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승군, 북을 울리다

임진왜란 발발과 전투에 참여한 스님들

2022-03-29     박재광
<평양성 탈환도>, 1593년 2월 평양성 전투를 후대에 재구성한 그림이다. 
주로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전투 장면이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라 위해 봉기한 의승군

지금으로부터 430년 전인 1592년 4월 14일, 조선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15만여 명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영향을 남긴 대사건이다. 7년여에 걸쳐 지속된 전란은 조선왕조의 정치체제와 사회경제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동북아시아 삼국이 모두 전쟁에 휘말림으로써 동북아시아 차원의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전쟁 초기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채 20일이 안 돼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무혈점령했다. 이후 평안·함경도까지도 유린당하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의 관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군의 활약, 수군의 연승, 명의 지원에 따른 반격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해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의병과 의승군은 유례 없는 전란을 극복하는 데 관군 못지않게 활약한 군사집단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의병들은 장수가 대부분 전직 관료 내지는 명망 있는 유생들이었기 때문에 관군과 대등한 입장에서 근왕(勤王, 임금에 충성을 다함)을 내세우고, 각지에서 제한 없이 독자적인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의승군은 의병과는 성격이 사뭇 달랐다. 불교가 이미 정치와 무관했던 시기, 승려 신분이었던 의승군은 양민 이하로 취급돼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승군은 전국 각지에서 봉기해 중요한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다. 의승군이 활약한 전투는 청주성 수복 전투, 금산성 전투, 평양성 수복 전투, 행주산성 전투, 노원평 전투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의승군은 의병보다 그 수는 적지만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들 의승군은 전란 초기에는 의병과 마찬가지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명나라 원병이 오고, 관군이 재정비됨에 따라 전투 참여 외에도 군량 운송이나 성곽 축조 등 후방지원까지 다양하게 활동했다. 이렇듯 임진왜란 때 활동했던 승군은 오로지 국가적 위기 타개를 위해 승려들이 자율적으로 봉기한 최초의 의승군(義僧軍)이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승군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산, 사명, 영규, 처영대사

임진왜란 당시 승려 신분으로 최초로 의병 봉기한 이는 영규(靈圭) 스님이다. 그는 계룡산에 입산한 뒤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됐다가 서봉사, 갑사 등의 주지를 역임했고, 전란이 있기 전에는 공주 청련암(靑蓮庵)에서 수도하면서 선장(禪杖)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영규 스님이 승병을 일으킨 시기는 5월 중순경으로 추정된다. 영규 스님이 이끄는 의승군은 충청우도 지역에 있던 사찰의 승려들로 청주성 전투와 금산성 전투에 직접 참가해 전쟁을 벌였다. 처일(處一) 스님과 보광사의 승군들도 시기·지역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영규 스님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임진왜란이 반발하자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돼 승군을 이끌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명대사 유정(1544~1610).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을 통솔했다. 평양성 전투, 노원평 전투에 참여했으며, 강화협상과 전후 포로 귀환에 공을 세웠다. 표충사 호국박물관 소장

영규 스님이 봉기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승군들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됐는데, 이는 그해 7월, 조정에서 승통(僧統, 승군을 통솔하는 관직)을 설치하고 의승군을 모집하기 위해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를 초치(招致, 불러서 안으로 들임)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람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서산대사를 불러 의논하고자 했고, 서산대사는 7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달려가 의주 행재소에서 선조를 배알했다. 그때 선조가 “이같이 세상이 어지러운데 그대가 널리 구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휴정이 “국내의 치도(緇徒)로서 늙고 병들어 싸움에 참가할 수 없는 자는 신(臣)이 명령하여 있는 곳에서 분향을 올리며 신(神)에게 도와줄 것을 기도드리게 하고, 그 나머지는 신(臣)이 다 통솔하고 싸움터에 나가 성심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며 나라를 구하는 데 혼신을 다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선조는 서산대사를 8도(道)16종(宗) 도총섭(都摠攝)에 임명해 승군의 궐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이에 서산대사는 순안 법흥사에서 전국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의 봉기를 독려했다. 서산대사는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가지 못하는 승려에게는 절을 지키며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해 전쟁터로 나가 나라를 구하자고 설파했다. 

“여러분! 우리 불교에서는 살상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여래의 가르침을 잊고 우리 중생을 살상하고 있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이 국토 안에서 살고 있는 이상 우리 모두가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자!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조국을 구출합시다. 이는 곧 부처님의 뜻입니다.” 

위국효충(爲國孝忠)을 부르짖는 감동적인 서산대사의 격문에 의엄(義嚴) 스님은 황해도에서,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사명당(四溟堂, 사명대사 유정) 스님은 강원도에서, 처영(處英) 스님은 전라도 지리산에서 들고 일어나 구국에 앞장섰다. 이들 의승장은 의병 내지는 관군들과 협력하며 많은 전과를 올림으로써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영규대사(? ~ 1592), 호는 기허(騎虛).
갑사에서 출가해 조헌 의병장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으며 금산 전투에 참가해 의승군과 함께 전멸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처영대사, 호는 뇌묵(雷默).
금산사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호남에서 1,000명의 승군을 일으켜 배고개 전투,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대흥사 성보박물관 소장 

 

승군의 지휘체계

이들 의승군이 봉기하게 된 동기는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열세로 인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 기인한다. 결국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승려들 스스로 봉기한 최초의 의승군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의승군은 기본적으로 도총섭과 총섭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나 봉기 초기에는 일반 의병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적 활동이 많았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독자적인 형태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에 벌어진 청주성 수복 전투, 금산성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 전투에서 의승군은 전적으로 영규 스님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운영됐다. 이러한 상황은 사명당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명당이 이끄는 의승군도 평양성 수복 전투에 참여하기까지는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의승장들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의병, 관군들과 협력하며 활동했던 것이다. 

서산대사 교지. 서산대사를 선교도총섭(禪敎都總攝)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 소장

그러나 서산대사가 의승군의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된 이후엔 그를 중심으로 형식상의 지휘체계가 갖춰졌다. 도총섭이 전국 8도의 의승군을 총괄했고, 휘하에 총섭승이 있어 각 도의 의승군을 통솔하는 등 점차 뚜렷하고 유기적인 지휘체제를 갖췄다. 그해 10월 후반경, 적 토벌에 대한 전공을 포상하기 위해 ‘서산대사[休靜]를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팔도승병도총섭을 삼고, 사명당[惟政]은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켜 부총섭을 삼다’는 기록도 있어 이후 의승군의 지휘체계는 더욱 구체화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서산대사는 나이도 많고 기력이 쇠하여 전장에서 의승군을 실제로 지휘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상 부총섭이었던 사명당이 의승군 지휘를 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의승군의 지휘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조선시대 전시의 최고 군직) 등의 지휘를 받은 사명당이 수행했다. 따라서 이후 평양성 수복 전투 이전의 보급로 차단 및 정보활동, 그리고 평양성 수복 전투, 한성 수복의 계기가 되는 노원평 전투 등은 사실상 사명당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성 수복 이후 1대 팔도도총섭이었던 휴정은 선조에게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사명당)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라며 사직을 청함으로써 2대 도총섭은 사명당이 맡게 됐고, 3대 도총섭은 의엄 스님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명당이 도총섭을 직책을 이어받기 이전에도 사실상 의승군은 사명당의 주도로 활동했다고 짐작한다. 아울러 의승군은 1593년 8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돼 조직화 되기에 이르렀다.

사명대사 교첩. 사명대사를 경상도 총섭에 임명한다는 내용이 실렸으며, 
비변사가 왕명을 받아 발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표충사 호국박물관 소장

한편 초기 의승군 활동은 직접적으로 전투와 관련되는 활동이 주를 이루었고, 활동과 관련해 의병과 마찬가지로 자율성도 다소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임명되어 직첩을 받는 도총섭과 총섭은 기본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토벌한 ‘領軍討賊之僧(영군토적지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승직이 아닌 승군을 총괄하는 총수를 의미했다. 도총섭이나 총섭승은 의승군 자체적으로 선출된 것이 아니라 조정으로부터 직첩을 받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자율성이 침해될 소지가 있었다.

이러한 의승군의 성격은 기능과도 연관돼 점차 관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전투력을 회복하자, 의승군의 기능은 점차 변질돼 자율성도 떨어지고 도원수의 절제를 받게 되는 준관군(准官軍)의 형태로 변하게 됐다. 1592년 12월, 명나라 원병이 들어오자 의승군 중의 일부는 군량을 운송하는 일에 동원됐고, 이듬해 4월 일본군이 남쪽으로 퇴각한 이후에는 장기전에 따른 대비로 실전에 참가하던 대부분의 의승장들이 승군을 이끌고 성을 쌓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전쟁 와중이었던 1593년에는 전라도의 여러 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서 담양의 금성산성과 장성의 입암산성, 인조 대에는 무주의 적상산성을 수축했다. 이들 산성에는 모두 승군이 관여했고, 배치돼 있었다. 남해안의 수영(水營)에는 임진왜란 도중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했던 승군이 전후에도 그대로 있었다. 그 밖에도 정족산·오대산·적상산의 사고에 승군이 배치됐다.

이렇듯 조선 조정은 전쟁 당시 활약했던 승군을 전란 이후에도 그대로 군사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다만 국가에서는 일괄적이고 직접적으로 승군을 조발(調發, 강제로 뽑아 모음)하기보다는 명망 있는 고위 승려를 총섭 등으로 임명하고 이들이 승군을 모집하게 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인원을 확보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 주둔하며 구한말까지 유지됐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의승군 활동은 전 불교계가 능력과 관심을 총집결했을 만큼 가장 비중이 큰 활동이었다. 그 결과로서 임진왜란 이후 불교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인식이 새로워지고 어느 정도 그 위상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는 호국불교의 전통적 맥락이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행주산성 부조. 행주산성 권율 장군 동상 주변의 부조로 승군의 전투를 세세하게 묘사했다. 사진 유동영

 

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교육팀장, 성균관대 겸임교수, 건국대·중앙대·한국외대 강사 등을 역임했고, 현재 건국대 박물관 학예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조선시대 전쟁과 전술, 무기 발달 등 우리 민족의 대외 항쟁사와 이순신, 권율, 사명당 등 전쟁 영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폭을 넓혀가고 있다.