 수 있도록 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 소장
금정산성 승장인(金井山城 僧將印)
임진왜란 후 금정산성이 수축되면서 국청사에 승장이 머물렀다. 
승장인은 승병의 통솔과 관할을 
위해 제작된 도장이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남한산성과 승군

남한산성의 수축에는 승병이 큰 역할을 했다.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 본격적으로 축성한 산성이다. 수어사(守禦使) 이서(李曙, 1580~1637)가 산성 축성에 대한 감역(監役, 공사 감독)을 맡게 되자 그는 인조에게 상소해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출신의 벽암각성을 제1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했다. 

도총섭(都摠攝)은 나라에서 내렸던 승려에 대한 직책 중 최고의 승직(僧職)이다. 

남한산성 지화문(至和門). 남한산성의 남문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문을 통해 피신했다고 전해진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남한산성에 만들어진 장대(將臺) 중 하나다. 장대는 지휘관이 올라 군대를 지휘하는 곳을 말한다. 남한산성을 증축할 때 세워진 유일한 장대이다.

도총섭인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은 각도의 승군을 소집한 뒤 서북성을 담당해 축성했다. 또한 산성의 수어(守禦, 방어)를 위해 성내에 9개의 사찰을 두어 팔도에서 올라온 승군이 숙식하고 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원래 남한산성에는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 2개의 사찰만 있었는데, 산성의 수축과 함께 개원사(開元寺), 국청사(國淸寺), 남단사(南壇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天主寺), 한흥사(漢興寺) 등 6개의 사찰을 새로 지었다. 이후 동림사(東林寺)와 영원사(靈源寺)도 지어졌다.

남한산성 승영사찰의 운영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사찰 이름과 위치, 사찰의 수리와 구성, 승군의 수와 무기의 수 등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인조 갑자년(1624년)에 성을 쌓을 때 각성 스님을 팔도도총섭으로 삼아 성을 쌓는 역을 맡겨 8도의 승군을 불러 모집하고, 성안의 각 사찰에 명을 내려 8도 부역 승군의 공궤(供饋, 음식을 줌)를 분장했다. 이로써 각 사찰이 비로소 각 도 의승의 입번(立番, 군대에 복무)을 주관했으며, 승총·절제·중군·주장의 명칭이 생겼다. 

장경사(長慶寺). 남한산성을 증축할 때 세워진 사찰로 벽암각성 스님이 머물렀다. 
당시 9개 사찰이 세워졌는데 성내의 사찰을 지휘하는 곳이었다. 

 

북한산성과 승군

1711년(숙종 37)에 수도 한양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였던 북한산에 축성한 북한산성은 당시 국왕이었던 숙종과 대신들 사이의 첨예한 의견 대립을 통해 축성했다. 청이 일으킨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향후 유사한 전쟁이 발생했을 때 도성 인근의 강화산성(江華山城)이나 남한산성이 최후의 방어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대안으로 축성한 것이다. 북한산성 이후 조선에서 더는 산성이 축성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북한산성은 도성의 방위를 목적으로 축성한 마지막 산성이다. 

북한산성은 남한산성과 동일하게 승군제도를 활용해 산성을 축성하고 내부에는 승영사찰을 건립하고 승군을 주둔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변사등록』에는 산성 축성의 감역을 맡았던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우항(金宇杭, 1649~1723)이 숙종에게 남한산성의 예와 같이 축성 이후 산성을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승영사찰 건립을 상소했는데, 이에 따라 숙종은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출신의 성능 스님을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했다. 성능은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은 후 군령으로 전국의 승군을 동원해 중흥사(重興寺), 용암사(龍巖寺),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부왕사(扶旺寺), 원각사(圓覺寺), 국녕사(國寧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태고사(太古寺), 진국사(鎭國寺) 11개의 사찰을 중건하거나 새롭게 창건했다. 

 『북한지(北漢誌)』에 수록된 북한산성 내 사찰현황  
1. 중흥사(重興寺)  2. 태고사(太古寺)  3. 용암사(龍巖寺)  4. 보국사(輔國寺)  5. 보광사(普光寺)  6. 부왕사(扶旺寺)  7. 원각사(圓覺寺) 
8. 국녕사(國寧寺)  9. 상운사(祥雲寺)  10. 서암사(西巖寺)  11. 진국사(鎭國寺)  12. 봉성암(奉聖庵)  13. 원효암(元曉庵)

북한산성 축성에는 삼군문 소속의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소속의 군사 외에도 전국 사찰의 승군이 동원됐다. 축성 때 참여한 승려의 수나 그들의 역할 등은 자세히 전하지 않지만, 성능 스님은 북한산성이 완공된 후에도 30여 년간 머물면서 산성 내의 승군을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30여 년간 맡아온 팔도도총섭 직책을 1745년 같은 사찰 출신의 서윤 스님에게 인계하기 위해 작성한 『북한지』에 산성 내 위치했던 11개 승영사찰에 대한 창건주와 규모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북한산성 축성은 1년 전에 마무리된 한양도성의 축성 공사의 예를 따라 삼군문이 전체 성벽 구역을 세 군데로 구분해 진행했다. 이들은 단 6개월 만에 북한산성 축성을 완료했는데, 『비변사등록』에는 삼군문이 담당했던 축성 구간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먼저 훈련도감은 산성의 북쪽에 대한 축성을 담당해 2,292보의 성벽과 4개의 성문을, 금위영은 산성의 동쪽에 대한 축성을 담당해 2,281보의 성벽과 4개의 성문을, 그리고 어영청은 산성의 남쪽에 대한 축성을 담당해 2,507보의 성벽과 5개의 성문을 완성했다. 이를 현대의 축척으로 환산하면 전체 길이가 11.6km로 조선시대에 축성된 산성 가운데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으로 북한산성 축성이 대규모 토목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산성 축성 이후 승영사찰을 어떻게 관리하고 운영했을까. 이러한 내용은 성능 스님이 남긴 『북한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북한지』에 따르면, 팔도도총섭을 겸임한 승대장 1명이 산성 중앙에 위치했던 중흥사에 머물면서 산성 내의 사찰을 전체적으로 지휘했으며, 그 아래에 승장(僧將) 11명, 수승(首僧) 11명, 의승(義僧) 350명 등 총 410명을 배치했다고 한다. 즉, ‘팔도도총섭(승대장) → 승장→ 수승 → 의승’으로 이어지는 승군의 지휘체계를 구성해 산성을 상시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북한산성 관리조직(1,649명) 중 승영(410명)의 인원현황

총섭 / 중군(中軍) / 좌별장(左別將) / 우별장(右別將) / 천총(千總) / 파총(把總) / 좌병방(左兵房) / 우병방(右兵房) (각 1명) 
교련관(敎鍊官)/ 기패관(旗牌官) / 중군병방 (각 2명)
오기차지 / 도훈도(都訓導) / 별고감관 (각 1명)
사료군관 (10명)
서기(書記) / 통인(通人) (각 2명)
고직(庫直) (3명)
책장무(冊掌務) / 판장무(板掌務) (각 1명)
취수(吹手) (2명)
각사승장 / 수승(首僧) (각 11명)
의승(義僧) (350명)

병자호란 이후 숙종 대에 북한산성이 증축됐다. 성능 스님의 지휘 아래 승군이 참여했으며 북한산성 내에 11개 사찰이 세워졌다. 지금은 폐사된 부왕사는 조선 후기 111칸의 거찰이었다. 사진 유동영
북한산성에는 중문(中門)이 독특하게 세워졌는데, 외적의 주요 침입 경로인 노적사 인근에 중문을 세워 방어를 대비했다. 사진 유동영

북한산성에 주둔했던 승군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의승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각 도에 그 인원을 할당해 1년에 2개월씩 교대로 산성 근무를 섰던 번승군(番僧軍)이었다. 이 제도는 팔도도총섭 성능이 산성에 머물었던 1745년(영조 21)까지는 그대로 유지됐으나, 각 지방의 사찰과 승려들에게 경제적 부담 등 다양한 폐단이 노출돼 1756년(영조 32) 폐지됐다. 이후 산성에서 근무해야 할 승려들에게 국가가 일정한 금액을 받고 대신 근무만 서는 방번승(防番僧)을 고용하는 제도로 바뀌기는 했지만, 산성을 방어하는 승군의 지휘체계는 그대로 유지됐다. 

산성 내 승영사찰들은 중흥사에 있는 승군장이 지휘하는 지위체계를 편성하고 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삼군문에 소속돼 통제를 받으며 산성의 상시적인 방어 업무에 주력했다. 현재 북한산성 내 금위영 옛터에 남아 있는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1715년 작성)에는 “보국사, 보광사, 용암사, 태고사 4사찰이 이 구역에 소속되어 있다”라고 기록돼 있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훈련도감에 소속된 사찰은 그 위치로 보아 서암사, 상운사, 진국사이며, 어영청은 국녕사, 부왕사, 원각사가 소속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들 승영사찰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군제도가 폐지돼 승군이 해산되면서 쇠락해 갔고, 결국 사찰 대부분은 폐사(廢寺)됐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에 대해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토벌한 승려를 총섭이라 한다”고 했듯이 승군의 대장을 가리켰던 조선 후기의 승군제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군제(軍制)가 근대화로 개편되어 폐지될 때까지 약 300년간 유지되면서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호국적인 신념을 발휘했으며, 더불어 조선 후기의 불교 교단을 보호하는 양면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승군이 배치됐던 산성의 위치. 전국 각지의 산성에 승군이 배치됐다.
박세연의 논문 「17~18세기 전반 승군의 확대와 조발방식의 변화」를 참고해 그렸다.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팀 선임연구원. 삼국시대 백제 주거지 발굴을 시작으로 경기도 일대와 서울, 충청북도 등 한반도 중부지방을 옮겨 다니며 발굴조사를 했다. 박물관과 발굴기관에서 문화유산 수집, 발굴, 연구, 보존, 활용 등을 담당했으며, 최근에는 북한산성 성곽조사와 세계유산등재 추진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