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정찬주 작가를 만나다

이순신의 7년, 이순신 찾아 10년

2022-03-29     김남수
정찬주 작가

전라좌수영 의승수군

“거북선 앞머리는 왜 용머리일까?” 누구나 궁금했을 이 질문에서 “스님이 입적하면 세우는 돌거북 탑비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력이 발휘된다. 정찬주 작가의 소설 『이순신의 7년』(전 7권)은 충무공이 연곡사 삼혜 스님의 조언에 따라 용머리를 한 거북 모양의 배 건조(建造)를 결정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정찬주 작가는 이순신을 그리고 싶었고, 잊혀진 의승수군을 그리고 싶어 했다.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이 출판된 지 6년이 지났다. 그래도 작가에게는 의문이 아직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와 임금에게 올린 「장계(狀啓)」에 승장(僧將) 삼혜, 의능, 지안, 성휘, 신해라는 법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전쟁 200년 뒤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는 승장 삼혜와 의능 스님이 빠지고 자운과 옥형 스님이 등장합니다. 『승평지(昇平志)』와 흥국사 「선당 상량기」 등에서도 두 분이 등장하죠. 여수 지역에는 자운 스님과 옥형 스님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세세하게 기록을 작성했던 이순신 장군은 왜 두 분 이름을 제외했을까요?”

소설에서는 자운과 옥형을 삼혜와 의능 스님으로 추론한다. 즉 “삼혜, 의능 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내려진 시호(諡號)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운 스님의 부도가 실상사, 화엄사 등 전라도 일대에 2개나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찬주 작가는 충무공 이순신을 그리기 위해 10년을 준비했다. 자료조사는 물론 남해 일대를 광범위하게 답사했다. 의승수군 자료 발굴을 위해 『난중일기』를 비롯한 글과 여수 흥국사, 석천사 일대의 설화까지 조사했다. 또 전라좌수영의 의승수군이 숙식했던 의승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의승수군이 전라좌수영 여러 장수와 더불어 소설의 주인공이 된 이유다. 

정찬주 작가는 화순 쌍봉사 곁 이불재(耳佛齋)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순신의 7년』을 쓰기 위해 10년간 답사와 자료조사를 했다. 

 

충무공 이순신

이순신 장군을 글로 풀어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부담이다. 5,000만 국민의 1억 개 눈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7년』은 소설이지만 7년 전쟁의 기록으로 보아도 충분하다. 전쟁에 나가는 충무공이 지루할 정도로 수색과 정찰에 충실했듯이 작가 역시 조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남해를 수차례 답사했으며 주요 전투가 벌어진 한산도 일대는 배를 빌려 수심을 확인했다. 같은 바다라도 수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板屋船)을 물에 띄우면 4m 내외가 물에 잠긴다. 수심 깊이에 따라 전투 양상이 달라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몇 가지 발견했다. 판옥선의 재질이 소나무였을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통설과 달리, 소나무와 참나무를 섞어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소나무와 참나무는 팽창력이 다르기에 배의 강도가 단단해진다. 이것이 수많은 전투에서 판옥선이 왜선을 물리친 또 하나의 이유다. 판옥선의 갑판은 물에 젖으면 불에 타지 않는 오동나무로 만들었다. 어선을 만드는 목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밝혀낸 사실이다.

작가는 이순신 장군의 ‘당파(撞破)전술’에 대한 왜곡된 이해도 꼬집는다. 흔히들 영화의 영향으로 당파전술을 ‘왜선에 판옥선을 부딪쳐 격파하는 전술’로 이해하는데, 잘못된 이해다. 충무공의 기본 전술은 ‘함포(艦砲)사격’이다. 판옥선은 함포를 위해 최적화된 배이기에, 수색으로 발견된 왜선을 기습해 포로 무너뜨리는 것이 충무공의 기본 전술이란다.

『난중일기』에는 이색적인 기록도 나온다. 충무공이 1596년, 사월 초파일을 앞두고 한산도 통제영에서 연등을 직접 달았다. 술에 취해 연등을 켠 이순신 장군은 어떤 기도를 했을까?

어머니의 건강과 부하들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었을 테다. 

“승군들은 군량미를 확보하고 전투에도 참여했죠. 하지만 이분들이 승려 본분의 역할을 잊었을까요? 수군은 죽으면 시신도 찾기 어렵기에 ‘귀신굴’에 들어간다 했어요. 승군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재를 지내지 않았을까요? ”

작가는 충무공이 의승군과 함께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