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전쟁과 살생, 스님들의 고뇌

2022-03-29     정운 스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다. 사위국의 유리왕은 어린 시절, 외가였던 카필라국에서 천대받았던 경험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언제고 보복할 마음을 먹고 있다가 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카필라국을 패망시키는 일이었다. 어느 날 유리왕은 전쟁 준비를 마치고, 카필라국을 향해 갔다. 카필라국에 다다를 무렵, 길녘에 부처님께서 뙤약볕 마른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유리왕은 부처님을 보고 말에서 내려 말했다.

“부처님 저쪽 큰 나무 아래 녹음이 우거진 곳에 계시지 않고, 그늘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은 나무 밑에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고향 카필라국은 이렇게 초라한 작은 나무나 다름이 없소. 저 큰 나무 그늘보다 나의 고향 같은 이 작은 나무 그늘이 더 편안하다오.”

유리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유리왕은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했고, 네 번째는 부처님도 길을 막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나의 고향 카필라국의 인연도 다하였구나”라고 하셨다.

이 내용을 ‘깨달은 성자도 고향에 대한 애착이 있다’라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필자는 달리 본다. 부처님 입장에서 전쟁으로 수많은 중생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안타까웠을 거라고 본다. 어느 누군들 귀하지 않은 생명이 있겠는가! 가해자 국가 사람이든 피해자 국가의 사람이든 부처님에게는 모두 똑같은 자식 같은 중생들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고, 200년 동안 전란이 없던 평화로운 강산에 중생들의 피가 낭자할 때, 우리나라 조선시대 승려들은 어떠했을까? 부처님이 어느 나라 중생이든 똑같이 자식처럼 여겼듯이, 스님들도 가해자인 일본인이 안타까웠을까? 혹 죽어가는 동족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전쟁에 대한 네 가지 생각

스님들 중에는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처럼 의승군으로 활동한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적군이지만 승려가 칼을 들고 사람을 살상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70여 명인데, 당시 사회상황에 대처했던 방식에 따라 스님을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승군을 이끄는 의승장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서산휴정·기허영규·뇌묵처영·사명유정이다. 둘째는 의승군도 아니고 산중에서 수도하는 것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분들인데, 편양언기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의승군으로 잠깐 활동했다가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은둔한 경우인데, 경헌(敬軒)·청매인오·기암법견 등이다. 넷째는 수도에만 전념하면서 승려의 본분을 지켰던 소요태능·정관일선과 휴정과 동문인 부휴선수 등이다.

당시 조선 사회의 승려들은 신분이 보장된 위치도 아니었다. 승군으로 활동했던 스님들 중에는 살생 업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살육 현장에 나갔던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와 달리 철저하게 출가수행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분들도 많다.

수행자로서 철저하게 본분을 지킨 승려가 옳은가? 아니면 불살생을 어기면서까지 적군에게 칼을 겨눈 승려가 잘한 것인가? 국가가 온전해야 종교인의 삶도 있는 법이다. 조국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근자에 한국불교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호국불교 승려들을 내세우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반대도 지지도 아니다. 어떤 선택을 했든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요, 어떤 길을 선택했든 승려들의 공통점은 중생에 대한 대비심(大悲心)이 전제돼 있다는 점이다.

 

정관 스님 “본분을 지켜야 한다”

의승군으로 출전했던 경우와 철저하게 수행자의 길을 걸었던 승려들을 두 부류의 입장에서 만나보자.

먼저 오롯이 승려의 길을 걸은 선사를 만나보자. 서산대사 휴정에게 크게 4대 제자가 있다(훗날까지 4대 분파로 나뉘어 법이 전승돼왔다). 사명유정·편양언기·소요태능·정관일선이다. 엄밀히 따지면, 사명유정 이외 세분은 수행자의 길을 선택한 분들이다. 이 가운데 대표로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을 만나보자. 

정관은 ‘승려로서 전란에 참여하는 것은 불도에 어긋난 일’이라고 하면서 ‘승려는 산중에서 청정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관은 휴정의 제자 가운데 장자 급에 해당한다. 사명대사가 전쟁이 끝나도 산중으로 돌아오지 않자, 빨리 산중으로 돌아올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정관집(靜觀集)』 「상도대장년형(上都大將年兄)」으로 전한다. 정관은 서산대사 문파의 맏형으로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정관은 휴정 문하에서 수행한 뒤 법을 전해 받았다. 임진란이 발생했을 때 정관의 세속 나이는 60세였다. 정관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전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위한 수륙재를 지냈다. 경전을 강의하며, 삼문(三門)을 중시했다. 삼문이란 염불정토와 간화[경절문(徑截門)], 불교학[원돈문(圓頓門)]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삼문일치라고 볼 수 있다. 정관은 전란에 은둔하면서 독자적인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던 대표적인 선사다. 정관의 수행관은 그의 선시에 잘 드러나 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세속을 떠나 발우 하나 지니고, 
세상사를 벗어 던진다. 
속세를 벗어난 노을과 안개, 마음에 흡족하니 
중생의 어지러운 욕심과 번뇌, 좇을 일이 아니다.
유유悠悠한 세월, 마음 따라 한가로이 보내며 
산천을 따라 자재롭게 노닌다.”

혼란한 시대에도 본분을 잃지 않는 수행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정관은 임진란 이후 세태 풍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승려들이 절을 떠나 활동하면서 속세의 습관이 싹터서 출가한 뜻을 잊어버리고 계율을 버려둔 채 허명만을 좇고 있다. 교단에 많은 폐해가 생겨나고 있다.”

 

전쟁 참여한 사명·영규대사 

정관 스님과 반대로 전쟁에 참여했던 호국승려인 사명대사를 만나보자.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은 국가에서 실시한 승과에 18세에 급제했다. 사명은 20대 후반에 직지사 주지를 역임한 뒤 1575년 31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다. 하지만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에서 주석하고 있는 서산대사를 찾아가 제자가 됐다. 얼마 후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났다. 사명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돼 승병 2,000명을 이끌어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어서 1593년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자, 선조로부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받았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는데, 네 차례 회담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여러 조항을 조목조목 들어 논리적인 담판으로 왜장을 물리쳤다. 

이렇게 회담하는 와중에 사명은 선조에게 ‘백성을 편안토록 해야 하며,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군수 무기 준비’를 건의했다. 또한 사명대사는 불교와 관련된 여덟 가지를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승려들에 대한 침해가 너무 심해 고통받고 있으니, 국가적인 배려를 해달라는 요구였다. 선조는 철석같이 약속했지만, 유생들의 반발로 승려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물거품이 됐다. 

1594년 사명이 의령에 주둔했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해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했고, 산성 주위를 개간해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했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벼슬을 내렸다. 사명은 1604년 휴정이 입적하는 무렵, 선조의 부탁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사명은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했다. 선조는 왜란이 종결된 뒤 몇 고승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 가운데 사명을 도성 가까이 두고자 요청했고 사명은 잠시 도성에 머물렀다. 이후 사명은 영의정 벼슬을 받았지만, 바로 물리치고 승려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명대사에게 호국승려의 모습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명대사는 불교 교학에도 뛰어났으며, 선시에도 능한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명집』의 서문을 쓴 허균(1569~1618)은 사명의 선시에 대해 “뜻이 맑고도 격조가 높다. 내 중형도 몹시 칭찬하면서 그는 충분히 당나라의 아홉 승려와 비교할 만하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또한 사명은 글씨가 왕희지체(중국 최고의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체)에 능했는데, 서산휴정과 사형사제인 부휴선수와 함께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당대의 ‘이난(二難)’이라 불리었다. 

사명은 사숙이었던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와 매우 가까웠고 법형제처럼 서로를 존중하는 인연이었다. 

사명대사가 부휴에게 “나라가 어지러워서 저는 승려로서의 본분사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저 대신 스님께서 열심히 정법(正法)을 이어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화답으로 부휴는 이렇게 보냈다. 

“바람에 나부끼며 어촌을 지난다. 
구름 장삼 모래 울리는 백리의 명사길,
그대 생각에 애가 닳는구나.” 

부휴선사가 의승군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전쟁터에 있는 사명대사를 얼마나 안쓰러워했는지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정관 스님은 오롯이 수행자로서의 길을 선택했지만, 승군이었던 사명을 비난하거나 질타하지 않았다. 왜란이 끝나고, 1641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상송운대사(上松雲大師)」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먼 길을 떠나는 그에게 늙고 병들어서 전송하러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한 분의 의승군을 꼽는다면, 승려로서 최초로 출전해 8백 의승군을 일으킨 기허영규(騎虛靈圭, ?~1592)다. 자신과 국적이 같은 중생에게 꽂히는 칼날을 대신 받겠다는 영규대사의 그 연민심을 어찌 과소평가하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란에 스님들은 저마다의 길을 걸었지만, 자신과 길이 다르다고 책망하지 않았다. 어떤 길이었든 스님들의 목적은 중생을 위한 염원이었다. 불교사에 부처님과 스님들은 길 위의 삶, 중생과 함께였다. 바로 화광동진(和光同塵)·회두토면(灰頭土面)·말토도회(抹土塗灰)라고 볼 수 있다. 즉, 중생이 살고 있는 진흙밭에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의승군이었던 서산·사명·영규대사의 바람도 그러했으리라. 이들의 행보는 현 한국불교의 기틀이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됐다. 

 

정운 스님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동국대와 중앙승가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교육아사리다. 대승불전연구소에서 경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