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부도浮屠, 영원의 빛

2022-03-29     불광미디어
대흥사에 모셔진 서산대사 부도(보물). 스님은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했다.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다. 

“조선 사회에 승려들은 신분이 보장된 위치도 아니었다. 승군으로 활동했던 스님들은 살생업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살육 현장에 나갔던 이들이 적지 않다. 한편 철저하게 오롯이 출가수행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스님들도 많다. 전란에 스님들은 저마다의 길을 걸었지만, 자신과 길이 다르다고 책망하지 않았으며, 어떤 길이었든 스님들의 목적은 중생을 위한 염원이었다.”
_ 정운 스님 

북한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비. 입적 후에 묘향산 안심사에 세웠으나 파손되자, 1711년 보현사에 새로 조성했다. 『북한의 전통사찰 2』에 수록된 사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제공
송광사에 머물던 부휴 스님은 1614년 칠불사로 옮겨 입적했다. 칠불사 부도는 운상선원 우측 아래에 있다. 칠불사 외에 송광사와 해인사 등에도 스님의 부도가 있다. 송광사는 보조지눌 스님 바로 아래에, 해인사는 국일암 입구에 있다. 
정관 스님이 입적한 천년고찰 백련사는 6.25 전쟁 때 폐허가 됐으나, 1962년부터 금당을 세우고 부처님을 모셨다. 
국립공원 덕유산 안내소에서 백련사까지는 약 6km이다. 길은 완만하고 편안하다. 
사명 스님은 말년을 해인사 홍제암에서 보내다 입적했다. 입적 후 광해군은 스님에게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린다. 스님의 탑비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이 네 조각으로 부순 것을 1958년 다시 접합했다. 
정관 스님은 말년에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대암암 등에 머물다가, 덕유산 백련사로 옮겨 1608년에 입적했다. 속리산 하관음암지에 모셔졌던 스님의 부도는 지금은 제 자리를 벗어나 산기슭에 넘어져 있다.
18세기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처영 스님의 진영에 찬을 남겼다. “여래의 속뜻을 알고 수천의 승군을 이끌었으니, 
어찌 한 폭의 진영으로 공경스러움을 표할까.” 부도는 무량사에 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